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 신학교수 (마6:16-18)

조회 수 2142 추천 수 96 2003.12.02 08:50:59
마태복음 강해 (86) 11/30/2003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 신학교수

저는 예배가 있기 전 주일날 아침이나 금요일 저녁 식사는 가능한 적게 하거나 안 한다. 밥을 많이 먹어 피가 위장으로 몰리면 아무 생각이 안 나기 때문이다. 수험생들이 밤 늦게 공부하느라 수고한다고 간식을 자꾸 갖다 주면 이제 공부 그만 하고 자라는 말과 같다. 머리가 맑아지려면 굶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독교의 금식은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반드시 수반되므로 위장병 같은 지병을 음식으로 조절하거나 저나 수험생처럼 정신이 맑아지려고 하는 절식과 다르다. 금식만을 위한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기 위해 금식한다. 그러나  기도 잘하기 위해 밥을 굶는 것만으로는 금식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세상의 잡다한 생각에 방해 받지 않으려면 예수님처럼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면 되지만 새벽 기도가 금식기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또 다니엘이 힛데갈 강가에서 세 이레를 금식 기도한 것처럼 최소 며칠 이상 금식해야 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 한 끼만 굶어도 금식이지만 기도를 하되 반드시 금식 고유의 목적과 의미를 지닌 채 기도의 내용과 기도자의 태도가 평소 때의 기도와 달라야 한다.    

지금 한국의 야당 대표가 특검법 관철을 위해 며칠 째 단식으로 투쟁하는 것과도 금식은 다르다. 불신자들이 사회적, 정치적인 목표를 달성하려는 효과적 수단으로 단식하듯이 신자가 어떤 특정 기도 제목을 빨리 꼭 응답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 금식이 아니다. 간혹 신자들이 오랫동안 기도 응답이 안 된 골치 아픈 문제나 긴급하게 아주 큰 일이 벌어졌을 때 금식 기도하면 해결 된다고 말한다. 금식 기도 자체를 모든 수단 방법을 다 써보다 안 되면 끄집어내는 숨겨놓은 카드(Hidden Card)처럼 하나님에게 어필(Appeal)하는 최후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 시력의 20%밖에 갖지 못한 시력장애자 그레이그 새터리란 분이 그 장애를 이겨내고 시카고의 한 신학교 교수까지 되었다. 그는  “나는 기도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히11:6)믿는 그 믿음이 응답의 근거이지 금식을 얼마나 오래 성실히 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응답이 달라지지 않는다.  

즉으면 죽으리라

모든 기도가 믿음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도 금식 기도가 평소의 기도와 내용과 태도에서 달라야 한다면 금식하는 목적과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성경에 금식기도를 설명하는 아주 좋은 예가 있다.

바빌론 포로로 잡혀 갔던 유대인들이 페르샤 제국으로 바뀐 후에도 그곳에 남아 살고 있었는데 아하수에로 왕이 모든 백성은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하만에게 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유대인 모르드개만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무릎 꿇을 수 없다고 거절했고 그러자 하만이 왕에게 간청하여 왕의 법도를 무시한 유대인들 모두를 한 날을 택해 몰살시키도록 허가를 받아 왕의 조서까지 내렸다. 꼼짝 없이 유대 민족이 전부 죽게 되었다. 모르드개는 자기의 조카이자 유대인으로 왕비인 에스더에게 네가 왕비가 된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인 즉 왕에게 나아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 민족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라고 요청했다.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에4:15,16) 에스더는 유대인들 모두 3일 밤낮으로 금식 기도하면 모르드개가 요구한 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대로 하겠다고 하면 그만인데  끝에 “죽으면 죽으리라” 는 말을 더 부쳤다.

이 말은 에스더가 비장하게 결심하고 담대히 용기를 갖고자 다짐하는 말이 아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의 역설적인 반어법 표현도 아니다.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에4:11)이다. 사전 면담 약속 없이 무턱대고 왕에게 나아가면 사형이며 왕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전임 왕비 와스디는 반대로 왕이 잔치에 불렀는데도 나아가지 않아 폐위 당했다.

지금 왕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자 나라의 제이인자 격인 하만과 세계 최강 제국의 여러 식민지 백성 중의 보잘것없는 민족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그것도 왕의 명령을 어긴 것 때문에 일어났고 벌을 주라고 조서까지 이미 내려졌다. 왕이 누구를 편들지는 뻔한 일이었고 현실적으로유대 민족이 살아나고 에스더가 왕의 분노를 사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에스더의 그 말은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실제로 생명을 바치겠다는 뜻이다. 죽을 확률이 누가 봐도 훨씬 높았다. 문자 그대로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다는 것이다. 그녀 쪽에서 분석, 판단, 결단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거나 왕을 설득하여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했다.  

