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요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除) 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창14:21-24)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온 지 9년 후 그의 나이 84세 때에 가나안 주위 9개국 간에 일종의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엘람 왕에 대해 조공을 거부한 소돔을 포함한 반역군 5개국 연합국이 오히려 패하고 그 바람에 아브람의 조카 롯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팔십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습니다.”(창14:14-16)
그러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감사의 표시로 사람은 내게 보내고 탈환한 모든 재물은 가지라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나중에 혹시라도 이 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싫으니, 즉 재물보다는 오직 조카 롯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도와주었고 이제 그 목적이 성취되었으니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그 전에 아브람은 오히려 탈취한 재물 중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참으로 의롭고 재물에는 연연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으로 칭송됩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는 반쪽의 성공인 것 같습니다. 성경의 앞뒤를 연결해서 엄밀히 따져 보면 도리어 실패에 가까운 것입니다.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 중에서도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히 의도하신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브람이 그 뜻을 충분히 알지 못했거나 실현하지 못했다면 아무리 그가 의로운 일을 했더라도 사실은 실패가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물자가 풍족한 곳이었습니다. 소돔 왕으로선 재물에 크게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참에 아브람에게 한번 호의를 베풀어 놓으면 나중에 여러모로 유익하겠지”라는 마음을 먹었을 수 있습니다. 앞뒤 사정을 잘 아는 아브람으로선 그것을 미리 눈치 채고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소돔 왕에게 이용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서 멈추지 말았어야 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선 그가 해야 할 일이 또 남아 있었습니다. 소돔 왕으로선 아브람에게 아주 큰 신세를 지게 된 셈입니다. 거기다 그 신세를 보답도 못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람으로선 소돔에게 이제 역으로 큰 요구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돔 왕에게 여호와를 소개하여 그 땅에 관영한 죄악에 대해 경고를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다는 뜻입니다. 만약 전후 여러 사정이 그렇게 하는 것을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 죄악의 땅에서 조카 롯은 건져내어 왔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건 바로 다음에 주목할 만한 성경 기록이 이어집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역으로 말해 아브람이 아주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틀림없이 그가 싸워 재물을 탈환해 왔던 ‘시날’ 등 4개국 연합국이 복수하러 올까 굉장히 두려워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한 배경에 혹시라도 자기는 소돔과 연합하거나 협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조카를 구출하는 목적으로 그 싸움을 했다는 것을 그들 나라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람은 오직 조카 롯을 구출하고 보자는 마음뿐이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브람이 소수의 민병대(民兵隊)로 강대한 4개국 연합군을 패배시킨 것은 당시로선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이 창대케 되었습니다. 또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하여 이방 족속들 앞에서 여호와를 믿는 자가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드러나고 또 그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도 함께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롯에게 만은 그가 당한 고난이 죄악의 땅 소돔에 가서 기거한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음은 깨우쳐 주어야 했습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절대 우연이 없고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그런데 그 필연이 신자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만방에 증거 되는 목적이 더 우선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신자가 그런 일에 등한히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신자더러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위 여건을 변화시킵니다. 당신의 의와 권능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과 인물을 맞닥트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일부러 땅 끝까지 가서 힘든 일을 자청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당신 곁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마련해 줍니다. 롯은 아브람에게는 가나안 땅에 있는 유일한 친척이었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조카의 영적 상태에 대해 잊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라고 모든 상황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사건에서 인간 아브람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복의 근원, 즉 신자 아브람으로선 절반의 성공만 한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신자더러 무엇을 먹든 마시든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러기 이전에 당신께서 이미 그럴 수 있는 충분한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놓으십니다. 또 신자의 마음마저 신령하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신자가 정말 자신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면 그런 길이 보일 뿐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충분한 믿음과 담력과 능력마저 주십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는데 복이 흘러가지 않고 막혀 있는 것을 당신께서 두고 보실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그 복을 나눠주지 않고 혼자만 차지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대답도 너무나 자명(自明)합니다. 우리를 쳐서라도 그 막힌 곳을 뚫지 않겠습니까?
5/2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