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14:28-33)

조회 수 2196 추천 수 33 2013.01.02 15: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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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태복음강해 (15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28-33)


의심은 나쁜 것?

제 친구 중에 예수 믿는 자를 아주 싫어해서 아무리 전도를 해도 씨가 안 먹히는 자가 있었다. 그 이유가 조금 특이했다. 교인들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이기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좋은 일에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사업이 부도가 나도 병원에서 말기암 선고를 받아도 그런다는 것이다. 심지어 멀쩡한 아들이 길가다 음주운전 차에 치어 죽었는데도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믿는 맹신자로서 종교적 가식이 너무 심해 보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설득하여서 전도할 자신이 있는가? 아마도 선뜻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실제로 그 친구가 불행을 당한 교인들에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왜 은혜가 되는지 물었지만 제대로 대답하는 자가 없어 더 싫어졌다고 실토했다.

신자들이 이런 반발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가 기독교교리를 몰라서가 아니다. 신자 본인이 그 답을 소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럼 현실적 풍요까지는 몰라도 고난이 겹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자꾸 생긴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주위에 믿음이 좋아 보이는 신자에게 상담해보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나쁜 것이니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라.”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 충고대로 몇 번 그렇게 해보려 노력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혹시라도 주위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이 적거나 없다고 판단할까 두려워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는다.  

본문에도 베드로가 처음에는 물 위를 신나게 걷다가 바람을 보고 놀라 물에 빠졌다. 그러자 주님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껏 의심은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의심이 생기면 무조건 없애라고만 배워왔다. 이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최소한 여러모로 따져볼 여지가 많다.  

의심의 실상(實狀)

남편이 매일 야근한다고 말하면서 늦게 들어온다. 전화를 해도 매번 꺼져있기 일쑤다. 집에 들어오자 피곤하다며 샤워하고 자기 바쁘다. 왜 그리 바쁘냐고 물어도 회사 일이라고만 하고 도리어 짜증만 낸다. 아내로선 자연히 다른 여자가 생겼나보다 덜컥 의심의 생긴다. 그럼 의심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아주 좋은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쁘다.

그러다 정말로 남편의 부정을 발견하게 되면 그때야말로 정작 믿음이 필요한 단계가 된다. 어떻게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할지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다.(마5:32) 그렇다면 간음은 크리스천에게도 이혼의 사유가 된다. 다른 한 편 누가 잘못을 범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고 했다.(마18:22) 아이들 장래를 감안하여 진솔한 대화를 나눈 후에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받고 용서해줄지, 아니면 이참에 갈라설지 간절히 기도해서 결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의심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거나 없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심은 믿음을 작동시키는 동기 내지 통로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이 아무래도 용서 쪽에 무게 중심이 있으므로 부정한 남편을 끝까지 용서하기로 택했다면 그 아내의 믿음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도약한다. 단순히 부부 사이의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관점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폭이 넓어진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의 외출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화가 끄져 있는지 받지를 않는다. 어디 갔다 왔느냐 물으면 동창회나 아파트 부녀 모임에 갔다 왔다고 한다.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저녁은 더 정성스레 차려 준다. 혹시 바람을 피우는지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남편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면 남편이 바보이기 때문인가? 대개의 경우 그렇겠지만 그와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2-30년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아내의 성품, 인격, 신앙에 비추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남편이 몸이 아파서 회사에서 조퇴하고는 동네의 슈퍼마켓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아내의 고백인즉 남편 월급만으로는 아이들 과외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근무 중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 남편은 자기가 못나서 아내를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은 것에 용서를 빌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 것이다.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은 당연히 더 굳어질 것이다. 어떤 힘든 일도, 주위 사람들의 어떤 간섭도, 그 두 사람의 사랑과 믿음에 아무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 경우는 진정한 신뢰 관계가 먼저 확고하게 형성되었기에 겉모습만으로는 어떤 의심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에 반해 2-30년을 결혼 생활을 했어도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남편이 있다. 낮에 전화 한두 번 빨리 받지 않았다고 그저 닦달하며 야단친다. 아예 아내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에 아무 일이 아닌데도 무조건 의심하는 것이다. 살펴본 대로 믿음이 없고 흔들리기에 의심하게 되는 법이다. 또 자기도 모르게 의심하게 되면 그 때가 바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단계라는 것이다.  