그녀는 금식기도를 최후의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동원하여 현재의 상황과 여건을 더 좋게 하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금식하게 된 일차적인 계기는 당장 불똥이 떨어진 자기 민족을 구해내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위치에 이르기 위한 것이었다.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언제든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수용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금식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는 것이다.

진정한 금식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금식 기도는 하나님께 신자가 가진 최고 수준의 열심, 정성, 치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좀 더 고차원적이고 신령한 차원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움직여 우리 목적을 달성해 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갖는 모든 수단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금식이다. 세상이 줄 수 있는 쾌락, 재미, 미련, 능력, 의지, 소망, 목적 그 모든 것을 등 뒤로 던지는 작업이다. 인간이 생각해 적용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상적, 인위적 수단과 방법에서 전부 손을 떼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더러 지금 당장 죽으라고 명령하시거나 그런 사지로 밀어 넣더라도 기꺼이 기쁨과 평강을 안고 죽겠다는 것이다. 내 목적에 하나님을 끼워 맞춰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어떤 일을 겪게 하실지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따르겠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민주화된 시대에도 국회에서 2/3가 찬성한 일을 두고 다수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해도 대통령이 한 번 내린 결정이라고 번복하지 않는데 고대 군주시대의 왕이 자기 명령을 위반해 분명히 잘못한 일을 처벌하고자 이미 내린 조서를 취소할 리가 있겠는가? 왕비라 당장은 왕의 분노를 사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위의 신하들이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다고 벌떼 같이 일어나 “통촉하옵소서” 하면 왕비의 지위와 특권은 박탈 당하고 결국 죽을 수도 있고 유대인들은 당연히 몽땅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신자가 하나님께 금식하면서까지 빌고 있는 그 기도 제목들, 꼭 해결되어야 하는 소원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신자가 현재 겪고 있는 시련, 환난,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더 악화되어 최악의 상황에 빠질지라도 감수할 것이며 나아가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선과 공의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어떤 목적으로 금식을 했는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경건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자 했다. 그들은 삶의 목표를 오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자기의 명예, 자존심, 체면, 위신을 높이는 데만 두었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화장을 해서라도 사람들이 금식하는 것을 모르게 하라고 당부했다. 단지 위선이나 가식을 떨지 말라는 차원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고 세상에서 보상을 구하려고 금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은밀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죽으라고 해도 아멘 하고 기꺼이 죽겠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금식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생명은 처음이자 끝이며 전부다. 죽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목표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않는가? 나아가 어떤 상대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것, 내 생명보다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기가 살고 죽음을 떠나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하고도 온전한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의 생명을 기꺼이 바쳐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기껏 자식 그것도 여러 명 있으면 특별히 정이 더 가는 한 명 정도 아니겠는가? 그럼 그 자식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애정, 헌신, 소망, 희생, 섬김, 열성과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갖고 있는 그것들과 비교해 어느 것이 더 큰가? 자식과 하나님 두 대상 중에 하나만을 위해 죽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만약에 에스더와 같은 고백이 하나님에 대해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수십 끼를 굶고 기도했어도 아직은 진정한 금식을 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금식 기도의 능력

평생에 5만 번의 기도를 해 단 한 번도 응답 받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는 기도의 사람 조지 밀러에 관해선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오스본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 분은 평생에 금식 기도를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한데 미국에서 그의 기도로 125명의 벙어리가 고침을 받았고 90명의 소경이 눈을 떴다. 벙어리와 소경은 현대 의술로도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엄청난 기적이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에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 사전 면접 약속 없이 왕을 알현 했지만 그녀에게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고 왕의 총애를 더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전부도 살았다. 흉계를 꾸몄던 하만이 죽고 오히려 모르드개가 하만의 자리를 차지했다. 권세를 갖고 죽일 자가 죽고 오히려 죽임을 당할 자는 살아나 권세를 갖게 되는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가만히 두었으면 최악이었을 상황이 금식 기도하여 최상의 상태로 바뀌었다.              

이처럼 금식 기도하면 반드시 큰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단지 금식하며 기도 했다고 해서 응답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다른 이유가 있다. “유대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4:3) 기도하며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웠기 때문이다. 금식은 반드시 옷을 찢고 머리에서부터 재를 뒤집어 써야 한다.  

한국에선 부모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굵은 삼베로 만든 누더기 같은 상복을 입는다. 또 옛날에는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아침 저녁으로 성묘하며 공양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는 부모를 잃은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한 것이지만 살아 생전에 제대로 효도 못한 천하의 불효한 자식이었음을 회개하는 의미다. 자기가 죽어도 그 죄를 갚을 수 없음을 세상과 단절하는 모습으로 드러낸다.  

