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전도인가 선행인가? (마5;13-16)

조회 수 2246 추천 수 186 2008.05.29 20: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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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가 선행인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지구 멸망의 원인?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릴 테니 진지하게 생각해서 대답을 해보십시오. 기독교가 지금 힘을 잃고 교인은 감소하며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이유가 전도와 선교를 게을리 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신자가 신자답게 살지 못해서이겠습니까? 언뜻 생각하면 신자가 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꼭 고르려면 그 답이 맞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둘 다 정답이 아닙니다.

전도와 선행으로 기독교가 부흥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죄의 본질이 얼마나 치사하고 교묘하고 음흉한지 모르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또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 감안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은 도무지 말로 해서 알아먹는 존재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지자가 와서 말로 전도했지만 전혀 회개치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 중의 하나도 선행마저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인간도 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한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먹이고 위로하고 병을 낫게 하고 귀신을 쫓고 죽은 자마저 살리시며 권면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제자들마저 당신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것도 성령이 와서야 제대로 믿게 되었지 않습니까?

인간의 그 비참한 상태가 지금은 예수님 당시보다 더 악화되었습니다. 어쩌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테러나 부정부패 같은 사회적 죄악이 절정에 이르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섹스나 마약 같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노아 홍수 때에 벌써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간이 모인 곳은 인종, 문화, 종교, 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죄가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 간음하는 불신자 친구가 있어서 그것은 큰 죄니까 회개하고 그 관계를 빨리 정리하라고 권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한 마디로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것입니다. 본인이 범한 행위나 권면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따져서 흥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 권면 자체가 아무 의미나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똑 같은 충고를 우리 앞 세대에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편의상 10년 단위로 따져 보면 30년 전에는 틀림없이 이런 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너무 양심에 찔려 괴로웠는데 충고 고맙다. 그런데 쉽게 정리 되지 않으니 큰일이야. 나도 노력하겠지만 만날 때마다 나를 야단 쳐 주고 평소에 나를 위해 기도해주게!” 아마 20년 전에는 “안 그래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내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너마저 이러면 내 기가 더 죽잖아!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고마운데 좀 부담이 되니까 제발 모르는 척 해줄 수 없겠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10년 전부터 지금은 “순전히 개인적인 프라이버시야. 친구라도 간섭할 문제가 아니야. 한 번만 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면 너하고도 당장 절교야!”라고 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비록 죄책감의 세기는 약해도 간음이 죄라고 인정하고 양심에 찔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라고 충고하는 사람이 죄인 취급을 받습니다. 이 세대의 특징이 죄악이 극도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죄가 죄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모든 죄가 오히려 인간답게 살아가는 표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인권, 자유, 평등, 생명 존중 등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되어서 떳떳하게 자랑하고 사람들의 칭찬까지 받는 선으로 둔갑했습니다.

