거절당할까 전도하기가 두렵습니다.

조회 수 2520 추천 수 89 2009.08.11 23:56:16
거절당할까 전도하기가 두렵습니다.


[질문]


전도를 하고 싶습니다. 저와 성격이 잘 맞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안타까움이 느껴진다면 전도를 해도 된다는 싸인(!)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놓고 기도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솔직히 미운 사람들도 많지만, 하라고 하시면 복음에 대해서 말해줘야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1) 저는 거절당하는 것이 너무 무섭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운 것인지 예수님을 부정당하는 것이 무서운지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구요. 사회생활을 하다가 불이익이 올까봐 두려운 것하고는 또 다른 것 같습니다. 거절당하는 것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무섭다는 것이 불신앙의 또 다른 형태일까요?

당당하게 말하고 싶지만 저는 사실 그럴만한 위치도 아니고(세상적으로) 제 앞가림도 잘 하지 못하는 걸 저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어서요. 솔직히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단지 말씀을 전달하더라도 저의 모습을 통해서 말씀이 현실에서 보여지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이 가식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거리감을 느낄까봐 그런 것이 더 무섭습니다. 복음을 몰랐을 때도 좁은 인간관계였는데 그나마도 있었던 사람들이 다 떠나 갈까봐 그래서 더 걱정이 됩니다.

2) 인간관계에서 저만 일방적으로 짝사랑 하는 것 같아서 화가(?)납니다. 그냥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서운한 것인지 예수님을 몰라주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인지...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도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용기내서 예수님을 말했을 때 '또 빤한 이야기'취급을 당한다든지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오면 저 혼자 열 내고 힘들어하며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예수님의 마음을 100%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면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저 말고 다 상대방이 잘되라고 그러는 것인데) 저 혼자만 힘들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믿음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왜 믿지 않냐, 왜 믿음이 없냐?”고 말하는 것이 제가 오히려 교만에 차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뭔가 서운한 마음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 제가 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그런 거라는 것도 알지만 문제는 믿던지 말든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지요? 사람들을 대할 때 저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 방향과 연결되는 문제라 쉽게 그렇게 되지 않고 또 막상 전하면 거부를 당하니 더 힘듭니다.  


[답변]

답변을 드리는 저부터 부끄러워질 정도로 주님과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사랑과 열심이 참 으로 대단하십니다. 상의하신 두 가지 문제가 그 정도만 조금씩 다를 뿐 신자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고민입니다. 전도나 사랑에 관한 성경적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으로 답변에 대하겠습니다.

거절당하게 마련인 복음

전도는 크게 보아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상대로 천하의 가장 큰 죄인, 아니 지금 당장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야만 할 죄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모든 죄를 도무지 스스로 씻을 길이 없음을 납득시켜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바로 이 두 가지 점 때문에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그럴 정도까지의 죄인이 아니라는 것과, 나와 아무 관계없는 예수만 믿어야 한다는 것이 그 반발의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반발하지 않는 자는 최소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졌기 때문인데 전도가 되었거나 전도의 문이 열린 셈입니다.

바꿔 말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면 상대는 반드시 격렬하게 반발하든지, 겸손하게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성도들이 전도하고 오면 반드시 그 반응을 물어보고 이 둘 중의 하나가 아니면 오히려 전도자의 잘못을 지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수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4-17)  

바울은 지금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면 반드시 사망 아니면 생명의 냄새를 피운다고 합니다.  영원히 멸망하는 자가 되든지 구원을 얻는 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현실에서 무슨 일을 해도 형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져 사망 아니면 생명 둘 중 하나의 반응으로 나타나면 바로 승리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웨슬레의 지적대로 복음에 대해 무덤덤하게 반응하면 전도자가 세상에 진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하여서 거절 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격렬하고도 분명한 거절을 당하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피워 이긴 것입니다. 물론 “나는 잘 믿어서 천국 가고 이 쉬운 복음을 못 알아듣고 회개치 않는 완악한 너희 같은 종자는 지옥 가도 마땅하다”는 식의 승리는 결코 아닙니다. 전도자로서 상대의 영혼이 너무나 안타까워 진정한 복음을 전했기에 신자로서 할 바를 다했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말로써 전하는 것(전도) 즉, 상대의 영혼에 새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그쳐야 합니다. 구원 자체는 하나님이 하는 일입니다. 물론 전도자가 계속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며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몫이자 책임입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입니다. 구원까지 다 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믿지 않는 형제에게” 사이트의 #1 “전도만 하지 구원하려들지 말라.”를 참조 바랍니다.)

