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사상 최대의 부흥 집회(행2:1-13)

조회 수 2006 추천 수 85 2005.11.15 19: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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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6)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13)

새로운 하나님의 방법

유다로 결원이 된 자리를 제비 뽑기로서 맛디아를 보충한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분명히 있었음을 살펴 보았다. 상당한 장점이 있는 제비 뽑기는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직분을 선출할 때에 많이 채택되고 있고 여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제비 뽑기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해해 그것만 고집해선 안 된다.  

그 이유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비를 뽑고 얼마 안되어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한 본문의 사건 때문이다. 성령 강림은 영적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하고 기독교 교회가 최초로 창립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령 강림 이후로는 성경에서 제비 뽑기 기록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성령 강림 이후의 초대 교회에 관한 기록은 사도 행전이 유일하고 그것도 겨우 30여년의 시기만 다루고 있어 완전히 사라졌는지 여부를 문서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사도 행전과 서신서 어디에도 제비 뽑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기 위해 제비 뽑기를 했지만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물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주셨다는 뜻이다. 제비처럼 꼭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라 내적으로 확인하여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성령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聖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16,17,26).”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와서 당신을 대신해 가르칠 것이라고 했다.

승천하기 직전에도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했고 제자들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셨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성령이 내주하여 평생토록 함께 하는 하나님의 전이 되었고, 또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구하면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신자가 선택하고 의사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럼 성령이 신자더러 어떻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게 해 주는가? 환상이나 예언 같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알게 해주는가? 만약 그렇다면 일부 그런 은사를 받은 자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신자는 평생 가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당연히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은 제비 뽑기는 물론 예언이나 환상이 아닌 방법(간혹 그럴 때도 있지만)에 의하여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고 신자 스스로의 지정의적  판단에 의존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귀신도 쫓을 수 있는 평신도

성령이란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격이다. 말 그대로 성스럽고 거룩한 영(Holy Spirit)이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성령이 신자에게 충만히 임재한 외적 증거로 9가지의 은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의 통변을 열거하고 있다.  

간혹 신자들이 방언, 예언, 축귀(逐鬼), 신유(神癒) 같은 초월적 능력만 성령의 은사인 줄 알아 그런 것만 사모하고 또 그런 은사가 없으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오해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는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 사역을 담당하는 직분자들에게 그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특정한 자질과 능력을 더 보태어 준 것에 해당한다.

비유하자면 군인은 기본적으로 소총이나 수류탄 같은 개인 화기의 사용법은 다 알고 실제 누구라도 휴대하게 한다. 그러나 기관총, 박격포, 전차 같은 특수 무기는 그 역할을 맡은 자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소총과 수류탄은 지급되듯이 모든 신자에게 “성령”(the Holy Spirit)은 와 있고, 특수 병과의 군인들은 특수 무기가 필요하듯이 특정한 직분자들에게 “성령의 은사”(the charisma of the Holy Spirit)를 따로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에게 그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 이상을 이미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 쉬운 예로 그 은사들 가운데 믿음이 들어 있지 않는가? 물론 그 믿음의 은사는 핍박을 끝까지 이겨내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아주 강한 믿음을 뜻한다. 순교자는 소수인 반면에 내적인 믿음은 포기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외적으로 타협 내지 굴복하는 신자들이 대다수이므로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어떤 신자라도 정말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기도하며 오직 주님의 영광만 간절히 소원한다면 순교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축귀나 신유의 은사만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귀신과 악령은 십자가 안에 바로 서 있는 신자를 절대 넘어뜨리지 못한다. 실제로 귀신들린 점쟁이나 무당이 신자의 점괘는 낼 수 없고 굿조차 하지 못한다. 그것도 예수 믿는 신자라고 밝히지 않고 또 아무런 신앙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미리 알아 겁을 먹고 어쩔 줄을 모른다. 심한 경우에 그들은 거품을 물고 까무러친다. 그래서 어떤 신자라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담대하게 대적하면 아무리 추악하고 강한 세력이라도 쫓아낼 수 있다.