그래서 현 세대의 유일하게 남은 죄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해로 지구 환경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성경적으로도 이 땅을 하나님 뜻대로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창1:28)을 어긴 큰 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유일한 죄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들이 오직 굶어서 멸망당하는 일은 면하자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현대의 유일한 도덕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친척, 민족, 나라가 잘 사는데 도움을 주면 선이요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악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 굶어서 멸망한다고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노아 홍수로 심판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지구 환경은 끝까지 유지 보존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이 세대는 자기가 마음과 기분에 안 드는 것만 악으로 간주합니다. 모든 죄가 상대적이 되었습니다. 절대적 죄는 하나도 없어졌습니다. 절대적 죄가 없어졌다는 것은 절대적 하나님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커녕 아예 하나님이 없는 양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죄를 죄로 인정했고 구원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아주 열망하고 있었고 이방인들도 최소한 구원의 필요성은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 법정의 공식적 죄명도 하나님을 모욕한 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죄에 대해 열성적으로 변호했습니다. 지금 신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전도하면 콧방귀도 뀌지 않는 이유는 죄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을 필요성을 이전만큼 절감 아니 전혀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착하게 살면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분명 개독교가 기독교로 바뀔 것이며 교회나 신자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교회에 출석할 것 같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만약 큰 교회들이 헌금 상당액을 이번에 지진이 난 중국이나 태풍 피해를 입은 미얀마에 구호성금으로 보내면 그들도 분명 잘했다고 인정은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예수 믿고 회개는 하지 않습니다. 이젠 구호성금 내가 조금 적게 내어도  되겠다고 좋아는 할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이젠 욕하고 씹을 스캔들이 하나 줄어서 심심하겠다고 실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신자가 더 위선적이고 교회도 부조리를 계속 저지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예수님을 외면할 구실이 생길 테니 말입니다. 그들이 사는 방식을 교회와 신자마저 인정해서 동참해주고 있다고 내심 반기며 박수칠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도 기독교가 가장 선행을 많이, 그것도 압도적으로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욕을 퍼붓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쩟쩟!” 혀를 찰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그랬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지도 못하고 여전히 교회 밖에서 신자들을 향해 삿대질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불로 걸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6절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교회와 신자가 칭찬받고 기독교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선 하늘에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이 땅을 당신 뜻대로 운행 통치하고 계심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자들부터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음을 누구라도 확연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꾀든 교회로 무조건 끌고 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겸허히 인정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신자와 함께 받고 싶은 소원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요컨대 절대적 선이신 절대적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절대적 죄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름이 없는 하나님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내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구원자로 세웠습니다. 그 때 모세는 내 동족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내게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인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였습니다. 세상의 어떤 다른 것에 의존은커녕 영향도 전혀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있는 절대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태초부터 영원까지 하나도 변함없으신 전지전능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존재가 오직 그분께만 연유하고 영향 받고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분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히브리 원문에는 그 답이 주어와 Be 동사로만 이뤄졌습니다. 알기 쉽게 영어로 표현하면 “I am."입니다. 아시는 대로 ”I am" 다음에 boy, student, 같은 수식어가 오면 그것과 주어는 동격이라는 뜻입니다. “I am" 다음에 아무 것도 붙이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당신이 동격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비교로도, 상징으로도, 단순 호칭으로도 세상의 어떠한 사물이나 ,형상을 심지어 개념조차 사용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분의 이름 모두는 단지 어떤 특정상황에서 당신의 특성 중의 일부를 강조해서 인간으로 잘 이해시키려는 목적뿐이지 그분의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산 제물로 바쳤을 때에 어린 양 희생제물을 당신께서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신자더러 신자보다 당신이 먼저 가서 행하신다는 당신의 섭리와 주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들조차 사실은 하나님을 어떤 특정한 의미로만 제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에서 이름이 없는, 아니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그 대답을 우리말로 실감 나게 바꾸면 바로 “내다”가 됩니다.

