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최근 거의 모든 이의 인생살이가 마치 홍수가 범람하는 것 같을 것입니다. 일본 쓰나미의 참혹한 실황을 TV 화면으로 보면서 언제든 바로 나에게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과학문명은 눈알이 팽팽 돌 정도로 눈부시게 발전해 생활의 편리함을 더하건만 체감하는 삶은 고난만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신실한 신자들에게마저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나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는 담대한 고백이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 기도할찌라”고 했으니 어떤 힘든 일이라도 주께 기도하면 홍수를 미리 막아주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신자라고 쓰나미가 비켜가지는 않습니다. 또 쓰나미의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건져주실 수도 있지만 함께 휩쓸려 죽는 신자가 훨씬 많습니다. .
실제로 다윗의 생애를 살펴도 욥 이상으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골리앗을 이겼을 때 잠시 안락을 누렸지만 그 이후로는 시련이 그친 적이 없습니다.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왕정 말년에도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많은 백성을 온역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밤새웠다는 그의 시편 고백은 구구절절 진심이 듬뿍 묻어나온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본문이 말하는 기도가 현실의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이로 인하여”로 시작하고 있으니 반드시 바로 앞 절을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이르리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5절)
허물과 죄를 전부 주님께 자복하고 회개한 후에 그런 담대한 고백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럼 몇 가지 가능성을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니까 현실적 고난도 해결이 되었거나, 고난 중에 있어도 주께서 구원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거나, 홍수가 그 동안의 영적인 침체를 뜻하며 그것에서 이제 벗어났다는 것 등입니다. 어찌 되었든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가장 먼저 주력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시편을 어떻게 시작합니까?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1-4절) .
반면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종일 신음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뼈가 쇠할 정도로 신음하는 일말입니다. 현실의 고난, 아니면 다른 이에게 받은 상처로 자존심에 금이 간 경우 둘 뿐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 때문에 뼈가 쇠할 정도는커녕 종일 신음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다 정말 큰 죄를 지었을 때나 조금 반성하고 치웁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고치려 하지도 않고 단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으면 장래의 복을 못 받을 것 같아서 형식적, 종교적 예우 차원(?)에서 그럽니다.
다윗은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갑니다. 토설치 아니해서 종일 신음하게 된 것이 자신의 우 월한 도덕성, 종교성, 영성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성령이 그더러 지금 현재 영적으로 얼마나 궁핍하고 비참한지 깨달으라고 경고를 주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허물과 죄에 대해 자꾸 부끄럽고 두려워지는 것이 자신의 선한 심성 때문이 아니라 자기 영혼 속에 좌정하신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는 여전히 허물과 죄에 점철된 삶을 살고 있고 또 스스로는 회개할 마음이 전혀 혹은 거의 없었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심령에 눌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에서 기쁘고 신나는 일이 생겨도 그리 즐겁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형통할수록 도리어 허망함과 갈급함이 더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회개케 했다고 해서 다윗이 세상 쾌락과 죄악에 푹 빠져 하나님은 전혀 바라보지도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무리 허물과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채널만은 항상 열어놓았다는 뜻입니다. 생생히 살아있는 죄의 본성에 져서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붙드는 손은 결코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인해 종일 신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부단한 교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최소한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민감해 있었던 것입니다. .
다윗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그 증거로 흔히 그가 행했던 여러 하나님의 일들을 듭니다. 할례 없는 골리앗이 여호와의 백성을 모욕하자 어린 몸으로 목숨을 사리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가 승리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드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어도 기름 부은 자라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긴 언약궤를 되찾고선 그 앞에서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사방의 대적을 다 물리치고 왕국의 기초를 든든히 했습니다. 여호와가 거하실 성전을 지으려고 모든 준비를 다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라고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첫째 조건으로 순종을 듭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절) 다윗 왕가와 영원한 언약을 맺고 다윗 개인도 예수님의 선조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윗 본인도 예수님의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라 해도 누구나 인정하는 형편없는 악인을 메시아의 선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요컨대 다윗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묻어져 나오거나, 그의 인생 가운데 십자가 사역을 암시하는 일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본문인데 십자가 복음을 함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는 것을 가장 큰 복이라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자기 죄를 토설치 않는 것이 뼈가 쇠할 정도로 괴로웠다고 고백했으니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진정으로 주께 회개하고 나아갈 때에 비로소 홍수가 범람해도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직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했지 않습니까?
다른 말로 그도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던"(요8:56) 것입니다. "주께 자기 죄를 아뢰고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자기 죄의 사함을 받았기에 여호와를 기뻐했습니다. 또 그래서 그분께 순종할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께서도 그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환난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에우셨던 것입니다.(7,8절) 죄 사함을 받아 그분과 관계를 바로 잡은 신자만이 홍수로 휩쓸려갈 것 같은 어떤 현실적 고난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로 인하여서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고 합니다. 교회에 가서 경건한 절차에 따라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거나,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골방에서 큐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래야만 하지만,. 본문의 "기회를 타서"의 뜻은 언제든 허물과 죄가 생각날 때마다 즉시 주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함과 가리움을 바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를 만날 기회" 중에서 가장 좋은 기회가 언제입니까? 진정한 회개만 하면 주님은 곧바로 만나주십니다. 전혀 지체하지 않습니다. 보너스로 홍수에서 건짐까지 주신다고 합니다. 어떤 신령한 음성을 들어야 하고, 환상이 보여야 하고, 최소한 현실에서 신기하고 형통하는 징조가 보여야만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이 이미 우리 속에 와계시고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데 따로 밖에서 꼭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고 그 음성을 들으려 하니 말입니다.
다윗은 주의 손이 자기를, 그것도 주야로 누른다고 했습니다. 거기다 허물과 죄 중에는 더 그러하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죄를 열심히 범하고 있으면서도 의식하든 못하든 실제로 주님만은 주야로 만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그분과 주야로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동행하는 성령님께 항상 영혼의 문을 열어 놓았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무릇 경건한 자로서, 도덕성이 특별히 뛰어난 자가 아니라 성령이 내주했기에, 그분을 따로 만나고 보고 들으려 할 이유나 근거가 전혀 없었습니다. 허물과 죄를 토설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무릇 저부터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저의 지난 허물과 죄를 회개하자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구태여 따로 만나려고 애쓴 것부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늦으면 그분이 나를 외면하시는지 의심 불평했던 것 말입니다. 하나님은 따로 만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 간단한 진리조차 잊었거나 모르고 있었다는 점도 함께 말입니다. 그분과 교제 동행하는 관계를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려 노력하기보다는 자꾸만 나만 따로 만나달라고 아우성친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습니다.
더 중요한 회개는 따로 있습니다. 현실의 고통과 내 자존심 상한 것만으로 종일 신음한 적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반면에 허물과 죄로 인해 종일 뼈가 쇠할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해도, 현실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만큼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고도 도덕적 종교적 형식은 많이 갖추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려니 착각하고 있었던 사실도 말입니다. 또 그랬으니 하나님을 잘 만나고 있다고 착각한 것도 함께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시는 순간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일 년에 한차례 대속죄일에만 모든 죄를 온전히 사할 수 있는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런 제한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신약신자는 허물과 죄를 토설만하면 내주하시는 그분 영원한 대제사장이 곧바로 사해주십니다.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인해 주님을 진정으로 기뻐하기에 생각나는 대로 죄를 회개하면 됩니다. 꼭 하나님의 큰일을 하려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만 당신의 일을 시키고 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요컨대 주의 손이 주야로 자기 심령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만큼 복 받은 신자는 없습니다. 쓰나미에서 구원 받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말입니다.
4/17/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