의심의 기능과 목적.

31절을 다시 보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음이 적은 자라고 먼저 지적한 후에 왜 의심하였느냐고 한다. 의심이 생기는 바람에 좋고 강했던 믿음이 적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다. 최대한 양보해도 믿음이 적은 것과 의심이 생긴 것은 같은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심이 발생해서 믿음이 없어지거나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제대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의심하였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의 원래 의미도 힐문조로 야단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의심의 내용과 그것이 생기게 된  전후사정을 잘 따져보라는 충고다.  

의심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다. 모든 인간에겐 오감(五感)이 있다.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는 후각(嗅覺), 혀로 맛을 보는 미각(味覺), 손으로 만져 느끼는 촉각(觸覺)이 그것이다. 이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기관이다. 그 기관들이 감지하고 인식한 자료를 뇌의 데이터베이스로 전송하면 이성은 분석, 판단, 선택, 결단하는 절차를 행한다.

한강에 얼음이 얼었는데 그 두께를 알 수 없으면 이 다섯 기관과 이성이 합동으로 작동하여 순간적으로 그 얼음이 내 체중을 견디어낼지 의심하게 된다. 큰 돌을 던져서 그 강도를 시험해본 후에 한 걸음씩 조심스레 살살 건너게 된다. 음식 색깔이 변해 있고 역겨운 냄새가 나고 맛이 조금 이상하면 곧바로 상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의심이 발생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선택하여 결행하기까지 정말 1초도 안 걸린다. 순간적, 자동적으로 판단한다. 이처럼 의심은 자연발생적이다.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그렇게 되도록 창조해 놓았다는 뜻이다. 의심은 그래서 익사하지 말고, 또 식중독에 걸리지 말라는 경고를 형성하는 기능으로 너무나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한강에 살얼음이 얼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전혀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야 하면서 무턱대고 발을 내딛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처음의 의심은 정확히 말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가치중립적(價値中立的)이다. 얼음의 두께에 의심이 생겼는데도 돌도 안 던져 보고 익사하면 부정적 결과를 낳을 것이며, 그 반대는 긍정적 결과를 얻는 법이다. 말하자면 의심에 좋은 가치와 의미를 심느냐는 신자의 몫인데 바로 그 때에 올바른, 무조건적 맹신적인 아닌, 믿음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또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한다는 정확한 의미도 의심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판단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심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전후사정을 잘 따져서 정확하고 올바른 길로 가라는 것이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더럽고 추한 흑암의 세력이 배후에 있는지 잘 분별하여 깨끗하고 의로운 생명의 길로만 걸어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심하라.

하나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면 죽기 살기로 파고들면서 따져야 한다. 사업상 계약서는 구석에 깨알 같이 적힌 문구까지 변호사를 동원해서 따지면서 왜 영원히 살고 죽는 문제는 그러지 않는가? 인생을 정말로 진실하며 아름답고도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왜 찾지 않는가? 성경을 열심히 묵상하며 읽고 체계적으로 교리를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받아 누릴 것 아닌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넘게 숱한 고생을 한 후에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둔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밤새 씨름을 했다. 야곱은 그 사자에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라면서  물고 늘어졌다. 창고에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현실적 축복을 부어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상당 양을 형 에서에게 보냈다. 당장 이 강을 넘으면 장자권을 사기 당해 빼앗겨 오매불망 절치부심하던 형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우선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로 보호해 줄지 따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는 하나님께 더 중요하게 확인하고 싶었던 사항이 있었다. 이전에 고향을 등지며 혈혈단신으로 피신 길에 올랐을 때에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꿈꿀 때에 받았던 계시가 있었다. 하늘을 향한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자로부터 그 땅을 반드시 다시 차지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유효한지 물었던 것이다.

