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하듯 사랑하라.
(조급증도 큰 죄다. 시리즈 5)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4:10,11)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급함은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게 한다. 사랑의 본질이 끝까지 참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의지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기는커녕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참아내는 것도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고 해도 여전히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다. 결단하고 실행하는 것은 연약한 우리 자신이지 성령이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런 온전한 사랑을 평생 못해보고 끝날 수 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단 한명을, 배우자든 자녀든 간에, 대상으로 해서도 말이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성경은 아예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런 권면이 단지 종교적 구호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표를 아예 최대치로 잡아 노력하다 보면 그 성과도 비례해서 좋아질 것이라든지, 혹은 그런 구호를 반복하면 어쨌든 동기부여는 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것이 아니다. 주님은 새 계명으로 반복해서 권한다, 아니 명령한다. 그럼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이 어지간한 정도라야지, 정말 당신 말씀에서 일점일획도 빠지지 않고 일흔 번씩 일곱 번 그대로 용서하신 분이다. 아니 우리 지은 죄가 고작 그뿐이랴. 도무지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는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시어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 지을 죄까지 미리 다 용서 받았다.
그것도 당신께서 우리 모든 죄의 형벌과 그에 따르는 고통과 수치까지 다 감당하시고 말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 대신에 골고다 언덕에서 나무에 달리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그럼 우리도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사랑해야 한다. 나에게 잘못을 범한 원수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본문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마땅하다는 의미는 간단히 비유컨대 누군가 도움을 주면 고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라면 최소한으로 꼭 행해야 할 바다. 그마저 못하거나 안하면 아예 인간 취급도 못 받는다는 것이 그 정의(定意)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신자가 필수적으로 행할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상대에게만 희생과 수고로 끝낼 것이 아니다. 성도들끼리 그렇게 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또 관계를 맺는 모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그래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 처해도 누구에게나 그런 사랑을 해야 한다.
원래 사랑에는 차등이 있으면 안 된다. 동일한 한 사람이 베푸는 사랑에 어떤 이유나 상황이 되었든 우열이 생기면 이미 참 사랑이 아니다. 최고 정성을 들인 사랑과 그렇지 못한 사랑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랑은 아닌 것이다. 참 사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끝까지 참는 것”이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두 계명이라고 하셨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이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지 여부다. 죽기까지 그런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미리 체념하고 말 것인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의지, 경비, 노력, 시간을 들여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 그것으로 그만인가? 정말로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주님이 베푸신 사랑의 본질
주님이 우리에게 했듯이 서로 사랑해야 하고, 또 주께 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질과 양적으로 최고 최선의 사랑만 하려 든다. 그렇게 해선 금방 지쳐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직 신자다운 사랑을 못한 것처럼 여겨져 죄책감 내지 아쉬움만 늘어난다. 우리가 어떻게 내 목숨을 쉽게 내어놓을 수 있겠는가? 홈리스가 동전 하나 달라고 해도 지갑을 움켜쥐기 바쁜 우리로선 너무 요원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좀 더 고급화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만큼 큰 착각이 없다. 구원에서부터 천국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절대적으로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그런대로 괜찮거나 최선의 방도가 되는 법은 절대 없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분을 자신의 온전한 구주로 모시는 길 외에 구원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이웃을 사랑하되 단순히 남들보다 더 사랑해선 안 된다. 세상이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사랑을 해야 한다. 목숨을 바치는 사랑도 단지 질과 양으로 따져서 최고 사랑을 하겠다는 의도였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사랑이 나쁘거나 해선 안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신앙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마지막까지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한 것은 질적 양적으로 최고 최선의 사랑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역사상 지금껏 전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랑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할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이었다.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최고 최선의 사랑이 된 것이다. 우리도 주님 닮은 사랑을 하려면 세상과 전혀 다른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해야 한다.
세상에도 자기 목숨을 바치며 사랑하는 의인은 있다. 최근에 모든 지위와 재산을 다 내려놓고 빈민촌에 들어가 봉사하는 의사에 관한 신문기사를 보았다. 오래 전에 일본의 지하철에서 생판 모르는 일본인을 구하고 대신 깔려 죽은 한국 유학생도 있었지 않는가? 사랑을 질과 양으로만 따진다면 불신자들에게도 최고의 사랑은 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의인과 선인을 위해서 죽는 이는 드물긴 해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그것도 죄인이 전혀 회개할 마음이 없는데도 그를 위해 죽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켰다고 한다. 한 죄인의 죄를 씻겨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사랑이다. 단순히 어렵고 힘든 자를 현실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사랑이었다.