당시의 모세의 입장이 어떠했습니까? 동족에게 배척을 당했고, 애굽에선 살인죄를 범한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나이 80이 되도록 양치기나 하는 세상에선 최고로 바닥에 떨어진 처지였습니다. 그런 자를 동족의 구원자로 세웠으면 백말을 타고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에 날 선 검과 창을 들고 그들 앞에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 낡아빠진 지팡이 하나 들고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구원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말이 어눌한 자기에게 말입니다. 물론 형 아론을 대변자로 붙여주셨지만, 하나님의 이름이라도 근사하고 장엄하고 뭔가 권능이 넘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근사하기는커녕 이름조차 가르쳐 주지 않고 단순히 “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최고 경칭과 찬사라도 표현이 불가능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모든 것을 훨씬 아니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설명을 다 동원해도 그 분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망라한 것보다 더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분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조금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더 실감나게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아이들만 두고 부모는 시장에 가버린 틈을 노려 늑대가 나타나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문을 열라고 했던 우화를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아무래도 목소리가 이상해서 손을 넣어 보라고 했더니 털을 감추기 위해서 흰 밀가루 칠을 해서 넣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어 완전 겁에 질려 그저 오들오들 떨면서 문을 더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또 어떤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누구세요 물었더니 아버지가 “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거기에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그 순간 모든 걱정 염려가 다 사라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내다”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언제 또 나타나셨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떨어진 후에 제자들이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다 광풍을 만나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유령인 줄 생각해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뿐 아니라 사실은 공생애 내내 영어 “I am”에 해당하는 말(성경에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로 기록되어 있음)로만 자신을 설명하되 이번에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했습니다. 내가 아는 길을 가르쳐 줄게, 진리를 터득했으니 와서 배우라. 생명을 얻는 교회와 부활로 가는 종교를 설립하거나 소개해 줄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인 줄”이라고 한글로 번역된 부분이 영어로는 “I am he."이지만 일부 영어 역본에 보면 “I am”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도 ‘그’가 작은 글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십니까? 원래 더 많은 원본에는 ‘he'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바로 자신의 이름을 “I am”이라고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장엄하고도 위대하며 풍성하고 신비한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성경 말씀 그대로 하나님 당신께서 바로 내 죄를 사해 구원해주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이름도 없으신 분이 부활하셔서 하늘의 생명책에 내 이름 석 자만은 정확히 올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모세에게 나타난 바로 그 “내다”하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줄 모르는 것이 죄의 근본이며 그러면 심판을 받아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 여호와 샬롬, 여호와 닛시, 에벤에셀, 임마누엘 그 전부를 합친 하나님입니다. 바로 그분이 지금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내다” 하고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와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또 당신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했습니다. 그 절대적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은 절대적 죄인입니다. 간음, 동성애, 부정부패, 음란, 궤휼, 사기, 살인, 테러, 모든 범죄는 그 절대적 하나님을 떠났기에 생긴 것으로 절대적 죄입니다. 인간은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고 추한 것이지 인간 바깥에 있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덕을 모르고 교육을 덜 받고 상황이 나빠 죄를 지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나면서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항상 죄와 친밀했고 죄가 주는 일시적 쾌락과 영원한 죽음을 즐거이 탐닉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썩어빠졌습니다. 영혼이 타락하였기에 약물과 처방전으로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반드시 속에서부터 그 존재 자체를 완전히 뒤집어엎을 의사가 필요했습니다.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던 인류에게 예수님은 ‘내다’라고 아이들에게 찾아오신 바로 그 아버지의 음성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3에 예수님은 당신의 양을 그 이름으로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상처, 고통, 환난, 죄악, 눌림, 메임, 모든 것을 아십니다. 스스로도 너무 미워 용서가 안 되고 외면하고 싶은 가장 부끄러운 부분까지 아십니다. 그 모든 것을 그분은 십자가에 전부 짊어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절대적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베푸신 구원이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그대로 완전하고 완벽한 구원입니다. 다른 방도로는 인간의 구원은 아예 불가능했고 소망조차 생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죄인인 우리 대신에 당신이 죽기로 태초부터 뜻을 세우고 때가 차매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양도 당신의 음성을 듣고 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만나주셔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그 후로는 어떤 어렵고 고달프고 억울한 경우가 생겨도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하만 하면 바로 “내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때는 임박했다.

신자가 되었으니 더 착하게 살아야지 정도로는 너무나 가난한 신앙입니다. 모든 종교가 선행을 강조합니다. 아니 종교 이전에 착하게 사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근본입니다. 내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며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십자가 은혜 안에, 다른 말로 천국 안에 들어온 자입니다. 절대적 하나님이 항상 동행해주시며 인도하십니다. 요컨대 하나님 대신에, 작은 그리스도로 세상 앞에 서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더러 너희는 “빛과 소금이니라.”고 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자질, 조건,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 속에 보배로 오셔서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에 있는 그 빛과 소금을 가리도록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겉모습이 깨어져야 합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내가 깨어지고 깨어지며,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썩어 없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등경’과 ‘산 위의 동네’ 비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흑암이 빛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리지만 않으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깨어지면 하나님인 예수님이 필연적으로 거룩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히도록 해주십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지녀서 예수의 생명도 함께 드러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 신자, 기독교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작업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절대적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 유일하고도 절대적 구원의 길인 십자가만 평생을 두고 증거 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선 오직 두 가지 냄새밖에 맡을 것이 없었습니다. 성령을 좇은 자는 영생의 냄새를, 흑암에 묶인 자는 영원한 죽음의 냄새를 말입니다.

그에게는 선행을 할 여유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선행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에 유행하는 철학, 사조, 관습, 종교가 십자가에 비해 정말 헛되고 헛된 것임을  증명하기에만도 너무 바빴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독생자마저 십자가에 그렇게 무참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던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도 평생이 모자랐습니다.  