그로선 그 언약에 끝까지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분의 권능과 은혜 아래 살며 믿음의 가문의 장자로서 그 믿음을 대대로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전에 베델에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고 믿고 있었지만, 막상 그 땅을 눈앞에 두고선 약속대로 이뤄질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더러 그 약속이 반드시 이뤄지게 해달라고, 다른 말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역사가 실행되길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자신의 장자권이 계속 유효한지 따지고 또 따졌던 것이다. 결국 사자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불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28)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서야 그를 풀어주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따지고 따져 완전히 해소한 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진정한 선조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의심이 들면 보이거나 들려 달라고, 혹은 말씀을 통해 심령에 분명한 확신이 들게 해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제발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르고 또 졸라야 한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라도, 그분이 정말로 내 삶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간섭하시는지, 내 인생에 대한 그분만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과 계획이 있는지 의심이 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의심이 나는 모든 것들을 구체적으로 미주알고주알 아뢰며 답을 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알고 싶다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아니 한다면 오히려 그분의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으로서 믿을 필요가 없다. 아니 하나님은 없는 셈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진정으로 깨달아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는데 외면할 리는 만무하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이 드는데도 따지지 않는 것이 진짜 나쁜 것이다.  

질투의 하나님

배우자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면, 정확히 말해 의심을 해소하려고 사정을 파악했더니 사실로  판명 났을 때에는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질투가 불같이 끓어오른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골수가 썩는 것 같다. 이때의 질투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아주 좋은 것이다.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도 질투하지 않으면 남자도 아니다. 인간으로 살 가치도 없으며, 질투는 활기차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질투가 정말로 좋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바로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라.”(출34:14) 인간을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 그럼 질투하는 당신의 성품도 닮게 하셨다는 뜻이다.

질투라는 감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사랑하는 상대를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라는 뜻이다. 절대로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아담과 이브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창2:25) 서로에게 잘못하는 것은 물론, 숨기는 것 하나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만과 자존심도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 주일 성수를 철저히 하라는 종교적 헌신과 의무를 요구하는 뜻이 아니다. 당신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당신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이 죄악에 빠져서 당신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절대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당신만의 긍휼로 참을 때까지 참다가 그냥 두었다간 진짜 사탄에게 완전히 넘어가겠다 싶으면 이방을 통해 징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당신의 품 안으로 돌려놓겠다는 선언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한다는 질투심의 표현이다.

그분의 우리를 향한 질투심도 마찬가지다. 저는 예수를 믿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저도 제 친구처럼 예수 믿는 신자를 죽도록 싫어했다. 당신의 원수가 되어 있는 그런 저를 당신의 무한한 긍휼 가운데 선택하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주셨다. 결국에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는 이런 영광된 자리에 이르게 할 만큼 질투하셨다.

신자들더러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대로 너희의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성도와 이웃들을 질투하라고 즉, 죽기까지 온전히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교회 안의 대표기도를 잘하는 성도가 질투가 나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서 자기도 그렇게 하면 된다. 괜히 뒤에서 그 사람의 약점을 알아내어 헐뜯지 말고 말이다. 또 구역장, 전도회장, 주일학교교사 등등 여러 직분을 맡아 정말로 성실히 봉사하는 성도가 있을 수 있다. 그럼 혼자 북 치고 장구 친다, 교회를 자기 집 안방인양 제 멋대로 군다고 말도 안 되는 험담을 하지 말고 본인도 무엇이든 맡아서 봉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특권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왜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한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말로 살아계시는 한 분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는 어떤 인간에게도 없다. 모든 인간은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불신자를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들에 비추어 신자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특권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삶과 인생의 전부가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질투의 권능 안에 언제 어디서나 붙잡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자 스스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독생자 예수의 피 값으로 사신 것이다. 그래서 절대로 더러운 죄악과 어두운 사망의 세력에 더 이상 당신의 자녀를 빼앗기지 않으신다. 신자를 반드시 아름답고 풍성하고 거룩하고 선하며 진실한 자리에 되돌려 세우시고야 만다. 이 땅의 삶이 다하면 천국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완전한 계획과 판단 아래 필요하다면 때때로 징벌과 고난을 주어서라도 그 영광으로 이끄실 것이다.    

