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4:5-9) 신자가 평생토록 행해야할 한가지 일
요나서 강해 (10)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욘4:5-9)
엄청난 요나의 고집
니느웨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하나님이 용서해주었는데 요나는 그것이 너무 싫고 화가 나서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소원했습니다. 악독한 이스라엘의 원수는 반드시 심판해야지 용서해주어선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만의 절대적 주권사항이므로 아무리 당신의 충성된 종이라도 왈가왈부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화를 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야단치셨습니다. 그 후에 박 넝쿨을 하루 만에 무성하게 했다가 다시 시들게 함으로써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살고 죽음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전혀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에게 또다시 박 넝쿨을 핑계 삼아 화를 내며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또다시 화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꾸짖었는데 그래도 요나는 자기가 옳다고 말대꾸까지 했습니다(9절). 요나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견고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본문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장소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니느웨가 회개하도록 40일 간의 유예기간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성읍 모든 백성이 진심으로 회개하며 악에서 떠난 모습을 보자 계획했던 재앙을 취소했는데 성경은 그 후에 요나가 싫어하고 성을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욘4:1)
그럼 요나는 지난 사십일 내내 입술로는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이 임한다고 외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제발 이들이 회개하지 말고 심판받으라고 빌면서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는 달리 니느웨가 첫날부터 회개하자 크게 놀라며 혹시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쩌다 일부만 회개했겠지, 이러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겠지 기대해보았으나 왕도 조서를 내리며 동참했고 온 백성이 정말로 악에서 떠났습니다. 사십 일의 작정 기간이 다가올수록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심판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이렇게 되도록 다 계획하고 주관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하는 최고 매국노 역할에 하필이면 자기가 뽑혀서 쓰임 받고 있다고 여겨지니 크게 원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결국 41일째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께 화를 내었고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성이 잘 보이도록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없는 평지에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뜨거운 햇빛에 노출되고 땅에선 더운 기운이 올라오므로 더위를 피하려고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소돔 때처럼 어서 빨리 유황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 종일 니느웨를 분노와 증오에 가득차서 노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니느웨는 이스라엘에게 나치 제국이며 우리에겐 나라를 빼앗은 일본인데 그들의 멸망을 바라지 않을 이스라엘이나 한국 백성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그런 요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시스로 도망가는 그를 살려주었고 지금도 당신께 두 번이나 화를 내며 대들어도 말로만 야단쳤습니다.
하나님은 또 그에게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주려고 박 넝쿨을 하루 만에 무성하게 자라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늘이 만들어질 만큼 잎이 무성하려면 한두 달은 걸려야 합니다. 뜨거운 한낮이 되기 전까지 몇 시간 만에 그렇게 되었으니 줄기가 쑥쑥 자라고 잎이 열리는 것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고래를 보내어 구해주었듯이 지금 나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이런 기적을 베풀고 있다고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기적적인 은혜를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시원한 하루가 지난 다음날 새벽에 하나님은 넝쿨을 마르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벌레가 무성한 잎을 다 먹어치우려면 수십 마리가 동원되어야 하는데 이 또한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또 박 넝쿨이 마르자 바로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불어 일으켰습니다. 중동지역의 열풍은 밤에도 한낮의 더위가 지속되고 낮에는 습기가 다 말라버려 피부가 당겨질 정도라고 합니다. 요나가 지은 초막만으로는 이틀째의 무더위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습니다. 계속 더 버티고 있다간 혹시라도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해도 요나는 보지도 못하고 일사병에 걸려 먼저 죽을 것입니다.
그럼 요나로선 하나님이 그렇게 순식간에 넝쿨을 나게 했다가 다시 또 순식간에 마르게 한 뜻이 과연 무엇일까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새겨봐야 하는데도 화를 내고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덤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요나더러 니느웨를 지켜보는 것은 하루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네가 아무리 싫고 화가 나도 니느웨는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떠났으니까 결코 심판하지 않을 것이므로 장막을 걷으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니느웨에 대한 모든 미련과 분노와 증오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라.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고 경고했습니다. 분노에 휩싸이면 이성이 합리적으로 작동되지 않고 사리분별과 판단이 자기 기분에 따라 왜곡되어 죄를 짓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가 바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달력은 해가 지면 새로운 날이 시작됩니다. 요나는 하루가 지나자마자 하나님께 화를 내었습니다. 그 전에 사십일이나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있었으니 시쳇말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져 하나님에게마저 불경한 짓을 대놓고 행한 것입니다.