거절되는 것을 겁낸다면 어떤 경우도 거절되지 말아야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전도가 항상 성공하거나, 아니면 상대 기분을 상하지 않게 복음을 혼돈하게 전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둘 다 아주 틀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거절당할 때도 있고 호의적 반응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 전도는(구원이 아니라) 일단 성공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은 하나님이 하실 몫입니다. 실제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인 이방인의 사도 바울마저 전도할 때는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바울은 오직 십자가 복음만 순전하게 전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반발이 격심할 것을 알고 있었고 또 핍박까지 당하리라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순전한 복음만 전한 까닭은 자신의 전도가 아니라 믿음은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생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전도가 거절되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자 섭리입니다.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전도가 되면(구원까지 되면) 상대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전도자의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도 자칫 하나님이 아닌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의 말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고, 피전도자도 자신이 그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이성적 능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고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을 받는 결과가 됩니다.

바꿔 말해 전도가 거절되면 절대로 전도자 자신이 거절당했거나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실패한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복음의 성격상 십자가의 예수는 거절 아니면 순종 둘의 반응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거절된 전도 과정 중에 전도자나 피전도자에게 공(共)히 참 복음의 권능과 은혜가 이미 베풀어진 것입니다.

전도자가 실망치 말아야 할 이유

물론 전도자로선 이왕이면 호의적 반응이 많았으면 싶습니다. 자꾸 전도가 거절당하면 의욕마저 상실됩니다. 혹시 복음을 잘못 전했는지, 전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는지 후회가 앞섭니다. 때로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그 영혼이 불쌍해 전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심지어 광신자 취급을 당하면 상대가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신자는 전하기만 하고 실제 전도의 역사는 성령님이 담당하시는 줄 잘 알아도 그러합니다. 성경은 신자는 그런 실망을 할 필요가 없다고 또 다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1-4)

직분자가 낙심하지 말고 대신에 성도답게 거룩해지고 복음을 혼잡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복음이 가리운 것은 그 영혼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어차피 거절당할 것이니까 실망하지 말라는 동일한 이유로 그칩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사단의 흑암 아니면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들어 있는 두 종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미 구원 얻은 신자로선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어서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7절) 가졌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거절하는 자의 영혼을 계속해서 더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저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혀 못 알아먹거나, 구원의 소망조차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는 더러운 흑암의 권세에 눌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신자가 거절당했다고 낙심에 빠져 있으면 사단에게만 좋은 꼴이 되지 않습니까? 또 사단이 가로막고 있는 영혼이니까 더더욱 인간의 말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만 전도 되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도자로선 정말로 자신은 질그릇에 불과하고 자기 속에 보배로 와계신 그리스도의 빛이 상대에게 비춰질 수 있도록 자신을 낮추고 거룩하게 가꾸며 순전한 진리 위에만 확고히 서야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즉 자신의 신자 된 모습으로) 천거”해야 한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거절당하여 실망하면 사단의 장단에 놀아나는 것인 반면에, 거절당할수록 더욱 그리스도만 온전히 신뢰하고 그분을 닮아갈 때에 거절한 그 사람 아니면 그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권능은 반드시 역사하게 됩니다.    

불신자는 모두 사단의 멍에에 여전히 묶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처음에는 거절하는 반응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유대인은 하나님을 아는 종교인을, 헬라인은 인간의 지혜를 추구하는 불신자를 상징하므로  결국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하는 표적인 현실적 축복만 구하기에 메시아가 십자가의 저주 받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거리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헬라인은 인간의 선행과 공적으로 착한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 마땅하기에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죽은 메시아는 이해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지금도 여타 종교인들은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자가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비난하며, 비종교인도 그나마 행위 구원만 인정합니다. 모든 불신자가 스스로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이라고는 여간해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들 사단이 그 영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능력을 인간 전도자가 제거할 수는 없기에 실망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가 모든 이에게 거부된다고 전제해놓고는 놀라운 진술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과 헬라인 구별 없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정해 놓은 자는 그리스도를 결국은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전도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찾아내는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도를 전하여 상대를 반드시 설득시켜야겠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를 전해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이거나 아직은 하나님의 때가 안 되었다고 간주하면 됩니다. 다른 말로 거절당하면 어쩌나 두려워지는 것은 반드시 내가 설득시켜야지라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 못 얻든 모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 인간의 생각과 길과 하나님의 그것은 전혀 다르고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아니 이해조차 못하는 높은 차원입니다. 바울이 이어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품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 전도에 관해 설명하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모든 불신자에게 십자가가 미련해보이고 거리낌이 되어도 십자가 외에는 절대 구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가 바르게 전해지면 거절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를 찾아내되 오직 그분의 능력과 지혜에만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에 장애가 되는 개인적 사정
    
