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백성 위로하소서!

조회 수 415 추천 수 17 2009.09.21 00:34:23
내 백성 위로하소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는 천재 성악도

한 천재 여자 성악도를 가르친 교수가 음표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부르는 것을 보고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나 네게 딱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생활에서 실제로 겪은 것으로 너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해. 그 때 비로소 네 노래에 남이 귀를 기울일 것이야"라고 했다.

음악적 기능으로는 완벽하지만 노래에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았기에 청중이 듣기에 참 잘 부른다고 느낄지 몰라도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목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감동 받을 정도로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러려면 실제 삶에서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 겪어 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지휘자 말콤 싸젠트 경은 세계적 명성을 얻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에 자신은 결핵을 앓고 있었고 또 자신의 딸은 열세 살부터 앓아 온 소아마비로 위급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헨델의 메시야를 지휘하려는데 쪽지에 "딸의 임종이 다가 오고 있음"이라는 긴급한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을 두고 연주회를 취소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위로하소서. 내 백성 위로하소서’라는 제목의 곡과 ‘할렐루야 찬양’의 대합창을 눈물을 흘리며 지휘했다. 두 말할 것 없이 청중들은 그날 저녁 그 때까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색다른 감동의 메시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신자가 환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첫 걸음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그 환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인가? 아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에게나 언제나 온갖 형태의 고난을 다 겪게 마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담의 원죄로 인간 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부패되고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3:17-19)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그 영혼이 부패되어 하나님과 소통이 단절된 죄인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자연을 다스려야 함에도 인간끼리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치고받기만 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싸움을 절대 그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어떤 인생도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고달픔이 끊임없이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켜 주시기 전까지는 그렇다.

신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는 환난을 없애 달라는 데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환난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대처할 것인가 또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는데 먼저 동원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용하시는 뜻은?

그럼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용하시는 뜻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대로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다. 고난당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인 것이 그것을 통해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된다.(시119:71) 또 신자가 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데 그 분은 신자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 같이 만드시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욥23:10) 신자의 환경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그 분의 목적이 아니라 신자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그 분의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그 분의 참 아들이 아니라 사생자와 같다고 한다.(히12:8)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은 인생에 그 보다 더한 시련이 없을 정도의 고난을 다 겪은 자들이다. 하나님과 생명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위태로운 고비를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러나 세상의 위인들도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개인적인 불행을 겪지 않은 자 거의 없다. 아무 고난 없이 순탄하게 자란 자가 큰 업적을 남기는 경우란 정말 드물다. 불신자들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로 알고 환난과 시련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의지와 끈기로 어떤 어려움에라도 도전하는 자 성공한다고 가르친다.  그들도 환난을 겪으면서 그 인격과 성품이 더욱 성숙해지고 강건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환난을 허락하시는 뜻마저 만약 신자의 믿음이 더 굳어지고 성숙된 인격으로 변하는 것이 전부라면 불신자들에 비해 크게 차이가 없지 않는가?  (실제로는 이것도 제대로 알거나 실천하지 못하는 신자가 대부분이지만…) 아니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환난이니까 아무 불평불만 없이 그저 견뎌내기만 해야 하는가?

신자란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은 자다. 예수님처럼 갈릴리 이방 땅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단순히 기독교 복음을 교리적으로 전해라는 것이 아니다. 참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려 내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장점, 능력, 지식, 경험으로 남을 도우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신자는 절대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 당신의 선으로만 남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좋은 점들이 불신자에게는 환난을 이기고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수단이 되지만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을 전달하는 유익한 통로가 될 뿐이다. 나아가 신자의 연약하고 어리석은 결점을 비롯해 일어나는 모든 일들마저도  그렇게 쓰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신자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도 같은 뜻이다. 그 고난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과부만이 과부의 아픔을 안다. 휠체어 핸디캡만이 핸디캡의 불편을 이해한다. 인간의 죄악과 고난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것을 체휼하신 구세주 예수님만이 감당해 줄 수 있다. 싸젠트 경의 경우에도 사랑하는 딸의 죽음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아픔을 겪으면서 지휘했을 때에 ‘내 백성 위로하소서’라는 가사가 바로 자신의 소원이 되었으며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때에 그 소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졌다. 또 그의 환난을 통해 하나님은 그가 지휘한 음악을 듣는 모든 청중에게 동일한 소원과 위로로 채워주었지 않는가?  

여호와 궁정의 하루

그럼에도 환난을 대하는 우리 믿음의 수준은 솔직히 어느 정도인가?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환난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 바라지 않는가? 기도 열심히 하면 그 기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짧아지게 할 수 있다는 착각과 기대 속에 파묻혀서 말이다.  아니면 환난이 당장 해결 안 될 수도 있고 나는 모르지만(사실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있을 거야. 반드시 나중에는 합력해서 선으로 이뤄주실 꺼야 하고 곰처럼 미련하게 참기만 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 말씀대로 하자면 오히려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똑 같은 환난을 겪고 있는 자들을 내게 부쳐 주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맞지 않는가?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물론 꼭 일부러 그렇게 기도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겪는 이 환난이  나만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분명히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언젠가 하나님이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만나게 해 주실 때에 그사람에게는 어떤 누구보다도 바로 나의 도움과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것이므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섬겨야 한다.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고백했다.  (시84:10) 환난 가운데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어서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 하는 성도간의 섬김이 세상 사람의 교제보다 너무나 아름답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자기가 먹고 쓰고 남은 여유로 남을 도와주는데 그친다. 성도 간의 교제는 다르다. 서로 모자란 가운데 도운다. 전혀 가진 것 없는 자가 오히려 많이 가진 자를 위로 한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남을 돕고 위로한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풍성해 서로 나누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신자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다면 환난 중에 주시는 당신의 넘치는 위로를 반드시 체험할 수 있다. 그 위로는 단순히 교리나 말씀에 드러난 객관적 진리로 전해지는 립서비스(lip service)가 아니다. 삶 속에서 신자의 육신과 정신과 영혼 위에 한량없이 부어주시는 생생한 산 체험이다. 환난이 해결된 후에야 내쉬는 안도의 위로가 아니다. 환난 중에도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는 그 분의 그분다우심을 확인하여 신자의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게 채워지는 위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은 환난 중에 신자의 삶과 인생 속에 실제적으로 성육신화 된다. 그 분의 은혜는 그 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실제 살아 역사하는 참 생명이 된다. 그래서 신자 주위의 더 불쌍한 자들에게도 그 따뜻함과 풍성함을 충분히 느끼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능력이 환난 중에 있는 신자를 통해 다른 자에게 전해져서  그들을 위로하며 그 삶과 존재를 바꾸어 준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의 환난이 줄줄이 엮어져 고리처럼 되면 그 분의 위로도 그 고리를 타고 어떤 제한이나 장애 없이 번져 나간다. 마치 서 말 가루 속에 들어간 누룩이 그 가루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마13;33) 천국은 이 땅에 신자의 환난을 통해 확장된다.

살아 있는 체험이 실리지 않은 노래는 아무리 천재 성악도가 불러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교리라는 매뉴얼을 통해 선한 행동을 하고 인격을 고양하는 기능적인 믿음 또한 죽은 믿음이다. 나아가 신령한 문제에는 절대 천재가 없다. 하나님은 어떤 신령한 자라도 오직 고난을 통해 당신의 율례를 배우게 하고 정금 같이 단련시키신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신자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고난을 겪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만은 이 땅에 단 하루를 살아도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살려 내는  참으로 복된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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