구약 성경에 보면 모든 금식이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뤄졌지만 반드시 옷을 찢고 재를 덮어 썼다. 평소에 기도와 말씀에 게을렀고 율법대로 살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가까이 한 죄를 철저하게 회개했다. 에스더 당시로도 지금으로 치면 미국보다 더 강대국인 페르샤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며 나태했던 신앙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금식이란 신자의 인생의 좌표와 방향이 굽어지고 그 삶의 나침반의 바늘을 기울게 만든 돈, 권력, 명예, 쾌락 같은 모든 세상의 것들의 영향력을 완전히 빼내는 작업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위치와 신분과 소속에서 혹시라도 벗어나고 어긋난 것이 있다면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교만, 어리석음, 나태함, 불평, 불만, 의심, 불신앙, 탐욕 같은 죄의 찌꺼기들이 세상의 악한 것들과 짝하여 오염되고 구부러져 버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어야 한다.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에 의해 흔들렸던 영혼을 거룩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방해가 되는 위선, 가식, 치장, 고집, 독선을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벌거벗은 채로  나아가야 한다. 금식 기도를 한 후에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세상의 티끌이 단 한 치도 끼어 들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복이 신자에게 전해지는 통로를 가로 막는 어떠한 저항과 찌끼도 다 없어졌기 때문에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받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얼마든지 벙어리가 말을 하고 소경이 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금식해야 하는 까닭은?

금식 기도는 나의 간절한 소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쟁취해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기도는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 금식 기도가 긴급한 일을 해결해 내는 911 Emergency Call 도 아니다.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Hot Line이다. 불신자도 정말 큰 일이 생기면 부처님, 조상님 찾지 않고 하나님 찾아 울부짖는다.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성, 열심, 전심을 갖고 진심으로 간구한다.

그럼에도 금식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금식이란 식사만 거른다는 뜻이 아니라 일정 시간을 따로 떼어 내어 세상의 모든 일을 일시 중지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 들어가는 것이다. 차라리 식사를 하더라도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금식의 의미에 더 걸맞다.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기 위해 금식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완전하고도 진정한 회개에 몰두하는 것이 금식이다. 정신이 맑아져 신자가 가진 소원을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깨끗해진 마음으로 내 자신 삶과 인생의 실제 모습을 더 세밀하게 보라는 것이다.

평소 때는 자기 소원만 비는 기도만 하니까 제대로 된 회개를 할 기회가 없다. 그러면 신자의 영육이 자연적으로 점차 세상으로 향하게 되고 멀어지게 된다. 어쩌면 신자에게 일어나는 긴급한 큰 일들은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부쳐 주시는 선물인지도 모른다.

말기 암에 걸린 생판 불신자도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기도하면 종종 낫는 경우가 있다. 기도하는 동안에 갑자기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것도 아니다. 며칠을 금식하며 한 번만 살려달라고 매어 달린 것 뿐이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돈, 권력, 명예, 자존심 등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 아무 의미와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되어 정말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나가게 된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낫게 해주면 앞으로는 세상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진정한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

인간의 정성, 열심, 치성만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와 탐욕과 불신앙을 씻어내고 거룩하고 의로워질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신자에게서 힘을 발휘한다.

신자의 히든 카드

혹시 오랫동안 해결 받지 못한 문제가 있는가? 아주 긴급하고도 위태로운 큰 일이 생겼는가? 금식하고 기도하면 해결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밥만 굶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옷을 찢고 머리에서 발 끝까지 재를 덮어써야 한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서 찢어야 한다. 더 구슬프고 애절하게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마음의 중심의 중심, 정말 최고 밑바닥까지 완전히 까 뒤집어 보아야 한다. 내가 지금 소원하고 있는 일들 중에 혹시라도 내 자존심, 체면, 위신을 살리고 세상의 재미를 찾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싶은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파헤쳐야 한다. 머리 꼭대기에서 발 끝까지 헛되고 헛된 것들로 치장했는지 더럽고 추한 것으로 더렵혀졌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 씻어내어야 한다.

금식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한다. 전화, 테레비, 사람 등 세상과 연결 고리가 되는 모든 것들, 특별히 자식 생각까지 끊어야 한다. 우리를 곁눈질 하도록 만든 세상의 재미와 쾌락 쪽으로 사팔뜨기처럼 된 시선을 되돌릴 수 있도록 사방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차단 막을 쳐야 한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 삼키려는 세상의 환난, 시련, 고통, 시험, 유혹도 침범 못하도록 팔방으로 성령의 방음 벽을 설치해야 한다.    

