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1-4)
흔히들 예수를 믿되 성숙되지 못한 신자들의 특징을 윤리적, 종교적 두 기준으로만 구분 짓습니다. 즉 세상적 방식으로 돈을 벌며 여전히 여러 가지 죄를 범하고 술 담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신자, 혹은 주일 성수만 겨우 하고 성경 지식이 빈약하고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신자를 두고 아직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했고 그 반대를 성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분을 성령에 속한 자와 육에 속한 자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도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지 않은 불신자는 육에 속한 것입니다.(고전2:11-16) 그런데 성령에 속한 자 중에서도 육신에 속한 자가 있는데 그런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다고 합니다. 즉 예수를 믿어 구원은 얻었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육에는 물론이고 육신에도 속하지 않아야 성숙된 신자가 됩니다. 따라서 먼저 육과 육신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육에 속한 자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해 여전히 원죄 하에 있는 자, 즉 태어난 자연 그대로의 상태에 있는 사람(natural man)이란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알고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할 수 있기에 이제는 더 이상 육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으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르지 않고 아직도 이전의 자아(flesh)에 의해 좌우되는 자는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자신의 지정의 판단만으로 행동하는 자가 육신에 속한 자가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지정의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 사는 자는 성숙한 신자, 바울의 표현으로는 신령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모두(당연히 목사도 포함)는 완전히 신령한 자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더 이상 육에는 속하지 않지만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신앙의 싸움은 어떻게 하면 육신(옛 자아)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에만 따를 수 있느냐 입니다. 간단히 말해 성령을 따르면 육신을 버려야 하고 육신을 따르면 성령의 역사가 따르지 않습니다.(갈5:16,17)
본문에서 육신을 따르는 가장 큰 특징을 바울 사도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훈련과 연습을 등한히 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사람을 따라 행함으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자라고 합니다.(3절) 그런 자를 개역성경은 마치 “사람이 아니리요?” 즉 인간이 아닌 동물로 오인하게끔 번역되어 있지만, 사람을 좇아 행하니 어찌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아주 강조한 표현입니다.
아주 강조한 것은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란 바로 사람을 좇아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장의 끝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21절)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바울은 만물이 다 너희 것인 줄 모르면 사람을 자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놀랍고도 주목해야할 지적입니다.
이 결론을 본문과 연결해서 다시 정리해 봅시다. 아직 육신을 좇아 행하는 자는 성숙되지 못한 신자인데 그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따라 나뉘는데 그 이유는 만물이 이미 자기의 것이 된지 모르기 때문이며 그래서 사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또 역으로 바꿔 봅시다. 만물이 이미 자기의 것이 된 것을 확신하는 자는 사람을 따라 나뉘지 아니하며 바로 그것이 성숙된 신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결코 사람을 자랑하지 않는다가 됩니다. 성경이 참으로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기독교 신앙의 너무나도 기초적인 상식에 불과합니다. 특별하게 심오하거나 몰랐던 내용이 아닙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의 것이기도 합니다. 법적 경제적 소유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의 궁극적인 주관자이기에 신자는 만물의 관리를 대신 책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범사는 신자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역사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자는 오직 신자입니다. 나아가 현실적으로도 신자가 그런 소명 위에 견고하게 서서 이 땅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갈 때에는 하나님이 전혀 부족하지 않게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이런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재화를 하나님의 선물이자 청지기적 소명을 실현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기에 오직 법적 경제적 소유권의 다툼으로만 몰아갑니다. 그저 만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므로 분쟁이 끊어질 수 없습니다. 당연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이 많이 차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눈치를 보고 강한 자는 약한 자들 위에 군림하려 합니다. 그들의 지정의는 하나님의 반대편인 사람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동원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기 전, 육에 속했을 때의 바로 우리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제는 성령에 속했기에 그 정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의 지정의는 이전 습관에 젖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육에 속하지는 않았는데도 육에 속한 자처럼 행동하며 바로 그것이 육신에 속한. 즉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모습의 실체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자랑하려는 태도입니다. 아직 만물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에 흔들림이 없다면, 구태여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힘에 의존하고 사람 앞에 자랑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는 범사에 오직 하나님 당신의 영광만이 드러나길 소원하고 또 자신은 단지 그 일에 쓰임 받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자 행복과 만족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선 도덕적, 종교적으로 미숙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하다고 비난 받습니다. 물론 믿음이 성숙되면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성숙하게 되어 그런 부분에 큰 허물을 드러내지 않게 되기에 그런 자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를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하는 행위 뿐 아니라, 오직 그런 기준으로 신령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겠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은 믿음이 성숙되지 못한 더 큰 증거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와 말씀과 봉사와 헌금에 능한 자들이 대우 받고 교회 안에서 행세하더라도 진실 된 믿음이 그 바탕이 되어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도덕적 종교적인 잘잘못으로만 영적 성숙도의 기준으로 삼아 남을 비판하면 자연히 자기들은 그 반대로 성숙하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 역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은 것이 진짜 속마음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 안에 야기된 분쟁을 탓할 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바울, 아볼로, 게바 등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스승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랑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의 종교적, 영적 실력도 다른 파에 비해 낫다는 것을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는 모두 스스로 신앙이, 사실은 도덕적 종교적 실력에 불과하지만, 좋다고 자부하는 자들이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서로 자기들의 신앙이 우월하다고 다투고 자랑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들을 두고 육신에 속해 젖이나 먹어야할 가장 어린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통렬한 지적이자 반전입니까? 성경을 잘 안다고 자랑하는 자를 두고 하나님은 성경을 가장 모르는 자라고 한 셈입니다.
기도와 말씀에 능하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신령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자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기에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것이 영적으로 성숙한 증거입니다. 신령한 신자가 되려면 자신은 매일 십자가에 매다는 대신 다른 사람은 십자가에 드러난 주님의 긍휼로만 판단하고 사랑하는 길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쉽게 말해 최소한 다른 이를 도덕적 종교적 잣대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당연히 육에 속한 자는 아니겠지만 아직도 육신에 속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신령한 자가 되어 있습니까? 물론 어느 누구도 생전에 완전히 신령한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의 구별은 정확히 할 줄 알아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덕적 종교적인 실력을 키우면 신령해지는 줄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5/11/2006
아침에 출근하면 먼저 목사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은혜받고 하루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저는 육신에 속한 자 인것이 확실한데, 한편으로는 제 신앙이 우월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이 빨리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물론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겸손이 동반될 것이기 때문에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신앙이 성숙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인 것, 목사님께서는 이해해 주시겠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