만약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에 의심이 든다면 제대로 따져서 믿어야 한다. 그저 건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말해선 안 된다. 은혜가 왜 은혜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기도 누리지 못하고 아니, 정확히 그 뜻조차 모르는 은혜라는 단어를 아무 때나 남발하니까 불신자들로부터 맹신자, 광신자라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제대로 믿는 모습을 그들 앞에 보여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불신자가 “저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 같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또 “나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처음에 예를 든 제 친구처럼 신자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뜻이자 은혜라고 말하기에 가식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주어야 할까?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일단 믿어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또 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을 하지 못해서가 절대 아니다. 그래봐야 못 알아먹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점이 기독교의 신비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신비하고 오묘하며 광대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사실은 실존(實存)조차 하지 않지만, 거룩하고 경건하고 위대함만을 강조하며 스스로를 높인다. 여호와 하나님처럼 스스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거기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는 사람들조차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멸시하는 십자가에 직접 달리어 처참한 죽음을 당하셨다.

말하자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질투심이 절정에 올라서 폭발한 것이다. 당신의 엄청나고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랑이 하나 아낌없이 온 세상에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며 엎드린 자에게 당신의 참 생명을 주신다. 또 이 사랑은 인간의 어떤 이성적 이해를, 의심은 당연히 포함되며, 초월한다. 인간 이성과 상충하지는 않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현실의 고난이 겹쳐서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을 의심한다고, 오히려 목사님들이 야단을 치면 칠까, 하나님은 절대 야단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신다. 대신에 의심을 하면서도 따지지 않는 자는 야단치실 것이다. 어떤 의심과 불만이 생겨도 야곱처럼 따지고 또 따져서 반드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단, 하나님의 힘을 빌려 우선 고난만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로 그런다면 지금껏 겪어왔듯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해소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당신을 온전히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어떤 연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연단을 통해 자신을 정금같이 성숙시키겠다는 소망과 또 하나님이 완벽하게 그렇게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따지는 자에겐 하나님은 당신을 활짝 열어젖혀서 신자로 당신에 대해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실 것이다.

12/16/2012

사라의 웃음

2013.01.02 22:15:57
*.109.85.156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질투심이 절정에 올라 폭발한 것이다. 당신의 엄청나고도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랑이 하나 아낌없이 온 세상에 온전히 드러난 것...." 아멘!!

의심이, 질투심이, 그리고 잘 모르겠는 것들을 모두 아울러 하나님께 여쭘고 또 여쭈면서 섬세히 가르쳐 주심을 기대하며. 설사 야곱처럼 목숨을 건 씨름을 하는 모습일지라도, 한 걸음씩 성숙을 향하여 걸어나가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알료샤

2013.01.03 06:20:13
*.111.2.137

아멘. 그동안 의심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행위로 오해했던 것은
지금 돌이켜보니 의심 하나하나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써있는 문자 그대로 그냥 믿으라는 것에 더이상 토를 달 수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목사님 말씀처럼 만인신학자직이 필요한 한국교회인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님의 가르침만으로는 올바른 신앙을 걷기에는 한계가 많아 보이기 때문이지요.. 겸손하게 언제어디서든 말씀을 알아가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사라의웃음님, 새해 주님의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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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14:1-12) [1] 운영자 2012-11-26 1045
229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눅22:31-34) [1] 운영자 2012-11-09 2075
228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1] 운영자 2012-11-04 1822
227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13:51,52) [3] 운영자 2012-10-26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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