누구나 기도를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는 그저 울부짖고 메어 달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지금 완전히 죽을 지경입니다. 제 죽는 꼴을 보시려고 이러십니까? 제발 이번 만은 저를 살려 주십시오.” 심지어 의심과 불평을 안고 기도해도 된다. 그러나 얍복강 나루에서 야곱이 씨름 했던 것처럼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축복을 받아낼 때까지는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이라고 해서 더 큰 능력으로 해결되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갖는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주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정말 아무 문제가 아니며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 생각과 예상보다 더 풍성하고 신비한 축복을 이미 다 예비해 놓고 계신다.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축복이란 세상이 줄 수 없는 축복이다. 특별히 다른 것이 아니다. 신자더러 세상과 하나님 중에 어느 쪽이 더 사랑할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다시 확신 시켜 주는 축복이다. 신자가 예수를 처음 만나 믿었던 그 감격과 충만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일상의 삶에서 동행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더 이상 흔들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끔 되는 축복이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하만을 찾아가 한번만 굽실거렸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공개적으로 기도만 하지 않았어도 사자 굴에 던져지지 않았고 또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 절만 한 번 했어도 풀무불 속에 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기 생명까지 포함해 세상의 것들 전부를 포기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 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죽음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직전에 아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당신의 의롭고도 강한 오른 손으로 다 건져올려 주셨다.

불신자들은 사흘 밤낮을 굶으면 남의 집 담장을 넘는다. 이곳 교민 생활은 참으로 힘들고 고달파 가끔 남의 집 담장을 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을 때도 있다. 바로 그 때 신자라면 금식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사흘을 굶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성전의 담을 넘어 세상으로는 절대로 뛰어 나가지 않겠습니다”는 고백이 나온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헌신이 된다. 비로소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해결해 보려 해도 되지 않고 최악의 상태에 빠져있던 메마른 삶과 궁핍한 영혼이 풍성하고 부유하며 기쁨이 넘치는 최상의 것으로 바뀐다.

신자의 히든 카드는 금식이 아니다. 기도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성결하게 되어 거룩해진 우리의 심령과 십자가 약속 위에 굳건히 서 있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주님만 놓치지 않으려는 헌신만이 우리 인생이 사자 굴과 극렬한 풀무 불에 던지워질지라도 건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다.        


Sarah

2009.04.28 14:25:24
*.216.87.235

추천
1
비추천
0
오늘 에스더서를 읽었습니다,
정말로 금식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이 뜻대로 드리는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 “모두 내 탓이오” 운동을 그만 두어라.(마7:1-5) [2] 운영자 2004-01-26 4293
45 공부가 제일 쉬웠다 (마6:31-34) 운영자 2004-01-12 2468
44 허풍쟁이 예수님 (마6:26-30) [2] 운영자 2004-01-05 1911
43 기도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마6:25) [2] 운영자 2004-01-02 3190
42 넷 째 나팔도 이미 불리워졌다. (계8:6-11) [1] 운영자 2003-12-24 1567
41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마6:19-24) 운영자 2003-12-15 2311
40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마6:19-20) [2] 운영자 2003-12-09 1962
»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 신학교수 (마6:16-18) [1] 운영자 2003-12-02 2142
38 바리새인은 위선적이지 않았다(마6:16-18) [2] 운영자 2003-11-25 2234
37 기도 걱정 꾼들(Prayer Worriers) 마(6:13) [1] 운영자 2003-11-10 1618
36 김정일이 예수를 믿었다면?(마6:13) 운영자 2003-11-04 3715
35 욕심을 채우며 살아라 (마6:13) [1] 운영자 2003-10-28 2017
34 용서는 해도 절대 잊지는 못해 (마6:12) [1] 운영자 2003-10-21 2367
33 카터 대통령의 별난 식사 기도 (마6:11) 운영자 2003-10-13 1723
32 천사들을 실컷 부려 먹으라 (마6:10) 운영자 2003-10-06 1537
31 왕의 자리에서 내려 오시오(마6:10) [1] 운영자 2003-09-30 1516
30 정신병원에서 왕 노릇 하는 신자(마6:10) [1] 운영자 2003-09-23 1454
29 자식을 12명 이상 낳아라(골2:16,17) 운영자 2003-09-15 1641
28 자동 응답기를 설치 해 놓으신 하나님(마6:9) [2] 운영자 2003-09-09 1466
27 하나님 제발 힘 좀 내세요! (마6:9) [1] 운영자 2003-09-04 1658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