신자가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해주듯이 이웃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은 세상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았다. 다른 이에게도 그런 사랑을 전해주고 알게 해주어야 한다. 현실적 도움을 등한시 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열심히 행하되 반드시 죄를 씻고 하나님을 알게 만드는데 유용한 도움이어야 한다.
사실은 예수님도 그랬다. 모든 이들을 다 사랑으로 돌봐주지는 않았다. 때로는 현실적 도움만 바라는 이들을 오히려 멀리 하셨다. 거기다 치유나 용서를 베푸시곤 다시는 죄를 짓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목적으로만 모든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신자의 사랑도 주님의 바로 이런 사랑과 닮을 때에만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달라진다.
신자가 받은 직책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죽었으니 신자라면 구원 이후에는 마땅히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단지 그 크신 사랑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죽으신 것도 무한한 사랑이요, 구원 이후에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도 그분의 동일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신자를 아주 강하게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다 어떤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의미도 있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 귀하고 좋아서 주위에 증거하고 또 나눠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자 축복이라는 것이다. 또 바로 그래서 신자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겼다고 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19)
신자의 이웃 사랑의 초점은 그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나하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죄에서 돌이키는 복음으로써 그들을 우리처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게 해야 한다.
또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는 화목의 직책을 맡았기에 구원 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려면 그 직분을 잘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그 전에 주목해야 할 구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16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절)
흔히들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산다고 하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세상에서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빛과 소금으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라는 것이다. 주님의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쳐서 희생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신자가 자동적으로 아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머리에 그려낸다.
정작 성경은 그 삶을 아주 단순하고도 명료한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너무 간단하다보니 싱겁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16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14,15절에서 말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부연 설명하겠다는 뜻이다.
무엇인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어떤 경비와 시간이 들더라도 감내하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안을 말하는데 단지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않으면 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은?
지금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육체대로 알았더라면 전혀 사랑하지 않았을, 아니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그분의 사랑을 받을만한 건더기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을 육체대로만 알았었다. 도무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사53;2) 그래서 멸시와 간고와 질고만 그에게 몽땅 쏟아 부었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이젠 육체대로 하자면 우리는 백 번 죽어 마땅했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의 그 죄악조차 육체대로 보지 않으셨다. 다른 말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었던 시발점은 육체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 또한 이제부턴 사람을 육제대로 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전에는 사람은 물론 그리스도도 그렇게 봤다. 신자가 된 후에 가장 바뀐 사항이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된 후에 맡아야 할 화목의 직분이나, 신자가 된 후에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가는 방식의 근본 바탕이 바로 육체대로 보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
앞선 글들에서 사랑의 본질은 관심이라고 했다. 또 온전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끝까지 참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런 사랑을 이룰 수 있으려면 가장 먼저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가장 기본적인 뜻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거룩해진 것이 아니다. 불신자보다 수십 배의 사랑을 쉽게 할 수 있게끔 하루아침에 변한 것도 아니다. 단지 육체대로 하자면 자기야말로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자격조차 없었음에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보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함을 입게 된 것이다. 그분의 육체대로 보지 않는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분의 그런 사랑 가운데 계속 강하게 붙들려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인 것이 부모가 자식을 육체대로만 따져서 상벌을 준다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나아가 참 부모라고 말할 수도 없다. 참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심한 핸디캡으로 태어났어도 끝까지 사랑하는 법이다. 믿은 후의 신자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주위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지으신 소중한 존재로 각 자에게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으니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직책을 맡은 성도는 더더욱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귀한 존재이므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반면에 본문은 그와 다른, 정확하게는 반대되는 측면을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사랑할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상대에게서 사랑할만한 부분을 찾아내어서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모두가 죄인인지라 그럴만한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또 지금까지 사랑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을 제고(提高)하라고 배웠다. 본문은 우리에겐 그럴 능력은 없고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옴을 제대로 알라고 한다.