요나는 오직 하나님이 어서 빨리 몽땅 불태워서 제 2의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어달라고 하루 종일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소돔의 심판 때에 같은 하나님의 종이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에 대한 심판을 확정해놓고 아브라함에게 먼저 알려주려고 세 천사를 보냈습니다.(창18:17-19)
그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곳에도 의인이 오십 명은 있을 텐데 심판해버리면 부당하지 않느냐고 따졌고 천사는 그렇다면 심판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곰곰이 소돔의 상황을 생각해보니 의인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십 명에서, 사십 오명, 삼심 명으로 낮추다가 결국 열 명까지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선 어떻게든 심판을 취소시켜보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것이었습니다.
고대에선 열 명이면 한 가구 숫자 밖에 안 됩니다. 아브라함으로선 최악의 경우에 조카 롯 가족이라도 구출시켜보려는 눈물겨운 시도였습니다. 당시 롯 부부와 두 딸뿐이었지만 각기 몸종들이 있었으니 롯의 식솔은 열 명은 충분히 되었습니다. 천사들은 열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 심판 했으니 소돔에는 의인이 열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 롯 가족은 물론 롯도 전혀 의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세 천사에게 소돔의 남자들이 남색을 행하려들자 롯은 시집가지 않은 자기 두 딸을 대신 내어주려 했습니다. 롯도 소돔의 죄악에 많이 물이든 것입니다. 결국 소돔은 정말로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어서 심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알려준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평소에 소돔에서 악에 물들어가는 조카 롯을 돌보지 않았던 잘못을 깨닫게 해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방 앞에 복의 근원이 되라는 소명을 주었는데도 아무리 소돔이라도 그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전혀 전하지 않았고, 최소한 그들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않았던 잘못도 가르쳐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믿음으로 잘 가르쳐서 정말로 여호와만을 사랑하는 헌신된 종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세 천사와 밀고 당기기를 했던 순서와는 거꾸로 롯을 통해서 소돔 성에도 의인이 열 명에서 삼십 명, 삼십오 명, 사십 명, 오십 명으로 늘어났을 것입니다. 최소한 자기 가족만이라도 여호와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 소돔은 그 의인 열 명을 통해서 심판을 면했을 것이며 나아가 오십 명으로 인해 사악한 사탄의 도성 소돔이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마저 소돔에 미련을 떨치지 못했으니 소돔이 멸망에서 구출 받지 못한 일차 원인은 롯이었고 더 궁극적인 원인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니느웨의 심판을 요나에게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시기가 무더운 여름이 틀림없습니다. 요나가 성읍을 걸어서 사십 일간 메시지를 전하는 동안 친절하게 물과 음식을 나눠준 니느웨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눠보면 이스라엘에 호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십 일간 그들 모두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증오심에 불탄 요나는 그 모든 것을 시커먼 색안경을 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게만 사십일의 회개 기간을 준 것이 아닙니다. 요나더러도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라고, 최소한 소돔 때에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니느웨를 용서해주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의인들까지 몽땅 심판하는 것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따지고 들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기 분노에 스스로 넘어져 사탄에게 틈을 내어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종이 되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있는 꼴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할 이유
예수님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이유를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세상에선 원수를 갚는 것은 의로운 일로 칭송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원수를 갚는 자는 최고의 영웅이 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선 나라의 원수를 갚는 일이 사실은 최고의 죄악이 됩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만이 주관하는 생명을 인간이 없애려 했거나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몫인데 인간이 앞장서서 그 일을 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는데 일등공신인 이등박문은 한국의 원수이며 그를 할빈에서 암살한 안중근의사는 한국의 국민적 영웅입니다. 반대로 따지면 일본 국민에겐 명치유신을 일으켜서 일본을 세계의 강국으로 도약시킨 이등박문은 영웅이며 그를 죽인 안중근은 원수가 됩니다. 그럼 어느 쪽의 판단이 옳은 것입니까? 둘 다 옳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각각 그 나라에서 그 나라 국민에게만 옳습니다.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 빠진 인간사회의 윤리 기준은 이처럼 부분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침략한 악을 먼저 범해 원인 제공을 한 것이며 안중근 의사는 약소국으로서 최선의 저항을 한 것이니 일률적으로 비교해선 안 된다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과거 역사에서 가장 되돌아가고 싶은 때가 언제인지 물어보면 거의 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드넓은 만주 벌판 전부 우리 영토였기 때문인데 고구려도 일본처럼 그 지역을 침략하여 차지한 것 아닙니까? 광개토대왕은 만주 사람들에겐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이스라엘도 따지고 보면 가나안 땅을 침공해서 차지했고 미국도 인디언들과 흑인들에게 너무나 엄청난 잘못을 범했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이 일본과 중국 사람보다 더 선한 것도 그들이 한국 사람보다 더 악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드니까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선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되었을 뿐입니다. 자기만이 유일한 선입니다. 