전도자가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성경적으로는 전혀 없습니다. 반드시 전도해야겠다는 인간적 욕심이 앞서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자를 찾아내는 심정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비유컨대 네잎 클로버 찾으려면 드넓은 초원을 시간과 공을 들여 샅샅이 훑어야 하지만 하나 찾으면 너무나 기쁘지 않습니까? 겨우 찾아낸 네잎 클로버가 그 동안의 수고를 싹 다 잊게 해줄 만큼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진정으로 변화되는 한 영혼을 만나면 그동안 거절당했던 모든 괴로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으면 천국에서도 잔치가 벌어지지 않습니까? 전도는 수없이 거절당하면서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내는 일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거절당할까 미리 염려할 필요도 없지만 거절당한 아픔을 계속 담아둘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직 예정된 자를 평생에 한 명이라도 찾으면 감사하다는 심정과 각오가 전도에는 필수적인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인도 최초의 선교사 윌리암 캐리는 12년 동안에 겨우 한 명 전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자기가 거절당한 것 같은 두려움과 아픔이 있다면 아주 잘못된 자세입니다.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자랑해보이고 싶었거나 전도의 기교나 말의 지혜에 자부심을 가졌다는 반증입니다. 십자가 복음 앞에 자신의 믿음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전해지는 것도 십자가의 도이며 거절당하는 것도 십자가의 도일뿐입니다. 거기에 어떤 인간적인 것도 보태어져선 안 되며 또 하나님의 진리에서 하나라도 빼고 전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질문자님처럼 자신의 현실적 형편이 너무 어렵고, 심지어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전도를 하면 오히려 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 염려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또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결점과 허물을 너무 잘 알기에 전도가 힘들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나아가 성격이 원래 소심하고 염려를 잘 하는 사람에게 전도는 큰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대로 전도에 장애가 될 만한 세 가지 개인적 특성에 관해 간단하게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1) 전도자의 어려운 현실적 형편

우선 현실적 형편이 어려운 것은 전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복음의 내용을 잘 모르는 불신자들로선 하나님을 믿으면 현실에서 형통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맞추어 전도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작금 많은 교회들이 예수 믿으면 자식이 공부 잘하고 병이 나으며 사업도 흥하게 된다는 식으로 전도하는데 엄격히 말해 일종의 사기를 치고 있는 짓입니다.

예수 믿는 본질은 오직 죄에서 구원 받아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그분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현실적 형통을 얻는 것은 결과적인 모습일 뿐으로, 그것도 아주 특수한 경우에만 생기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믿음의 본질 내지 주된 결과인 양 선전(?)했다가 나중에 아닌 것이 들통 나면 문자 그대로 사기 아닙니까?

그렇다고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해주셔서 어려운 형편이 나아졌다는 식의 간증을 나누라는 뜻이 아닙니다. 거의 모두가 이렇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해주시고 경우에 따라 또 그런 방식이 전도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단 그런 간증을 나눌 때는 반드시 죄 사함을 받는 십자가의 도부터 우선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에 응답해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단 믿어보라는 식으로 권해선 안 됩니다.  

반면에 신자가 환난과 질병 중에 있음에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서 어떤 환난에도 염려, 초조, 요동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환난 중에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을 다른 이들이 볼 때 이상하다는 호기심과 신자가 갖는 믿음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를 나도 한 번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은 마치 종교라는 마취약에 취한 광신자처럼 비춰져선 안 됩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종교생활이나 전도활동만 해선 안 됩니다. 환난은 인생이라면 누구나 겪게 마련입니다. 현실적 어려움은 개인적 흠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또 어려움을 최선을 다해 극복하려는 모습은 오히려 이웃의 존경을 살 수 있습니다. 게으르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채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어려움이 닥쳐도 해결하지 않으려 하면서 전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이자 흉이 될 뿐입니다.

