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한 내용은?

조회 수 6202 추천 수 46 2010.03.11 19:52:19
성령이 오셔서 세상을 책망한 내용은?


[질문]


요한복음 16장의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강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5-13)

[답변]

제자들에게 행한 마지막 강론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셔서 하실 역할은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주되, 특별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선뜻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우선 너무 추상적인 용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또 죄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의에 대해 책망한다는 것은 뭔가 모순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 든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은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책임질 사유가 전혀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런 궁금증을 밝히려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게 된 배경부터 따져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죄인을 구원해주는 사역이 완성됨으로 성령님이 오셨기에 성령의 책망도 반드시 구원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근심

예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비록 스승이 함께 하지 않더라도 제자들은 이제 곧 온전하고도 절대적 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긍정적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마음에 근심만 가득했습니다. 물론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사랑하던 스승이 죽어야만 한다는 말씀에 염려 안 될 리는 결코 없습니다. 믿음과는 별개의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런 뜻뿐이었다면 최소한 당신께 “어디로 가느냐?”고 질문은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은 지적했습니다. 이 또한 제자들에게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기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세상에서 큰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로선 스승이 큰 권능으로 끝까지 함께 하시어 지켜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마음이 응당 들었을 것입니다. 지난 3년간도 많은 비방과 멸시와 핍박을 당했지만 스승이 앞장서서 방패막이 되어주셨고 또 온갖 이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았기에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 우리끼리만 남게 되면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표면적 결과만 따지면 예수님 말씀은 자살하겠다는 뜻입니다. 맨 처음 스승의 죽음 예고를 들었을 때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스승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라는 꾸지람만 호되게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어떤 제자도 주님의 죽으심을 말릴 수 있는 계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리스도이면서 왜 꼭 죽어야 하는지, 지금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 진지하게 관심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활조차 아무도 믿지 못했고 심지어 빈 무덤을 보고 온 여인들의 보고에도 반신반의했던 제자들로선 오직 스승이 죽지 않고 계속 함께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해도 여전히 어디로 가는지는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사흘 후 부활하겠다고 약속했어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가 꼭 죽어야만 하는지, 또 진짜로 부활하실 양이면 그 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최소한 지금 죽으면 메시아로서의 과업이 중단되는 것은 아닌지 따져 봐야 했습니다.  

스승이 사라지고 난 다음 제자들의 처지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당장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 사회에서 출회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2절) 제자들의 입장에선 이런 황당한 경우도 없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고 좋아서 3년을 따라 다녔는데 구원의 확신도 생기기 전에 도리어 하나님의 대적이 될 판입니다. 또 자기 개인의 문제는 그렇다 쳐도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아직도 감감합니다.  