죄를 죄로 인정하면 회개의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당연히 구원도 가능하며 하나님이 심판을 유보할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으면, 아예 죄가 없어지면 회개도 없어지고 당연히 구원도 실종됩니다. 아무리 인자하시고 노하기 더디 하시는 하나님일지라도 더 이상 심판을 유보할 이유와 근거는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원이 목적이었지만 재림은 심판을 행하러 오십니다. 간음이나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한 적은 인류 역사 이래 소돔과 고모라 때말고는 지금이 처음입니다. 소돔 때만 해도 그 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마지막 심판 때보다 더 견디기 쉬었다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어진 것이 바로 우리 세대들이 눈으로 멀쩡하게 보고 있는 중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지난주에는 캘리포니아가 미국에서 두 번째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 시키는 판결을 내렸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심판이 당장 내일 모레 닥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인류 역사상 최후의 심판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현대 인류가 당면한 최고 문제는 지구 온난화 같은 자연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에 약속한 대로 자연을 그대로 유지 보존했는데 인간이 서로 탐욕을 먼저 채우려 시합하느라 완전히 망쳐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의 원칙은 인간을 죄악 가운데 불의한 마음을 품고 그대로 살게 방치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불을 안고 화산 안에 뛰어 들어가겠다는 것을 구태여 말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류가 죄를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지구를 태양에서 1-2 미터만 뒤로 밀면, 태양의 열을 조금만 줄여도 그 즉시로 해결 됩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인간들이 회개할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아 탈이지만 말입니다.  

그분이 인류에게 내릴 징계는 자연재앙보다 훨씬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인간은 결국 돈으로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불경기가 생각보다 훨씬 오래 장기간 계속될 것이며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만든 제도는 가운데 최상의 시스템이라고 자부하는 민주주의, 자본주의조차 하나님이 배제된 채로는 인간의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음도 반드시 증명될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가는, 성경의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길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단단히 각오하셔야 합니다. 단순히 저는 열심히 믿었으니 이런 불경기 가운데서도 제 비즈니스만은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만 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역사를 누가 주관하는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한다는 말의 구체적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자를 통해 이 땅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민주당 후보가 누가 되든지, 11월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든지 그들이 역사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신자가 역사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한국의 형편을 보십시오. 남북관계만 잘 되면 다른 모든 것은 깽판 쳐도 좋다는 대통령이 물러나면 뭔가 좋아질 것 같았는데, 이제는 경제만 잘 되면 다른 모든 것은 깽판 쳐도 좋다는 대통령이 들어서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것도 장로 대통령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대통령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거 공약으로 그것을 미리 내세웠고 국민들이 그러는 것이 좋을 듯해서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한국 국민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사실은 모두 그런 수준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가 제사장 나라 책임을 지지 못해서입니다. 첫째는 잘못 가르친 목사들에게 가장 잘못이 큽니다. 나아가 성경의 하나님 대신에 엉뚱한 하나님을 요구한 신자들의 잘못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인간의 이념과 사상이, 종교와 철학이, 경제와 문화가 인간 문제를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것도 십자가를 통한 그분의 긍휼과 은혜만이 인간에게 참 소망이자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 땅의 물질이 아니라 죄인들의 영혼입니다. 이 땅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보다는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리시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신자에게 가장 일차적이고도 절대적인 관심을 쏟아 붓습니다. 신자에게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권능마저 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 근본적으로는 구원문제에 해당되지만 앞으로 일어날 인류 역사를 오직 십자가 방식으로만 운행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를 통해 당신의 권능과 은총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세대는 우리 생각, 아니 상상보다 훨씬 더 멸망 쪽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죄악이 타락한 정도는 벌써부터 그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은 분명하지만 신자들이 그런 교리만 붙드는 것으로는, 또 그 교리를 열심히 전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인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모슬렘이 득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교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절대적 신 ‘알라’에게 자신들의 전부를 바치는 절대적 신앙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대인들이 죄와 하나님을 부인하지만, 또 그들이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못하는 구멍이 모든 자의 심령에 크게 나있습니다. 뭔가 절대적 믿음을 갖고 싶어 합니다.

바로 그 역할을 신자들이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전혀 엉뚱한 것들에 쏠려 다닙니다. 이미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기능을 상실했고 심지어 그런 직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조차 가르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바로 된 신자 한 사람이라도 엘리야처럼 일어나 죄악과 맞서야 합니다. 죄를 죄답게 분명히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세상을 정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의 절대적 선이 드러남으로써 악이 자연히 대비되는 상황이 연출되어져야 합니다.