또 신자의 자녀가 병들어 아프면 부모가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면 정말 병이 낫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아픈 성도를 위해 교회에서 합심해서 진심으로 중보 기도하면 간혹 낫게 해 주신다. 신자와 함께 하는 성령의 은사가 발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은사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분이 그 뜻대로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즉 병이 낫거나 낫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속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영광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요컨대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라도 이미 성령의 은사를 받았고 성령의 전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아홉 가지 은사 중 어느 것이라도 자기가 현재 하고 있는 주님의 사역에 힘을 보태어 주기를 소원하면 가장 적합한 은사가 틀림 없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성령의 은사를 너무 초자연적으로 취급해 평신도에 불과한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무속 신앙인들도 과거사를 제법 알아 맞추고 가끔 신기한 능력을 나타낸다. 그들이 초자연적인 악령에 사로 잡혀 있고 또 하나님이 일정 부분에 한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능력만 보고 당장의 곤경과 질병에 대한 위로내지 해결책을 얻어서 앞날에 대한 불안을 덜어 보려고 그들을 찾아 간다.

그러나 반드시 그 대가를 바쳐야만 한다. 사단의 졸개들은 돈벌이가 목적이지 고난을 겪고 있는 자에 대한 사랑과 긍휼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 나아가 사단은 세상의 향락이나 경제적 부나 일신상의 안락을 주어서라도 연약하여 불안에 떠는 인생들로 자기를 찾아 오게 하지 어떻게 하던 참 하나님으로부터는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필요하다면 협박을 하거나 겁을 줘서라도 인간의 영을 미혹 시킨다. 가롯 유다는 그래도 은 30이라도 받고 자신의 영혼을 사단에게 팔았지만 불신자들은 돈을 바쳐가면서 자기들의 영혼을 귀신에게 팔고 있는 셈이다.  

신자는 다르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이 악령의 모든 흉계를 물리치고 사단의 결박 아래 묶여 있던 인간들을 구원해 내셨다. 더 이상 악령들이 신자를 넘어뜨리거나 조종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신자가 저들을 얼마든지 이기도록 해주셨다.  

성령으로 다시 오신 예수  
        
예수님은 유월절 전날 밤에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유월절은 출애굽 때에 죽음의 사자가 죄인인 모든 인간의 장자를 전부 죽여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로 문설주와 인방에 뿌린 문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집을 건너뛰어가(留越) 살려 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흘린 피의 공로만 의지하는 신자들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된다. 주님은 문자 그대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출애굽의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

그 유월절 후 3일 만에 주님은 부활하셔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다. 그리고 승천하면서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이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제 그 약속대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오순절(五旬節)은 유월절 이후(留越節) 오십일 째 날에 지내는 절기이므로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지 며칠 채 되지 않아서였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의 원어적 의미는 당신과 “특성이 다른(different)” 것이 아니라 모든 특성은 똑 같지만 “또 다른 하나의(another)” 보혜사였다.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은 유월절 어린 양 예수님의 영이자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성령이 오신 모습을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행2:2)”라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감지(感知), 감청(感聽)할 수 있는 강한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하도록 충만히 임했다는 뜻이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라고 했다. 가시적(可視的)인 모습으로 성령이 오셨다는 뜻이다.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고 한다. 그 장소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부어주셨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독자로선 그 정확한 광경을 묘사하거나 상상할 수도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모두에게 들렸고, 보였고, 각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재 하셨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이땅에 계실 때의 그 보고 듣고 만졌던 가시적, 현재적(顯在的), 실체적 임재가 끝난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제자들은 여전히 똑 같은 방식으로 주님을 뵐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지상 사역 때보다도 오히려 더 광범위하면서도 더 가깝게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여 내주하게 된 것이다. 생존 당시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제자들과 소수의 제한된 사람들만 만났지만 이제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을 뛰어 넘어선 것이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영원히 계실 하나님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요14:18-20).” 주님은 제자들이 고아와 같이 어찌할 바 모르도록 내버려 두시고 떠나신 것이 아니었다. 약속대로 다시 오심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고아가 아닐 뿐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도 성령님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오순절 방언의 뜻은?