말하자면 비록 자기 앞가림을 아직은 못해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주위 사람이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전도에 장애가 될 리는 없습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어려움은 외면하고 전도에만 집중한다면, 예컨대 집에 쌀이 떨어져 아이가 굶는데도 종교생활에만 집중하는 경우라면 전도보다는 진짜 자기 앞가림부터 해야 합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경우가 다르지만 바울도 비슷한 염려를 했지 않습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복음을 값없이 전하기만 했지 자기에게 있는 권한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선교한 교회에서 금전적 보상을 받으면 이왕에 전한 복음에 장애가 될까 염려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반드시 스스로를 경건하고 진실하게 가꾸어서 전해진 복음과 자신의 삶이 달라 보이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의 형편이 어려운 것이 전도에 더 도움이 된다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정작 다른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신자답게 살면 현실적으로 형통보다는 궁핍이, 최소한 풍요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는 무조건 고생시키고 또 신자 스스로도 손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정부패를 전혀 하지 않으며,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가진 것으로 이웃을 도와주며, 검소 근검절약하며 살아야 하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하는데 어찌 풍요로워질 틈이 있겠습니까?

나아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에서도 십자가의 절대적 진리를 증거 하면 세상 사람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게 됩니다. 종교적 박해가 없어도 알게 모르게 불이익이나 차별 대우를 많이 받게 됩니다. 예컨대 승진에서 누락되고 순조로운 업무협조도 받지 못합니다. 신자는 그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타협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가 정말 성경대로 살면 풍요와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시종일관 거룩하고도 경건하게 살면 알게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영적 찔림을 주게 됩니다. 불신자들과 살아가는 방식과 인생의 목표가 정반대로 다르기에 그들로 나도 저 신자처럼 정말 절대적인 진리를 붙들고 싶고 또 그 진리에 따라 살고 싶다는 동기를 심어주게 됩니다. 또 이것이 진정한 전도이기에 어려운 현실 형편이 오히려 전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결점과 허물이 노출 된 상태

이는 그리 염려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동일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에게 결점과 허물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형제들과 같은 동네 사람들과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함께했었기에 너무나 친밀하고 익숙한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메시아라고 선포하니까 잘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비록 아무리 어려서부터 그런 징조가 보였고 특출한 품성을 나타냈다고 해도 쉽게 먹혀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자가 고향에선 배척을 받게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모든 이에게 결점과 허물은 그 종류와 정도만 다르지 다 있게 마련입니다. 이 또한 전도에 역으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결점과 허물을 믿음으로 고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전도하기 이전에 혹은 동시에 완전히는 아니라도 조금씩 나아져가는 상태가 확연히 눈에 띌 때에는 전도에 도움 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예가 있지 않습니까? 그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수차 실패했지만 예수 믿고 기도하여 술 담배를 단번에 끊었다면 어쨌든 좋은 영향을 끼칠 것 아닙니까? (십자가 복음의 본질은 당연히 함께 전해야 합니다.)

문제는 항상 동일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하자로 보이는 현실적 궁핍을 포함해 개인의 결점과 허물은 문제가 아닙니다. 정작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지 않고 또 해도 진보를 전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전도의 장애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로 믿음으로 자신부터 고쳐야 합니다. 주위 사람이나 직장 동료들처럼 친숙한 사람일수록 믿음으로 사는 정직하고 성실한 삶이 말로 전해지는 복음을 뒷받침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에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되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2)

절대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항이 또 하나 남았습니다. 비록 신자의 결점과 허물이 완전히 노정되어 있고 심지어 자신의 앞가림도 못한다는 비난을 받더라도 정말로 전해야 할 자에게는 적합한 때와 기회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형통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도 예수가 없으면 더 불쌍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재벌회장, 대학총장도 예수만이 가장 시급하고도 절실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또 똑 같이 결점 많고 앞가림 못하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은데 그들에게 복음은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광신자라는 역반응을 일으키는 일은 가능한 삼가되 정말 불쌍한 영혼을 향한 열정을 갖고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영적으로 피폐해져서 주님이 절실히 필요하기에 어떤 상황 하에도 즉, 전하는 자의 허물과도 전혀 무관하게 복음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자에게로 성령님이 인도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는 것도 전도에 좋은 방안이 됩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거나 직장을 옮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잘 모르는 자에게 전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길거리에 나가 노방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스쳐 지나가는 자는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여행갈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일상적 대화를 나누며 기회를 틈 타 복음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만 살아 있고 또 온전한 진리를 전하기만 하면 전도자의 상태까지 하나님이 고쳐 주시거나 가려 주십니다. 입이 둔하다고 주저하는 모세에게 입술에 전할 말도 심어준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3) 내성적인 성격