결국 자기들이 진리를 찾았다고 믿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지난 3년간의 고생은 완전히 헛것이 될 판국입니다. 그 시간을 투자한 열매가 대체 무엇인지, 아니면 왜 우리를 두고 죽는지 그 이유라도 정확히 알자고 핏대를 세우며 반발해도 시원찮을 판국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으로선 제자들이 정작 자신과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소망과 관심을 접은 채 하염없이 장래 일만 근심하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면 상황이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닥쳐올 핍박에 대해 염려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스승이 말하는 대로 앞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혀 감도 못 잡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의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서 질문을 할 여유는커녕 무엇을 질문할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그런 상황을 눈치 못 챌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그들을 야단쳤다기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실상(實狀)을 말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가장 염려하는 바를 덜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우선 당신이 떠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인데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총회에서 제자들을 출회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유대인들이 진리 밖에 있고, 너희야말로 참 진리를 소유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유대인들이 제자들을 죽이고선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주장해도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는 그들이 아니고 바로 너희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와 함께 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성령이 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성령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오셔야만 비로소 당신께서 의도하신 구원 사역이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도 구원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로 성자 하나님이 하실 바, 구원 과업은 완벽하게 달성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습니다. 단지 이 땅에 남아 있을 제자들이 진리 가운데 들지 못하고 있는데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야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이 시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여 부르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에 이미 구원은 받은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100% 보장된 구원 과정이 벌써 진행되고 있으되 각자가 자신의 구원 확신만 아직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만 비로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정확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장래의 핍박 앞에 제자들을 아무 대책 없이 방치해두고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의 의미는 모양이나 기능이 다르다는(different)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똑 같지만 단지 개체만 다르다는(another) 뜻입니다. 비유컨대 전자는 사과와 배의 관계라면, 후자는 모양 색깔 맛에서 완전 복제한 것과 같은 또 다른 사과라는 뜻입니다. 제자들로 구원 진리를 깨닫게 해줄 성령 또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도 또 다른 예수님이 오신다고 약속한 셈입니다. 떠나가신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던 하나님이라면, 새로 오실 예수님은 영으로 오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모양, 색깔, 맛에서 하나 다를 것 없는 사과처럼 동일한 하나님이신지라 구원의 사역이 중단될 리도 없으며 스승이 제자들을 떠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며 아예 너희와 함께 거하며 너희 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염려하는 것처럼 내가 가버린다고 해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결코 중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뜻하는 헬라 원어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곁에서(파라) 위로하는 자(클레토스)입니다.  영어로는 comforter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떠나가더라도 성령이 항상 함께 하여 위로해주므로 어떤 핍박도 걱정할 필요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도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는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했는데 그 하시는 역할을 축약한 의미입니다. 지키다, 돕는다는 뜻의 보(保)와, 은혜를 베풀다, 사랑하다는 혜(惠)와, 스승 사(師)를 사용한 것입니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서 구원하며 또 그 구원의 뜻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후에도 성도를 도와서 보호 인도하는 은혜를 베풀며 나아가 예수님 닮게 변화시키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성령이 오시면 유익이라고 해서 예수님과 성령의 역할에 우열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 사역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신자 개인별로 그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이제 성령님이 맡으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복음이 진리 그 자체인데 성령은 성도로 그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난다는 것 즉, 구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완성시킨 구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는 것인 셈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과연 그 깨우침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구원 법정

예수님은 지금 당신이 죽고 성령이 오심으로 세 가지 대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책망의 원어는 꾸짖다, 혹은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쓰인 용례는 거의 전부 어떤 사람에게 그의 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즉, 깨닫게 함으로써 회개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 책망 받을 대상이 처음에는 죄가, 마지막에는 심판입니다. 각기 죄의 성격과 심판한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중간의 의에 대한 책망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렇게 따지면 그 죄를 심판하는 근거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논리적 흐름에 맞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지금 법정 재판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개하고 있는 셈인데, 의에 대한 책망도 이런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구원에는 법률적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죄는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음에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해 죄인을 의롭다고 판결 내려준 것입니다. 사형을 기다리던 죄인이 오직 어린 양 보혈의 은혜를 믿은 것을 의롭다고 여기고 하나님이 사형을 면제해준 이신칭의(以信稱義)가 구원의 핵심 의미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한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 세워져서 죄에 대한 판정을 거쳤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령의 책망도 구원을 주기로 택한 한 죄인을 그 법정에 세운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재판 과정을 성령이 진행할 것인데 물론 신자의 내면, 특별히 영혼의 영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성령이 죄인더러 어린 양의 보혈의 은혜를 철두철미 깨달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 죄에 대하여

재판의 첫 절차는 검사가 죄목(罪目)을 낭독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 죄목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을 핍박할 유대인들도 창조주 유일신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고 심지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 그분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여겼지 않습니까?

하나님 믿은 것으로 구원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격, 조건, 선행, 제물, 공적, 종교는 물론 심지어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에 결코 합격할 수 없습니다. 죄로 따지면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당장 모두 죽여도 인간에겐 한 마디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된 까닭은 인간이 하나님을 제치고 세상의 주인 노릇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고의로 배역하고 그 영혼이 완전히 타락하였기에 그분의 의를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비참한 처지에 빠진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그분과 화평케 해주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엡2:9)되는데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의 법정에서 선언될 죄목은 윤리적 종교적 죄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빛으로 왔으되 어둠을 더 사랑하여 그분을 배척한 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의에 대하여