본문에 의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선 성령은 아홉 가지 은사 중에 방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제자들이 한번도 듣고 배우지도 못한 다른 종족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방언을 나타나게 하셨을까?”이다. 방언을 해야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뜻인가?.

흔히들 오순절 방언 사건을 두고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알아듣기 쉽도록 각 나라의 말로 하게 했다고 단순하게만 생각한다. 즉 각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선 통역이 필요했지만 제자들 120명을 하나님이 각 언어별로 배분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너무 부분적이고도 표면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겨우 외국어 동시통역사정도의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누구인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도 일부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유대인들, 그것도 경건한(5절) 유대인들이다. 유대인은 고래로 세계 어디를 가도 자기나라 말을 잊지 않는 민족으로 유명하다. 모세오경을 자기들 말로 암송할 정도다. 그들이 아무리 천하각국으로부터 모였다지만 당시의 유대 표준어인 아람어는 필수적으로 했을 것이며 세계 표준어인 헬라어는 물론 자기가 사는 나라의 언어 둘 중 하나도 추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상황이 통역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꼭 통역을 세운다면 헬라어 통역사 한 사람 정도면 충분했다. 제자들이 한꺼번에 120개 국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올림픽 입장식 때 각국의 기수처럼 팻말을 들고 “자! 영어 아시는 분, 불어 하시는 분, 스페인어 듣는 분들은 각각의 팻말 앞으로 모이시오” 하면서 줄을 세울 상황이 아니었지 않는가?

이들이 정확하게 어느 장소에서 방언을 받았는지 분명한 설명이 성경에는 없지만 아마도 마가의 다락방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다 계속 방언을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성전 마당에까지 와서 남들이 언뜻 보면 횡설수설 하듯이 그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을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도 얼마든지 믿는 자들 사이에는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성령의 은사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 성경의 예언과 기록대로 지금도 일어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님은 살아 계시며 성경기록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오순절의 방언은 제자들로 하여금 신비한 경험을 하게하고 특별한 능력을 주고자 하는 뜻만이 아니었다.

오순절은 유대의 3대 절기 중에 기후나 그 의미로 보아 가장 순례객이 많이 모이는 날이다. 예수님이 이 날에 맞추어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당신을 모르는 자들에게 방언을 통해 당신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고 그 자리에 임재해 있음을 알게 해주고자 하는 뜻이었다. 그것도 한꺼번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자들이 성전까지 나와서 방언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방언으로 증거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뭔가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다(11절)는 정도만 눈치 챘던 것 같다. 대신에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신기해 한 것이 그들이 보인 더 큰 반응이었다.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12,13절).” 그것도 갈릴리 촌에서 온 일자 무식꾼들인 제자들이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외국어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너무 기이했다.(8절) 아직까지는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무슨 의미인줄도 모르고 제자들이 통역사를 통하지 않고 외국어로 말한다는 사실에 더 흥분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통역 기능으로 방언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통역사가 없이도 외국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자들이 아무 막힘 없이 유창하게 외국어로 술술 말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방언이 동원되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영어로 치면 ABC도 몰랐던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말이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적은 방언을 목격하고 듣는 자들에게 무엇인가 신기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데 있었다. 평생에 못 보던 광경이요,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자, 이성과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성취된 요엘 선지자의 예언

요컨대 성령이 우선에 한 일은 복음을 직접 전하기 보다 방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살아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게 한 것이다. 오직 한분 참 하나님이 천하 만국의 사람 앞에 천하 만국의 말을 통해 당신 되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제자들에게 일시적으로 집중시켰고 순식간에 수천이 넘는 유대인들이 제자들 주위로 모이게 했다.