정말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며 낯선 사람에게는 인사도 못 건네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모든 신자에게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이방족속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세례를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 자에겐 참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주로 그 성격을 바꾸려 듭니다. 아니면 어떤 전도의 기교를 가르치려 듭니다. 물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지만 항구적인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전도를 말의 지혜 즉,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려는 헛된 시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성격과 기질이 예수를 믿었다고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소극적, 수동적, 비관적, 부정적 사고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며 또 믿음이 그런 성격을 그 반대의 적극적, 능동적, 낙관적, 긍정적 태도로 바꾸는 것도 아닙니다. 후자가 되어야만 전도가 더 잘된다는 보장도 없다는 뜻입니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아무래도 전도하는 회수는 많아지겠지만 그랬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미 예정한 숫자가 더 늘어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소심한 성격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성품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나아가 바로 그것이 은사와 재능일 수 있습니다. 신자 모두는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한 걸작으로 각자에게 가장 합당하며 유익한 여건에 처하도록 하십니다. 비록 현재 환난 중이나 실직 상태에 있어도 그 자체에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십니다. 소심증도 당연히 그 신자에게 합당하게 하나님이 주신 특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소심한 자가 정말 기도하고 작정하여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복음의 진리는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하고 아주 힘들게 겨우 “예수를 꼭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한마디만 건넸다 칩시다. 상대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저런 사람이 나에게 이런 권면을 하다니 예수 믿는 일이 정말 심각한 문제인가보다 여기고  진지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심심찮게 지나가는 말처럼 전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오히려 소심한 자의 어쩌다 하는 전도가 더 효과가 커다는 것입니다.

또 소심한 성격은 대체로 세밀한 편입니다. 상대를 잘 배려해 주는 법입니다. 사랑하고 섬기는 데에 적격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런 성격이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그런 신자를 성격을 바꾸거나 어떤 테크닉을 가르쳐 직접적인 전도에 나서라고 독려하기보다는 교회 내의 기존 신자를 섬기는 일을 맡기는 편이 좋습니다. 신자라고 모두 다 직접 전도에 나서야만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29-31)

소심한 자는 교회 안에서 연약한 지체들을 봉사 권면 양육하여 세우는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어떤 면에선 교회로 일단 인도한 이후에 더 본격적이고도 핵심적인 전도가 이뤄지는데 바로 그 때에 소심한 분들이 감당할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훌륭한 전도자로서 역할을 분담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전도자의 뒤에서 중보기도에 전념할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설교하여 삼천 명을 회개시킬 때에 나머지 120여명의 제자들이 무엇을 했겠는지 짐작해보십시오.

사랑의 진정한 본질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연약한 인간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는데도 온당한 반응을 받지 못하면 은연중에 섭섭한 감정이 들게 됩니다. 특별히 전도할 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를 믿는 일이 영원한 구원을 받는 인생에서 가장 중차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생전의 인생에서도 올바르게 방향을 수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염려하고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를 전했습니다. 정말 자기 시간과 경비를 축내가며 사랑으로 섬겨가며 그랬는데도 고맙게 여기는 것도 뭐한데 아예 거절하거나 반발만 들으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지 정말 낙심됩니다. 또 어차피 하나님이 예정한 자는 당신께서 구원해 주실 것인데 구태여 전도해야하는지 때로는 의심도 듭니다.

성도가 전도와 사랑으로 섬길 때에 실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위에 열거한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아니 믿음이라기보다는 사고를 바꾸어야 할 문제들입니다. 우선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신자의 소명이자 임무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마치 학생이 공부하고, 군인이 훈련 받고, 회사원이 열심히 근무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힘들고 지쳐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주위 여건이 어떻게 바뀌든 그 직분을 갖고 있는 한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신자가 신자 된 직분을 취소할 수는 결코 없지 않습니까?