먼저 죄목이 설명된 후에는 그 죄를 심판할 관련 법규를 찾아 적용해야 합니다. 구원의 법정에선 당연히 하나님의 의가 그 기준이 되며 또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당장에 사형감입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모두가 빵점입니다. 법률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용되어져 사형이 선포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천국 법정에서 적용하여 형량을 선고한 규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10절)이 바로 그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하니까 제자들의 사정을 봐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 대신에 영적으로 교제하라는 뜻으로 성령을 보낸다는 뜻도 아닙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순전히 가정으로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만 끝났으면 인류의 죄에 대한 죄 값은 치러진 셈입니다.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은 이행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인간도 그분과 함께 죽던지, 최소한 벌만 면제받은 것뿐이지 거기서 더 나아간 조치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서 새 생명을 주시는 사랑이 베풀어져야만 했고 그러려면 예수님은 반드시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신 것은 죽음과 부활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기에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가 원래의 하나님 독생자의 자리에 복귀한 것입니다. 제자들로선 당연히 그분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아담의 타락 이후로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인간을 보고 죽 품고 계셨던 하나님의 크나큰 안타까움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천국 보좌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구원사역이 완성되었음으로 인해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5:9,10 & 7:10)

구원 재판에 실제로 적용된 규정은 성부 하나님의 공의 대신에 성자 하나님의 의 즉,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죄에는 공의가, 죄인에게는 사랑이 적용된 것입니다. 죄 값은 당신의 죽음이 치렀습니다. 죄인은 당신의 부활로 온전한 모습으로, 단순히 목숨만 부지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되살려주셨습니다. 이 어린 양의 대속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의 의가 덧입혀집니다.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들이 도리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만족하게 적용되는 완벽한 재판이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 믿음의 고백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즉, 천국 법정에서 공의와 사랑의 재판을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3-5)  

- 심판에 대하여  

구원의 법정에 섰던 죽어 마땅한 죄인이 사면 받았습니다. 비록 죄가 심판 받았지만 무형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인격체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재판은 벌 받은 인간 하나 없이 즉, 아무 실질적 결과 없이 끝난 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 받았음이니라”(11절)고 선언합니다. 죄인 대신에 실제적인 심판을 받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 임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빌라도 로마총독이나, 헤롯 유대 왕이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나, 대제사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단입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1) 하늘에서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후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 사단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법정에선 피고였던 죄인 인간은 사면 받고 대신에 그 자리에 사단을 세워 심판하신 셈입니다. 인간으로 하나님을 배역하고 죄에 빠지게 만든 원흉이 바로 사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인간을 꼼짝 없이 죄의 노예로 묶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까지 이끌어 온 사단은 계속 자기가 세상을 죄악으로 마음껏 지배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으로 그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사단은 무참히 패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엡2:3)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6:12)였던 사단의 멍에 아래 신음하던 인간을 당신의 보혈로 그 멍에를 끊고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에 사단은 최후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는 사단은 불신자들로 어떻게 하든 예수를 믿지 못하게 모든 수단과 노력을 강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4:4), 즉 거짓으로 미혹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죄악으로 제 멋대로 농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불신 세상은 여전히 자기 수하의 노예로 둘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신자가 성령과 함께 하여서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앞에 비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주위의 불쌍한 미혹된 영혼을 위해서 사단과 당당히 맞설 수 있기 때문에 인류의 실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해 흑암에 갇힌 자들을 영원한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진리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씀을 간단히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시어 담당하실 천국의 구원 법정에선 당신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어린양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당신의 십자가 의를 적용해서 영생의 선물을 선고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십자가에서 이미 심판을 받아 모든 권세를 빼앗길 것입니다. 단지 당신이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할 때까지 수족이 완전히 절단된 상태로 한시적으로 공중 권세만 잡도록 놓아두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바로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전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정경으로 완성된 성경기록을 갖고서 몇 번씩 읽어봐도 그 뜻을 잘 모르는데 당시 제자들은 당연히 제대로 알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곧 스승과 헤어질 사실에 걱정만 앞선 상태에선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합니다. 바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책망에 관한 진리입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다 줄 은혜를 말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는 자는 성령의 지혜로 그 은혜의 의미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 성령으로 구원 받은 자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음을 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아무 소망 없는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선택 받은 민족으로 거룩한 율법을 받아 그런대로 잘 준행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마저 그러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사상적으로 심오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하나님의 의에는 절대 미칠 수 없습니다. 만물 가운데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지라 예수를 모르는 자연인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더럽고 추한 죄악뿐입니다. 그 영혼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지 않는 한에는 사단의 권세에 묶여서 죄와 사망의 노예로서 헛되고 헛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세상에서 의인이라 칭송 받는 자들의 선행도 따지고 보면 온전한 선이 아닙니다. 자기 자랑이나 욕심에서 나올 뿐입니다. 온전히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며 그것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과 화해된 자를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날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키 위한 목적으로 장차 당신 대신에 오실 진리의 성령이 하시는 역할을 설명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그것도 동족으로부터 죽음에 넘기움을 당할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떠나지 않고 위로와 지도를 해줄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안심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알아 구원에 이르게만 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로 그 진리를 확신하게 만들어 얼마든지 핍박을 이겨낼 수 있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진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끊임없이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신자는, 그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할 줄 아는 신자는, 핍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담대하게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핍박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그런 핍박을 당한다고 합니다. 16장 바로 앞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15:26,27)

