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속에 남은 마지막 우상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최후의 만찬 때에 인간으로 치면 유언에 해당하는 많은 강화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활 후 승천하기 직전에 하신 이 간단한 한 마디의 말씀은 그 후 제자들의 평생을 좌우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진정한 유언이 된 셈으로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도 만약 예수님이 딱 한마디로 당부한다면 이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받아 평생을 통해 땅 끝까지 선교의 사명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을 받은 자는 언제 어디에 있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언은 일반적으로 당사자가 평생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항을 자진해서 하게 되는데 본문에선 거꾸로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 곧 자기들의 질문에 대답한 후 바로 승천하리라고 짐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사건 모두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그 말은 제자들도 평생을 두고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것, 즉 예수님께 가장 듣고 싶었던 것을 질문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제 이스라엘을 회복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부활이 육신적으로도 너무나 완벽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됩니다. 제자들로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수많은 이적을 보이고 마지막으로 자신마저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이라면 로마 제국을 쳐부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루 빨리 로마를 물리치자고 재촉한 셈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적 부활을 하지 않고 환각, 헛깨비, 영적인 존재였다면 이런 재촉이 쉽게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답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기한에 두셨다”였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지 않을 것이라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때만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성급한 기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이스라엘은 세계 곳곳으로 산산히 흩어졌고 로마 제국은 그 수백 년 후에 멸망했습니다. 또 약 1900년이나 흐른 후에야 고토(故土)에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당시의 제자나 그 후 인류 전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토적 회복의 시기조차 어림짐작 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신령했던 바울조차 예수님 재림의 시기를 잘못 기대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에 관심을 갖지 말고 대신 당신의 증인되는 삶을 살라고 한 것입니다. 역으로 당신의 증인된 삶만 살고 있으면 하나님의 일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다다릅니까? 예수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가 바로 자꾸 이 기한을 알고자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등한히 하고 말씀을 적게 보는 것이 일차적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면 누구라도 거룩하게 변화되어 이웃을 섬기고 전도에 열심을 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항상 눈앞에 있는 현실적 장애에 묶여 주저하거나 그럴 여유를 가지지 못합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는 하지만 당장 해결이 안 되니까 자꾸 언제쯤 응답이 될까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삿6:34) 겁쟁이 기드온에게 성령이 임하자 담대해졌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대적 미디안과의 전쟁에 지휘자로 선봉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림하기 직전에 기드온이 한 일이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찍어 불에 태웠습니다. 즉 우상을 없애야 성령이 강림하지 우상이 남아 있으면 강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때와 기한에는 관심을 갖지 말고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럼 기드온의 기록에 대입하면 때와 기한을 알려는 마음이 바로 신자의 우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믿는 것이 우상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의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한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에 염려를 없애려는 뜻입니다. 때를 알아 위로를 얻고 그 대비도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하려는데 어떻게 우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오늘 날의 신자도 평생을 두고 하나님께 꼭 물어보고 싶은 딱 한 가지 질문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내 형편은 언제쯤 풀립니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하면 암도 낫게 해주는 예수님을 이제 믿었으니 나와 내 집의 현실적 형통도 식은 죽 먹기처럼 지금 당장 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전도를 열심히 하면 내 형편이 급속히 풀릴 것이라 기대하는 자마저 있습니다. 로마가 무너지는데 수백 년, 이스라엘의 영토 회복에만 수천 년, 그런데도 여전히 주위 이슬람제국의 위협에 시달리므로 언제 현실적으로 완전히 회복될지 나아가 영적인 화복은 더 오리무중입니다. 신자의 현실적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자기 평생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현실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는 삶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 때에 오히려 더욱 온전한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삶에서 증거하는 것 오직 한 가지 길뿐입니다. 주님 안에서 먼저 그 인격과 존재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자기가 속한 모든 공동체를 참 사랑에 바탕을 둔 신령한 주님의 왕국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에게 강림케 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사역이 방해 받는 것은, 즉 신자가 담대해지지 못하는 것은 기도와 말씀의 부족 이전에 우리 속에 남은 마지막 우상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을 평생을 두고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에게 더 이상 다른 신은 결코 없습니다. 거룩하게 변화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하는 소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만 때를 알아 조금이라도 염려를 줄이고 스스로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우상을 없애지 않는 한 성령을 받고도 결코 담대해지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기한을 몰라 여전히 불안한데 담대해지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또 우리 속에 좌정하신 성령님은 그런 우리를 두고 탄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겁쟁이 기드온에서 위대한 용사 기드온으로 아직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우리를 보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 딱 한마디의 당부가 지금 당신의 삶과 평생을 좌우하고 있습니까?
4/1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