특별히 누가 구원으로 예정된 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자녀나 부모의 경우에도 어차피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구원 되거나 말거나 할 테니까 전도하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 죽을 때까지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섬기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위 다른 사람은 가족이 아니니까 외면하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또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런 신자를 신자 취급해 주겠습니까? 전도에 게을리 한다고 기왕에 허락한 구원을 취소하지는 않지만 정말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 전도 했다고 일일이 그 보상으로 복을 받거나 반대로 하지 않았다고 벌을 받지도 않지만 그분과의 평소의 영적인 관계가 올바르게 될 리는 없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 일이 단순히 천국행 티켓만 확보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참 인간다운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 살며 누리는 평강과 자유와 만족은 세상 사람들로선 전혀 알지도 짐작하지도 못합니다. 말하자면 신자로선 주님의 은혜를 주위에 나눠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충만한 것입니다. 전도를 실제로 하고 있든 않든, 예수를 불신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소망마저 없다면 아직 복음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할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일방적 짝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히 따져서 말하면 상대에게 보상을 바라면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이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만 듣기 기대해도 어쨌든 일종의 보상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 예수님이 정확히 지적하셨지 않습니까?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세상에서 사람의 보상은 이미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상은 없다고 합니다. 돈만 밝히는 세리도 그런 사랑쯤은 할 줄 안다고 합니다.  

바울이 사랑의 특성을 설명한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모든 것을 오래 참으라는 말이 주입니다. 상대가 반응을 안보이거나 어긋나도 참아야 합니다. 자랑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등등 모든 것이 사랑한 이후의 자기중심적 혹은 타산적 반응을 하지 말라는 표현입니다. 나아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믿고 바라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절대적 진리가 이미 선포되었으면 다음에는 성령의 역사를 믿음으로 소망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상대의 반응에 따라 자신까지 그와 비슷한 반응을 상대에게 보이는 것은, 아무리 인간이 감정적 동물인지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참 믿음과 참 사랑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믿음을 키우고 의지적으로 사랑을 훈련 연습해야 합니까?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내가 지금 상대에게 베풀거나 전하고 있는 것이 반드시 공짜로 주어야만 하며, 또 주지 않고는 안 된다는 절대적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컨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친구에게 비싼 구명조끼와 튜브를 던져 주고는 아까워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물에 떠내려갔다고 손해를 청구하는 바보도 없습니다. 도움이 된다면 뭣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다 던져 줄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라면 심지어 자기 목숨인들 못내 주겠습니까?

성도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전도해놓고 보상을 바라선 안 된다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 겸손을 취해야 한다거나 하나님이 그렇게 명했으니 그래야 한다는 것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정말로 사랑이나 전도는 반드시 누구에게나 공짜로 한정 없이 베풀어야만, 특별히 상대의 반응과 전혀 무관하게, 하는 것이라고 정말로 확신해야 합니다.

누군가 전도를 먹을 것을 발견한 거지가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동료 거지에게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는 일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곳에 가고 안 가고는 동료 거지에게 달려있지만 정말 안타까운 심정으로 정확히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고픈 거지가 먼저 발견하여 배를 채운 음식창고가 공짜로 누구에게나 무궁무진하게 주는 곳이라면 가르쳐주고선 절대 아까워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 복음의 은혜가 바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공짜로 다함없이 부어줄 수 있을 만큼 충만합니다. 거기에 누구나 반드시 가장 시급하게 받아야만 합니다. 그럼  그 사랑과 은혜는 나눌수록 신자에게 당연히 그분께서 더 풍성히 채워주실 것 아닙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자기 사랑으로 남을 사랑하고, 자기 신앙실력으로 전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낙심되고 짜증나며 상대가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실망하게 됩니다. 비록 나는 때로는 상대에게 실망하고 미워할 수 있지만 그런 나를 주님이 긍휼히 여겨주시고 또 주님이 대신 그를 사랑하고 전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 사랑과 전도 자체가 바로 그런 특성을 지녔지 않습니까? 성경이 왜 계속해서 복음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전도는 성령의 지혜로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다지 강조하지만 신자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당연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결국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당장은 그렇게 될 수 없지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씨름하는 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모든 수고와 희생을 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서 상대를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공짜로 끝없이 사랑을 나눠주겠으며 또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또 그래야만 목숨까지 바치며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히려 일방적 짝사랑이야말로 참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사랑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아니 그분과 원수가 되어 있을 때에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습니까? 또 그러니까 우리더러 원수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감히 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상대에게 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리 성경 말씀으로  훈련 받아도 인간적 반응이, 상대에 대한 섭섭함이든 자신에 대한 실망이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반드시 공짜로 무한정 주어야만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결코 아깝지도 않고 인간적 반응도 나타날 리 없습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짝사랑을 하는 자들이 그 사랑에 바친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고 여기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자기도 모르게 완전히 그 사랑에 빠져서 모든 것을 다 바치지 않습니까?