지금도 오지의 선교 현장에선 복음이 역동적으로 전파되고 성령의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전도와 선행을 해서입니까? 그전에 사방팔방이 막혀있지만, 심지어 악령의 소굴 안에 들어와 있지만, 오직 절대적 하나님만 의존하고 세상의 것들은 다 포기하고 자기의 전부를 건 절대적 믿음 때문 아닙니까?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 아닙니까?

선교사에게 부흥과 기적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부러 약한 모습으로 다가올 리는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의 권능과 은총은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크십니다. 아니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우리를 거룩과 의와 참 생명으로 덧 입혀서 당신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분히 이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부러워하는 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집니다. 그들이 나도 꼭 저렇게 한 번 살아보겠다고 소망하는, 심지어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까지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우리가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며 죄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시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리가 구체적인 회개와 확실한 헌신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당신의 핏 값으로 사셨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가 우리 전부를 내어 드리면 얼마나 크고도 거룩한 당신의 뜻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역사를 이룰지 짐작조차 못할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너무 거창하고 비장하게 각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 앞에 참 신자, 즉 하나님의 사신이자 십자가 군병으로 서기만 하면 됩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자녀들 앞에 가장 먼저 그렇게 하십시오. 미국에선 대학에 진학하면 동성애나 진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완전히 무식한 비지성인이자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매도됩니다. 순식간에 왕따로 취급당하기에 어지간한 신자 자녀라도 교회에서 배운 교리는 대학에 가면 그냥 다 포기해 버립니다.

마치 두눈박이 원숭이가 외눈박이 동네에 간 것과 같습니다. 두눈박이가 외눈박이 동네에서 두눈박이로 끝까지 남아 있으려면 외눈박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절대적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십자가의 절대적 은혜를 알지 못하면 금방 자기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그들을 말로나 선행 정도로 가르쳐선 부족합니다, 여러분부터 이미 죄와 하나님이 실종된 이 세대에서 끝까지 두눈박이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죄악을 절대 그냥 두고 보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언젠가 완벽한 모습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도래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구원 받은 신자에게 십자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착하게 살고 교회에 나와 기도하면서 무사무탈 하게만 끝낼 것인가?” 신자를 탓하고 야단치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더더욱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러지 못하는 우리를 보고 지금도 너무나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누구를 만나도 항상 “내니 두려워 말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인자하고 권능에 찬 미소를 짓고 바로 곁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온 신자를 세상과 사람과 죄악과 사단과 죽음이 절대 제 멋대로 농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기에 그것들이 때로는 우리 옷에 때를 묻혀 겉 사람을 후패하게 만들 수 있지만 속에 있는 새 생명은 절대로 없앨 수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없어지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힘을 잃으면 세상은 끝입니다. 비록 영적으로 충만하지는 않을지라도 절대적 하나님과 그 절대적 소망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만 믿고 바알 선지자 수백 명과 단독으로 당당하게 맞선 엘리야 같은 절대적 신앙을 가진 자를 찾고 계시며 또 그런 자를 통해, 단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을지라도, 이 땅을 거룩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여러분 주위에 천국을 실현할 책임과 권능이 이 교회도, 담임 목사도 아닌, 바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있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목사님의 이름이 지금 인정받고 있는 것과 여러분의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만 지금 이 교회에서 온전한 진리로 배우고 있는 교리가 참 교리가 되며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을 것입니다.    

5/28/2008

남가주서머나 교회(김성수 목사 담임)의 수요예배에서 설교한 내용입니다.

운영자

2008.05.29 20:15:55
*.104.224.128

내용 중의 일부는 이전에 이미 설교했던 부분과 겹칩니다.
저는 리바이벌(?)은 어지간해선 안 하는 주의이지만
갈수록 세상이 흉흉해지는 이 때에 사람들이 먹고 살 염려부터 하는데
정말로 염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경각심을 고취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너그러이 양해 바랍니다.^^

김순희

2010.03.08 14:13:09
*.82.118.115

아멘!
내가 깨어져야만 이 그릇 속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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