그래서 만물 가운데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젠 윤리가 상대적이다 못해 완전히 왜곡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명하면서 만약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먹지 않으면 그분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의 기준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을 배제하고 따먹으면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 결정 집행하는 자가 되어서 상대적이고 왜곡된 선만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선악과를 따먹자 아담과 이브는 서로 평생을 사랑해도 모자랄 부부사이인데도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퉜습니다. 그 아들 가인은 하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아무 잘못한 일 없는 친 동생을 죽였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한탄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살인자나 강도 같은 흉악범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무조건 자기가 최고이자 선이라고 고집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악이 파생된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원수라곤 하나도 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가 되어서 서로 도왔던 적이 딱 한번 있었습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싫고 귀찮으니 그분을 없애버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본성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내 마음에 들어야 하나님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절대 모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 죄가 가장 크게 확장된 것이 인간끼리 원수가 되어서 서로 증오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 증오가 다른 나라와 민족으로 향하면 전쟁입니다. 그러면 타국을 침략한 광개토대왕, 이등박문, 히틀러 등이 자기들 나라에선 최고의 영웅이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종으로 그분의 뜻이 비록 자기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드시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루를 시원케 해줄 때는 아주 기뻐하다가 박 넝쿨이 시들자 금방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할 때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감사하지만 자기에게 불리하고 귀찮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싫어하고 원망했습니다. 분노에 휩싸이자 믿음도 이성도 아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일시적으로 가인처럼 자기 개인에겐 잘못을 범하지 않은 니느웨 백성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었고, 하나님도 틀렸으니 필요 없다고 바벨탑을 쌓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는데 그분의 종은 원수를 갚는데 자기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박 넝쿨이 순식간에 무성했다가 다시 벌레가 파먹어 순식간에 시들어죽은 것 두 번 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기적이란 자연계가 차질 없이 잘 운행되도록 당신께서 심어 놓은 규칙과 체계를 당신께서 스스로 깨트린 것입니다. 요나서의 열 개 가량 되는 우연의 일치를 통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요나에게 생명을 연장해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만큼 당신께서 요나를 사랑한다는 증거이자 당신의 종에게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보여주신 계시였습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요나를 계속 살려주어야만 지금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고 재앙을 거두는 일에도 합당한 명분이 섭니다. 공의로만 따져도 당신에겐 전혀 하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박 넝쿨은 니느웨와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거기다 요나가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선을 제공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선을 받았고 그 선이 없어졌으면 원상복귀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가한 악한 세력에게 정의를 세우려고 항거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을 먼저 받았음에도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그것도 내가 죽어야할 만큼 나빴다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아무 말도 못하는 한갓 식물을 구실 삼아서 말입니다.
본문의 박 넝쿨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두 가지 점에서 예표합니다. 첫째 도무지 자격도 없는 요나에게 하나님이 끝까지 긍휼을 보이시고 나아가 선까지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을 받을 자격은 우리 모두에게 없었습니다. 그 은혜는 생전 처음 체험해보는 세상에 없는 하늘나라의 선이었습니다.
둘째로 요나는 박 넝쿨로 시원해지자 아주 기뻐하다가 시들어버리자 화를 내며 하나님께 죽어도 좋다고 덤벼들었습니다. 요나의 후손들도 예수님이 처음에 많은 이적을 베풀자 열광하다가 로마를 무찔러주지 않는다고 싫어하다 못해 저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무고한 피를 자기들에게 돌리라고 즉, 자기들은 죽어도 좋다고 대들며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도 결국 모든 인간에게 예수 십자가 사랑이 없으면 도무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나와 똑같은 신자들
지금 요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전부 자기가 잘해서 그런 줄 압니다. 아주 드물게 하나님께 감사하긴 해도 까마득 잊고 있다가 한참 후에 그와 비슷한 일이 또 생겨야 겨우 그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조금만 고난이 닥치면 금방 하나님께 의심 원망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그 고난의 대부분이 사실은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거나 계획을 불완전하게 세웠거나 요나처럼 과도한 욕심과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탓인데도 말입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선악의 판단 기준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하나뿐입니다. 거기다 자기감정이 좋은지 나쁜지가 더 우선적 잣대가 됩니다. 아니 제대로 분별 판단하지도 않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얕은 생각이나 욱하고 치미는 기분에 따라서 행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이라도 자기 기분에 들지 않으면 싫고 귀찮아집니다. 단적인 예로 하나님의 계명에 의롭지 않은 것 하나도 없음에도 그 일이 신이 나서 기쁘게 충성하려는 신자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실현하는 일은 뒷전이고 교회에서 충성하는 것으로 대충 때우고 그저 자신의 안락과 형통만 뜨겁게 기도해 얻어내려 합니다.