불신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0,11)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방식을 흉내 내려고만 해선 너무 힘듭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신자가 아가페 사랑을 하자고 아무리 말로 다짐하고 훈련 받아도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또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불신자 쪽에서 먼저 신자나,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사랑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려고 마음먹은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부인, 외면, 아니 미워했고 계속 그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작정입니다. 그런 불신자를 신자는 사랑으로 섬기며 전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럼 거절이나 실망스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들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인 예수를 소개하고자 하는 일념이 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럼 예수가 소개되면 그것으로 솔직히 할 바는 다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한 번만 소개하고 그만두어야 합니까? 그분을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소개해야 하지 않습니까? 공짜로 무한정 베풀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예수가 죄의 화목제가 되게 하기 위한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의 섬김과 전도에는 이 한 가지 목적 외에는 절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지금 하나님이 신자를 바로 그렇게 사랑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입었습니다. 또 지금도 전도의 본질을 미처 알지 못하거나 잊고서 낙망하고 때로는 주님을 원망하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전히 그렇게 우리를 사랑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더러 서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바울은 신자가 전도하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사단이 불신자를 묶고 있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이런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전도란 예수만 전해야 하고 또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을 이룬다고는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도 전파한다고 합니다. 예수가 불신자의 죄의 화목제가 될 때까지 신자는 불신자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 사랑으로 끝까지 보상 없이 섬기면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전해야 합니다.

사단이 불신자를 묶고 있으며 그 중에 누가 구원으로 예정 된지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또 십자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면 격렬한 반응을 접하기 일쑤입니다. 아무리 전해도 먹히지 않고 도리어 반발이나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 신자는 어디까지나 전도만 할 수 있지 구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래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미련한 것입니다. 또 미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예정된 자까지 당분간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수중에 놓아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전도를 통해 불신자를 구원하고자 작정했습니다. 신자의 전도가 당신의 예정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정과 전도는 절대적으로 일치하는 결과를 낳지만 신자만이 불신자와 동료 신자를 참 사랑으로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기에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을 이미 받은 자는 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이며 모든 인생에서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소망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거룩한 통치는 참 사랑으로 참된 전도를 하여 참 공동체를 이룬 곳에만 임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신자에게 전도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미련한 것입니까? 전도와 사랑이 거절당해서 괴로워하는 신자가, 비록 예수님을 향한 그 진심과 열성은 갸륵하지만, 미련한 것입니까?

8/11/2009

사라의 웃음

2013.03.14 23:02:23
*.109.85.156

어쩌면 모든신자들의 숙제인 것 같습니다. 이론상의 전도를 자꾸만 배우고자함이 본성이고요~~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수치인 것으로만 자꾸 생각되어지고요. 반대의 경향이 나타날 때 마다 또 실수로구나, 또 잘못했구나, 또 내탓이구나, 또, 또~~ 나라는 존재는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에 갈터인데 늘 말썽이야~~, 참 여럿 생각들이 엇갈리며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제일로 힘이드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역시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오래도록 배웠기에 그리 물들여진 상태인지라...

오늘 말씀을 읽으며 그간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들이 결국은 자신에게 촛점이 있었던 것임을, 전도한다는 생각 자체에 이미 경직되어진 그 무엇이 작동되었던 것이고 그러다보니 자신을 또 들여다 보며 부족한 것들이 보여지고, 미련스런 모습 때문에 심장이 또 조그라들고...

십자가 사랑 이야기, 사랑함엔 절대 시체였던 자에게 찿아오신 그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은 사랑엔 시체임을 잊곤 시선을 자신에게 두고 있음이 문제임을 배웁니다. 오직 사랑을 가르치시려 씨름하시려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씨름하여 주시고 많은 예정된 자들에게 씨름하시며 얼마나 사랑하여 주심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심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도이심을 잊지 않도록 말씀으로 배우고 또 배우며 상황속에서도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외면치 않기를 또 구하고 구하며 걸어가는 한 걸음, 또 한걸음이 되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모루두개

2024.02.29 03:35:02
*.230.44.2

은사도 구원처럼 예정되어 있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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