따라서 온전한 사랑을 하려면 다른 이를 하나님 안에서 소중한 존재라고 여기기 이전에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선 도무지 육체대로 설 수 없다는 사실부터 철저하고도 확실히 직시(直視)해야 한다. 우선 자기에 대해서부터 그래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없으면 단 한시도 살 수 없는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나에게서부터 가장 먼저, 가장 많이 필요하다고 절감해야 한다. 또 그래야만 다른 모든 이들도 육체대로만 보지 않게 된다.
흔히들 점수로 치면 자기가 최고로 낮기 때문에 감히 남들을 자기와 견주어서 멸시할 수 없다고 여긴다. 물론 아주 좋은 신앙의 자세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다른 이들 모두가 너무나 불쌍한 존재임을 실감해야 한다. 그들 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우열이 나눠져 더 좋고 더 싫은 점이 드러난다면 자기도 모르게 육체대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아무래도 더 좋은 자를 더 좋게 여기게 된다는 뜻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모든 이가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고 구원 후에도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확신이 없다면 결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을 사랑하려면 가장 먼저 육체대로 보지 않아야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육체대로 보기 시작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세상에서 의인이 되거나 덜한 죄인이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약한 이의 현실적으로 부족한 부분만 채워주는 비기독교적 사랑으로 변질될 뿐이다.
성도의 사랑은?
이런 맥락에서 조급증의 의미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육체대로 본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조급증의 핵심이다. 각자의 외모, 건강, 신체, 가문, 학벌, 재정, 권세, 지성 등 겉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급급해지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에 따라 속으로 점수를 매기게 마련이다. 또 그에 따라 사랑과 섬김의 세기가 정해진다. 사랑할만한 자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할 만한 자만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랑이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과 행동에 따라 이뤄진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선 어리석고 연약하며 죄에 여전히 찌들은 인간으로선, 어지간히 믿음이 좋아도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어떤 모습이든 사랑 가운데도 죄는 묻어 나온다는 것이다. 죄인끼리 어떻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스스로를 채찍질 하여서 의지적으로 참 사랑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실행해도, 상대를 육체대로 보는 순간 곧바로 죄에 물든 하자 있는 사랑으로 바뀐다.
육체대로 보지 않기 위해 맹목적으로 무조건 사랑하라는 뜻은 아니다. 자칫 의무적 형식적 사랑으로 흐르게 된다. 상대의 인간적 장단점을 보기 이전에 상대도 나도 동일한 죄인이라는 확신을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를 만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이 지금 나와 똑 같은 죄인인 상대를 대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죽기까지 변함없는 이 인식의 바탕에서 상대를 섬기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비록 나에게 상대를 사랑할 소망은 있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는 인식이다. 또 그러면 필연적으로 자기부터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한 시도 견디지 못하기에 가장 먼저 주님의 사랑부터 받기를 열망하게 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음을 알게 된다.
예컨대 남편이나 아내도 육체대로 보자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갈라서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배우자 또한 주님의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하는 나와 똑 같은 불쌍한 존재임을 확신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 배우자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잘해주는 것 이전에 그 스스로 주님의 사랑부터 알고 받아 누려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내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듯이 배우자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중간에 주님의 십자가를 매개체로 하여서 부부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화평이 되어서 둘 사이의 벽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부부를 각자의 사랑이 아닌 주님만의 놀랍고도 신비하고도 풍성한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게 된다.
조금 쉽게 접근해보자. 세상 사람의 사랑도 실은 안타깝고 불쌍한데서 출발한다. 그런 긍휼한 마음이 없으면 사랑을 하지 못한다. 단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을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돈과 건강 등에 부족해 쩔쩔 매는 자를 도와준다. 비록 인격적 감정적으로 상처 받은 것까지도 보상하고 사랑해주지만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또한 인간의 지정의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차원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라는 차원은, 그것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연관 지어선 전혀 생각할 줄 모른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는 다르다. 모든 인간에게는 현실적 고난을 없애거나 감하는 것 이전에 그 영혼의 피폐함을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채워주는 일이 가장 절실하고 시급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만 이뤄짐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사고, 말, 행동을 통해서 주님의 긍휼이 그들에게 미치도록 소원하는 것이다. 도와주고 사랑하러 나서기 전에 간절히 주님께 그런 사랑을 자신을 통해 베풀어달라고 기도부터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랑하고자 소망이 신자에게 있다면, 하늘의 영적 차원에서 땅으로 쏟아부어주는 참 사랑이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무엇보다도 주님만의 방식과 때로 신비하게 그 상대에게 실현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 결혼할 것인가?