바로 그 때에 베드로가 단위에 서서 그 사건의 의미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틀림 없이 베드로는 아람어로 설교했을 것이다. 메대, 애굽, 바대, 세상 어느 곳에서 왔던 청중들은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광복절 기념식에 해외 동포들이 미국, 일본, 중국, 각국에서 왔지만 대통령이 각 나라 말로 연설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성령이 오셔서 각국어로 방언을 하게 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또 성령은 베드로를 그 수 많은 청중 앞에서 담대하게 설교할 수 있게 했다.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 찬 유대인들에게 그는 외쳤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14절).” 베드로가 누구였는가? 갈릴리 시골의 무식한 어부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비겁한 자요, 주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꽁무니를 뺏던 자였지 않은가?

그런 그가 천하 만국에서 모인 경건한 자들,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고 권세 있는 자들 앞에서 자기 스승인 예수를, 그것도 나사렛 이단으로 알려진 한 목수를 당당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령의 권능을 입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성전에 모인 천하각국 유대인들은 베드로의 아람어 설교를 통해 비로소 복음의 내용을 전해 듣게 되었다.

나아가 성령은 청중들에게도 역사하여 마음 문을 열게 했고 또 베드로의 설교에 영혼의 찔림이 있게 했다. 그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실 뿐 아니라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임재해 있고 각자의 심령을 두드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오순절 날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 뿐만 아니라 에루살렘의 성전에도 충만히 임했던 것이다. 군인의 예로 다시 비유하면 마가의 다락방에선 특별한 임무를 맡을 군인들에게 방언이라는 은사로 나타났지만, 성전에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소총과 수류탄의 모습으로 성령이 임했던 차이 뿐이었다.

방언은 어떤 밀의적(密議的) 신비한 현상이 아니라 베드로가 설명한 대로 하나님이 이미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셨던 일이 성취된 것이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28,32)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자기들이 십자가에 매달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부활하셨음을 성령의 깨우침으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천하 만민에게 크고도 확실하게 선포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0,21) 그러자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자들이, 무식한 갈릴리 사람이나 경건한 순례객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였다. 결국 그 날에 믿고 세례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이 넘었다(행2:41). 역사상 최대의 부흥집회가 열린 것이다.

성령의 참 권능

그런데 이 삼천의 일반 군사가 받은 하늘의 신령한 무기, 즉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들도 방언을 받았는가? 아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4) 예수를 주라 입술로 시인한 바로 그 고백이 그들이 받은 은사였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했다. 성령이 신자에게 임한 외적 증거는 권능이 드러나는 것인데 특별히 신비한 능력이 아니라 땅끝까지 당신의 증거자가 되는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방언이 그 은사를 받은 신자의 영적 우월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방언을 받는 것은 대단한 경험일 수 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고 온 세상의 나무와 새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정말 속에서 우러나는 기쁨은 말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새 술에 취한 것 같다.

그러나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영혼이 부패되어 있는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영원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 복음을 통해 구원을 주시는 당신의 능력이다. 쉽게 말해 어느날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한 순간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밉고 이해가 안되던 예수님이 정말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고 부활하신 메시야였다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게 한다.

오순절 날 하루에만  예루살렘에서 세례 받은 자가 삼천이 더 되었다고 했다. 복음에 관해 가르침을 받고 이해되어서 결단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그들의 영혼 깊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작용하여 좌와 사망과 사단에 묶여 있던 결박을 끊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아가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에 그분의 생각과 심령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게 한다. 그래서 불쌍한 죄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열어 준다. 이전에는 대적이요 원수였던 자들도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모르고 부인하는 사람들만 만나면 안타깝고 애처로워진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성령을 받는 권능, 즉 담대해지는 것의 본질이다. 갑자기 무슨 신령한 능력이 생기거나 성격적으로 아주 담대해져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는 여전히 현실의 환난 가운데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증거하는 데 있어서 만은 세상의 어떤 방해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담대히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오순절 날의 대부흥 집회를 혼자 인도했던 베드로나 사자 밥이 되어 죽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처럼 말이다.  

신약 시대에는 왜 제비 뽑기가 사라졌는가?

