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7)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입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나눠 주어야 채워집니다. 본문에도 그런 역설 하나와 역설적 비유가 하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시험(Trial-연단)을 만나면 염려하는 것이 정상인데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또 그런 시련을 이왕에 비유하려면 그 대상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물건이어야 정상적인 문맥의 흐름인데도 그 반대입니다.
비유의 대상이 된 금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있음에도 저자 베드로가 간단하게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우선 고대 세계에서 금은 항상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그 금은 반드시 불이라는 연단을 통해야만 정제되어 순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꾸 불에 태우면 결국은 없어지며 또 세월이 무궁이 흐르면 금도 썩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시련을 거쳐도 절대 없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빛이 나기 때문에 시련을 만나도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금의 비유에서 보듯이 세상에서 귀하고 값진 것이 되려면 반드시 불 같이 최고로 견디기 힘든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완전히 순수(pure) 해져야 합니다. 순수하면 자연적으로 찬란한 빛이 나게 됩니다. 또 그런 최고의 연단을 끝까지 견디어 내는 것은 극소수이므로 그 희소성 때문에 당연히 큰 가치가 부여됩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 되어 모든 이의 눈에 띄므로 더욱 광채가 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신자에게 시련을 허락하는 이유는 정금 같이 순수한 믿음을 갖게 해서 세상에 찬란한 빛으로 비취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신자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가 금의 정제 비유에서 한 가지 빠트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금이란 비록 큰 바위나, 철이나,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더라도 원래부터 금이었습니다. 불로 연단하는 것은 금에 섞여 있는 다른 불순물만 제거한 것입니다. 금에다 다른 것을 첨가해서 금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가 항상 믿음의 시련 뒤에는 꼭 하나님의 큰 상급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까닭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신앙을 복을 받는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이 마치 담배나 알코올 중독처럼 아예 몸과 영혼 속에 철저하게 인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택하여 믿음의 시련 과정을 거치게 하는 뜻은 다른 것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했던 그런 완벽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며 유일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분을 배반한 후에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한 것들과 뒤섞여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여 다시 당신께서 심히 기뻐하는 존재, 참 인간으로 되돌리는 작업이 바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그 불순물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완악한 마음이 첫째였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 나가서 제 멋대로 살면서 저지른 온갖 더러운 죄들이 둘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을 찾게 했고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심지어 앞으로 지을 죄까지 십자가에 못 박고 깨끗케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비록 때때로 죄에 쓰러지기도 하지만 다시는 하나님을 몰랐던 옛날로 돌아가지 않으며 고의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노력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정제 과정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의 속에는 끝까지 정제 받기를 거부하는 지독한 불순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 뜨거운 불에서 불순물은 다 제거되고 결국에는 순수한 금만 남는 이유는 불에서 녹는 온도가 금이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다른 불순물들은 그만큼의 고열에 견디지 못합니다.
믿음의 시련도 같은 원리입니다. 시련을 통해 다른 불순물이 다 제거되고 끝에는 순수한 믿음만이 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믿음보다 더 시련에 잘 버티는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신자의 몸과 영혼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인입니다. 끝까지 참아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대박 같은 은혜를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에서 부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입니다. 신자가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변했다고 칭찬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비유컨대 금이 24K Pure Gold로 바뀌니까 스스로 빛이 나게 된 것입니다. 신자도 모든 불순물이 제거되어 원래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창조하셨던 그 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상급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범죄하기 전 태초의 아담의 모습이 되어 생명나무가 옮기워진 하늘의 에덴 동산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시련 가운데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그런 참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이외로 간단합니다. 내 속에 박혀 있는 인, 복 받으려는 기대를 스스로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자가 내 생명보다 낫다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을 사모하지 그분이 주실 현실의 복락을 손꼽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위인들을 보십시오. 한결 같이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 당신을 소원한 자들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 신앙의 목표를 예수님과 닮아가는 것으로 하지 않고 주위의 믿음이 좋다는 사람 정도에 견주고 있지는 않는가요? 아니면 여전히 불순물이 많이 남은 사람들 속에 같이 파묻혀서 자신의 불순물도 감추어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단순히 시련만 안 생기거나 없어지면 마치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양 크게 기뻐하지는 않는가요?
최후의 금빛 면류관을 차지하는 자는 극소수입니다. 믿음의 시련 자체를 기쁨으로 감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삶의 목표로 바뀐 자입니다. 오직 그런 자만이 불 같은 시련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1/6/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