최근 TV 프로에 보면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나 남편과 다시 결혼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 유행인 것 같다. 부부간에 진짜 온전한 사랑을 하는지 확인하려는 뜻이다. 신자에게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그들의 윤회(輪回) 사상을 옳다고 여겨선 안 된다는 종교적 이유만이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이 땅에 묶여 있다. 다른 말로 모든 이를 육체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났을 때에도 지금 배우자의 육체대로의 상황이 다시 결혼하고 싶은 조건에 합당한지 묻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는 지금의 배우자와 천국에까지 동행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정말로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 안에서 함께 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육체대로 하자면 서로 온갖 하자가 많지만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그런 것들이 아무런 허물이 되지 않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주님이 그랬듯이 오히려 그 허물 때문에 더 사랑, 최소한 더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한다.
나아가 천국에 가서도 끝까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천국 가기 전인 지금부터도 상대를 육체대로 보지 않아야 한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천국 가선 후회와 미련 밖에 남지 않을 것 아닌가? 이 땅에서부터 죄인 된 신분으로서 같은 죄인을 서로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느냐 여부다. 신자니까 불신자보다 더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가 갖지 못하는 주님의 긍휼로만 항상 상대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遺業)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후3:7)
베드로 사도는 남편은 아내를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한다. “지식”은 어떤 사본에는 “말씀”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아내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식은 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자는 연약한 그릇이니까 더욱 사랑해야 함도 아주 지당하다. 그런데 사도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귀히 여기라고 했다. 단순히 아내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분의 사랑받는 존재이니까 마땅히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함께 갈 자로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씀이 흥미롭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단순한 뜻을 넘어선다. 아내는 물론 주위 성도들을 천국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로, 나아가 불신자들에게는 그 유업을 소개하고 초청할 자라는 바탕에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런 근본적 인식 없이 기도를 하면 막히어 하나님께 상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는 주를 위해서 살되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또 그런 바탕에서 모든 기도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사람을 육체대로 알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들의 보이지 않는 면을 보아야 한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그것도 끝까지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사랑할 수 있는 부분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감정적으로는 싫고 미울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측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반드시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래야만 비로소 실제적인 섬김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전에 나도 아주 불쌍한 죄인이고 너도 너무나 안타까운 죄인이라는 인식 아래 상대를 보아야 한다. 단순히 호기심과 흥미를 갖는 관심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닮은 긍휼이 바탕이 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전자의 관심은 이해하는 수준에만 머물 수가 많지만, 후자의 관심은 반드시 주님의 사랑에까지 연결되는 것이 다른 것이다.
신자의 사랑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듯이 다른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최고로 좋아지고 또 그래서 그저 모든 것을 베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을 하려면 정말로 못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아예 불가능하다.
비유컨대 모두를 핸디캡이나. 갓 태어난 아이로 대하는 것이다. 상대가 어떤 짓을 해도 두고 봐줄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 상대를 두고 자기감정을 건드렸다고, 제대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혹은 받은 은혜를 보상하지도 않는다고 화를 낸다면 그런 자가 바로 핸디캡이요 갓난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핸디캡을 보면 누구나 불쌍하고 안쓰러워 저절로 도와주고 싶지 않은가? 신자의 사랑이 질과 양으로 최고가 아니라 바로 그런 차원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어떠할 때에 사랑했으며 또 어떤 상태임에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는가? 그 답은 자명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분에게 갓난 애, 핸디캡, 그것도 나쁜 짓만 일삼아 단 한시도 골치 썩지 않는 일이 없는 그런 망나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너무나 불쌍히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신자의 사랑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아니 그렇지 않고는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조급증은 외모만 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죄인가 말이다.
1/24/2011
이런 망나니를 사랑하여 주시기에 넘, 넘 감사하고 넘, 넘 송구스러워요.
근데... 이 조급증이며 또 그냥 드러누워버리는 게으름증이며...등등
정말로 너무 어려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