이제 구약시대에 성행했던 제비 뽑기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사라진(?) 이유가 자명해졌다.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자 예시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 아니 인류 역사 전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뜻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다. 그분의 뜻은 오직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만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고 그렇게 구원한 신자를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시는 그 긍휼로만 대우하겠다는 것 뿐이다. 한 마디로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화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16,19,20)

말하자면 신자가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없이 완전히 명료하게 밝혀졌다는 뜻이다.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 오직 예수가 주심을 증거 하면 되고 또 그 일을 함에는 성령의 인도하심 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가 현실에선 여러 대체 방안들이 있어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신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어떤 일을 선택할지 알려고 하기 보다, 과연 어떤 일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인가를 판단하려 들면 성령은 신자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반드시 가르쳐 주신다. 신자가 예수를 증거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바칠 준비와 소망이 있는데, 말하자면 순교할 각오도 하고 있는 데 성령이 어떤 길로 가라고 안 가르쳐 주실 리가 있겠는가?

요컨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예수를 몰랐다. 또 성령이 만민에게 부어지지 않았다. 아직은 연약하고 유한하며 죄로 찌든 인간의 지정의로만 판단했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의 선입관, 편견, 조종, 유혹, 선동 등이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할 제비 뽑기가 필요 했었다. 그러나 이제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가 베드로처럼 진정으로 예수님을 담대하게 선포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더 이상 제비 뽑기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신자는 이미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된 자들이다. 성령님이 와 계신 자다. 성령세례를 받아 그분의 권능으로 덧입혀진 자들이다. 그렇다고 수시로 방언으로 기도해서 병이 낫고 어려운 일도 안 당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 없이 핍박과 고통이 따른다. 병이 나으려면 여전히 병원부터 찾아 가야 한다.

그럼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성령과 악령의 차이만큼 달라진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정 반대편에 서서 오직 사람들로 예수를 외면하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사단과 반대로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증거 하는 것으로만 입증되어진다. 오순절 날 성령은 방언이라는 신령한 현상을 통해 예수가 부활하셨음을 모든 자들 앞에서 확인시켰고, 그들로 예수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제자들 앞에 모이게 했으며, 비겁하고 무식한 베드로를 담대케 해서 예수를 증거케 했고, 청중들에게도 성령이 임재하여 예수에 관한 설교를 마음을 열고 거부감 없이 듣도록 했고, 그 듣는 자들에게도 영혼의 찔림이 있게 해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로 시작해 예수로 마치게 만들었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당연히 예수를 증거할 수도 없다. 성령의 권능은 오직 예수를 담대히 증거하는 능력이다. 다시 사도행전 1:8의 말씀을 보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분명히 내 증인, 즉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했다.

또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다. “되리라”는 수동태를 사용했다. 신자가 가진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다. 신자와 함께 하는 그  성령님이 신자를 증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또 그 권능은 예수님의 심장과 영혼으로부터 온다. 죄에 빠져 고통가운데서 헤어날 줄 모르는 인간을 애통해 하시고 안타까워 하시며 사랑하시는 그 분의 마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돌아 볼 때에 이런 마음이 아직 없다면 성령이 임재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니면 신자의 영이 세상과 죄악으로 향하고 있어 성령의 권능이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지금 이 시간 진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각자의 마음을 점검해 보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예수님을 증거 하고싶은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겸허하게 성령님이 내 영혼에 충만하게 강림해 달라고 간구하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되 외적인 카리스마가 아니라 가장 먼저 믿음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령님은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온전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신자가 그 다음에 할 일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져 주신다. 신자는 단지 그분이 담대케 해주는 대로 땅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예수는 주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사라의 웃음

2011.11.03 23:48:51
*.150.19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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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해야함을 알고 그리고 외치고 외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허다했음을 봅니다. 그것을 보게되면 도무지 부끄러워 정말
숨고 또 숨고만 싶어집니다. ㅠ.ㅠ
두 손 모아 기도하기는 이젠 착각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증거되는 삶이길 소원해 봅니다.

날마다순종

2020.10.30 17:02:49
*.14.99.253

말로 복음을 전하기 앞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주위 이웃들에게 그 삶으로 먼저 증거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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