놀랍게도 순교(Martyrdom)라는 영어 단어가 증거한다(Martyr)는 헬라어 단어에서 유래한 것인 줄 아십니까? 초대 교회 당시는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면 거의 순교를 당했고 또 신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증거했던 까닭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시점에선 예수님의 뜻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로는 자기 생명마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십자가 군병으로 변모되었던 것입니다.

또 신자들의 그런 모습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과 은혜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가운데 염병처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서 번져나갈 수 있었고 당시 우상이 지배하던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온갖 비방과 핍박 가운데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지 않습니까?(행6:15) 그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성경이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

진리의 영인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을 보았고 또 그분의 의에 기준하여 세상이 그분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사단이 그런 군중을 충동하여 스데반에 대해 이를 갈게 만들어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판 받은 것은 사단이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처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천국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신자들이 초자연적 은사나 이적이라는 일부 제한된 측면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낳은 결과일 뿐입니다. 성령의 근본 역할은 지금 예수님의 설명대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세상에 비추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성령의 간섭으로만이 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으며, 성령에 내주에 의해서만이 구원 받은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은 소원을 심어 주시며, 성령의 충만한 인도만이 신자로 그분의 일에 평생을 걸고 헌신코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궁극적 역할은 세상이 어떤 핍박을 가해도,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아도 신자가 사도들처럼 오히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행5:41) 세상을 책망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권능은 세상이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세상이 도무지 감당 못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진리는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이미 세상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3/11/2010  

김순희

2010.03.13 05:02:05
*.160.176.34

죄에 대하여라 함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신자가 과연 있겠는지, 너무도 공공연히 믿고 있고 그 믿음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요즘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저도 십자가의 사랑을 너무도 쉽게만 이해하지 않는지 뒤돌아 보게 됩니다. 과연 십자가가 머리로서만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지 아니면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를 몸서리치면서 깨달은 후 십자가의 그 사랑이 나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신의 괜찮음이 의라는 착각에 빠지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 괜찮음이 부어주신 예수님의 의라고 우기고 고집하면서 말입니다. 그 깨달음이 없었을 때의 생각들 말들 행동들은 생각하기 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지경인 것을요 그래서 주님의 옷으로 덮어주십사고 예수님 품으로 매일 매 순간 달려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임을 죄금 깨달았습니다.

심판에 대하여... 저는 저의 내부 속에 숨쉬고 있는 세상의 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추구하는 세상의 그 무엇을 심판하심을 말씀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오늘 다시 배우고 갑니다.

세세하신 설명에 다시한번 감사 드립니다.

사라의 웃음

2013.04.03 22:20:50
*.109.85.156

하나님을 잘 믿는 교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교회...이런 말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었습니다. 믿음은 좋은데 복음은 모른다는..그런 말도요.

예수님의 보혈로서 죄를 도말하시었고 예수님의 보혈로서 죄인을 건져주셨고 예수님의 보혈로서 사단을 심판하신 십자가 사건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말씀으로 가르침 받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날로 날로 더더욱 깨달아 알아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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