아주 완악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범하는 불신자를 볼 때에 어떤 생각이듭니까? 당장 감옥에 처넣고 큰 벌을 주어서 뜯어 고치거나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도록 해야 한다고 여겨집니까? 그것은 세상 윤리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조차 예사로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의 지푸라기만 집어내는 큰 죄입니다. 불신자들을, 심지어 원수를 볼 때 하나님을 몰라서 아직도 저런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니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참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어느 누구도 선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을 공급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마저 수시로 예수님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려 죄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서로 돕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즉, 인간에게 가능성이 없으니까 재앙을 내리지 않고 구원을 주는 방향으로만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인간 사회를 향한 뜻이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라면 주의 종도 그래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심판하려는 징조가 보이면 도시락 싸들고 따라다니며 말려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언뜻 그렇게 보이는데 신자들은 요나처럼 행해선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더러 당신이 구원과 심판에 관여하라고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은혜, 긍휼. 구원과 그 반대로 징계, 형벌, 재앙, 심판을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끼리는 서로 사랑할 의무와 책임만 있습니다. 주의 종은 아니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 거하는 모든 신자는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평생을 두고 올인(all in)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서로 진실로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시간이 모자랍니다.
작금 세상이 죄악으로 너무 타락해져 가니까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온갖 고난에 처하자 그런 자들이 더 늘어났는데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이 곧바로 다시 오시면 불신자들 모두를 심판해야 하는데 신자가 본문의 요나처럼 그들을 어서 빨리 죽여 달라고 간구하는 셈입니다.
신자가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까닭은 예수 믿는 복을 주변에 나누는 일에 일생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우리부터 불신자 아니 소돔과 니느웨 못지않은 천하 죄인의 괴수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재림을 재촉하면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신자의 사명은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최대한 재림을 지연시키는 것입니다.
원수란 항상 나보다 힘이 더 세고 형통한 자입니다. 나보다 약한 자가 원수가 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노력하여 원수 갚을 실력이 되어서 찾아갔는데 막상 그 원수가 이미 완전히 망해서 아무 힘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를 심판했거나 스스로의 죄로 망한 것입니다. 그럼 그 원수가 오히려 불쌍해지거나 원수 갚는 일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뜻입니까? 겉으로는 정의를 세운다고 외치지만 속으로는 그들은 형통하는 대신에 나는 고생하고 궁핍했던 것이 너무 싫고 화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나도 저 원수들처럼 형통하여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광개토대왕처럼 반드시 나도 남에게 원수가 되어야만 한다는 진리를 전혀 모릅니다.
한 두어 달 전에 이곳의 일본 NHK 국제방송에 흥미 있는 스토리를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이 해방되자 일본인들은 남아 있다간 큰 곤욕을 치를지 모르므로 황급히 일본으로 철수했습니다. 한 일본 소년이 그 난리 통에 부모와 떨어져 혼자 한국에 남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연락할 길도 일본으로 돌아갈 길도 사라졌습니다. 자기 아이도 이미 셋이나 있는 한국인 젊은 과부가 그를 자기 친자식처럼 키워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에게 깨우쳐주고 싶은 가르침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벨탑 사건 때처럼 모든 나라가 역사상 두 번째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끼리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설령 그런다쳐도 또 다른 더 큰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신자들부터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아브라함처럼 소돔을 위해, 최소한 내 개인의 원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중보기도를 행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 모두의 신앙을 솔직하게 점검해보길 원합니다. 불신 세상에 주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거의 모두의 대답이 ‘아니요’일 것입니다. 원수까지는 몰라도 악행을 일삼는 불신자들을 정말로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대답은 ‘아니요’일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자기 공로이고 나쁜 일은 하나님이 뭔가 잘못 내지 실수한 것 같은 생각이듭니까? 이번에는 틀림없이 ‘예’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외에 우리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11/29/2020)
니느웨와 스스로가 쌓은 산넘어 산인 요나를 오래 참으시며 끝까지 선으로 인도하여 이루시는 하나님과 현재 저들 보다 더한 어리석음과 완악함으로 점철된 저역시도 당신을 몇번이건 거역해도 제한없이 늘 인내와 긍휼로써 대하시며 깨우쳐 주시어 제 있을 자리로 돌려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어찌 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제게 있는지요.. 이 은혜를 어찌 감당해야 할지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를 이 은혜 가운데 부르신 것에 그저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에 주님 잘 좇을 수 있도록 성령님 저를 도와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