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8:21-23)신자와 보험(保險)

조회 수 1370 추천 수 94 2006.05.15 18: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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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스8:21-23)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2차로 포로 귀환할 때에 수많은 금은(金銀) 기명(器皿)을 들고 왔습니다. 당시 메소보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을 오고가는 여행객들에겐 큰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었고 특별히 아람 족속 약탈자들은 당시의 페르샤 제국의 엄격한 통치 하에서도 강도질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호위병 하나 없이도 아무런 사고 없이 안전하게 예루살렘에까지 도착케 해주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대적에서 구해주실 텐데 군대에 의지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본 것입니다. 아무리 남자 장정 1,754명이 함께 귀환했다고 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13년 후에 귀환한 느헤미야는 오히려 군대의 도움을 청했습니다.(느2:7-9) 그도 혼자서 귀환한 것이 아니요 모든 여건이 하나 바뀐 것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럼 느헤미야의 행동은 부끄러운 불신앙의 행위입니까?

간혹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기에 그분께만 의지해야 하는 신자가 보험에 드는 것은 불신앙의 행위로 보는 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모든 위험에서 건져 주시고 또 환난을 겪더라도 피할 길을 주시기에 보험으로 환난을 대비하는 것은 에스라처럼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중병이 들어도 기도만 하면 낫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생각이야말로 잘못된 신앙입니다. 우선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도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기 전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들 때문에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창3:18,19)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사단의 조종 아래 죄악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함께 살아야 하는 신자도 때로는 같이 죄를 지으며 온갖 위험을 겪게 마련이며 또 그 모든 환난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해내지도 않습니다.  

요컨대 신자도 보험에 들고 군대의 도움도 요청해야 합니다. 그저 손 놓고 아무 대책 없이 하나님의 도움만 바라선 안 됩니다. 간단하게 급성맹장염이 걸렸는데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또 구약 성경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이 직접 군대를 동원해서 싸운 경우가 여리고성 같은 기적적 승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습니까? 그럼 역으로 에스라가 잘못된 신앙이란 말이 됩니까? 물론 그럴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금식 기도했고 또 기도한 그대로 응답받았지 않습니까?  

불신자나 신자나 현실적 실력을 쌓고 일상적인 방법으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둘 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자라고 슈퍼맨이 되었거나 알라딘의 마술 램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세상 살아가는 방식에서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면 신자는 그 반대로 대천명진인사(待天命盡人事)입니다. 불신자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살다가 그 결과가 어떻게 나든 하늘의 뜻이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반면에 신자는 어떤 일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또 반드시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실 줄 믿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지만 불신자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살면서 운수에 맡겨버립니다.

에스라의 경우 여행 도중에 삼일 간 대적에게서 지켜 달라고 금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군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부끄러웠다면 출발 전부터 틀림없이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느헤미야의 경우도 무려 네 달이나 기도한 후에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에스라는 기도했더니 군대의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응답을 받았고 느헤미야는 그 반대의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둘 다 하나님의 뜻대로 따랐으니까 신자가 하나님 대신 군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신자가 기도하지 않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따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동일한 성격의 기도를 두고 왜 각기 다른 응답을 주는가?”인데 그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믿음의 분량대로 맞추어, 특별히 크게 목표를 정하면 크게 적게 정하면 적게 응답을 하신다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 말하자면 느헤미야의 믿음이 약해서 군대를 부쳐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본국의 황폐한 사정을 듣고 통분하면서 넉 달이나 기도한 믿음의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에 능한 학사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반면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을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해 에스라는 목사이며 느헤미야는 공무원이었습니다. 만약 목사가 기도는 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주위 전문가들에게 먼저 의논하여 그들의 손만 빌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그 반대로 장관이 급한 사고가 났는데 경찰과 구조대원을 대동해 당장 달려가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사고가 수습될 때까지 기도만 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에스라도 틀림없이 금은 기명을 운반하려면 강도들이 설칠 것이라고 미리 걱정했고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기적적인 보호를 요청하기 보다는 자신의 평소 가치관, 생활 방식, 직업의식 등에 근거하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주의 종입니다. 이런 경우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무사히 예루살렘에까지 도착시켜 줄 것은 확신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앞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또 유대 백성들의 믿음도 더욱 견고해지는 방식으로 해 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다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사라는 신분으로 이전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도움을 간구하는 백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 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판국에 강도들이 두려우니 군대를 붙여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호위병 없이도 가는 길이 평탄케 하여 왕에게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게 해주시고 또 주의 약속이 진리임을 깨닫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능한 학사로서의 직분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하게 귀환 길에 만날 강도들의 위험을 걱정했으며 자신의 평소 가치관, 생활 방식, 직업의식 등에 근거하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강도들을 막고 안전하게 귀환하려면 페르사 군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왕이 과연 일개 식민지 백성에 불과한 우리더러 본국의 성벽 재건을 위해 돌아가도록 허락하는 것도 어려운데 군대까지 붙여 주려면 더욱 힘들지 않겠습니까? 제가 왕을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술 관원이지 않습니까? 왕의 성격을 잘 아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저를 보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질 수 있도록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모든 여건도 바꿔주시며 제가 담대하게 왕에게 소청을 올릴 자연스런 기회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에겐 힘든 일이 산적해 있었고 또 그래서 그렇게 오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범사를 당신이 주관하십니다. 태초부터 영원토록 무궁하고도 완벽한 지혜로 당신의 계획과 뜻을 이뤄나가십니다. 너무나 정미하고 단 한 치의 오차나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이고 상식적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실수나 죄악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능통한 학사 에스라에게는 성전 재건의 소명을 주시고 왕궁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에게는 성벽 재건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목사더러 교회를 지으라고 했고 공무원에게는 군대를 정비하라고 한 셈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다 계획해 놓으신 일이고 그에 맞게 두 사람의 재질, 은사, 경험, 직분을 다 주셨습니다. 역사는 하나님만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예외가 아닌 이상 이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끌어 나갑니다. 그래서 그분은 불신자에게도 일반적 은총을 베푸시고 그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역사적 관심은 오직 신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특별한 은총을 부어주십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아닙니다. 단순히 자신의 현재 맡고 있는 일을 주께 하듯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헌신하겠다는 기도를 하면서 그렇게 살면 그가 하는 평소의 일상적 일을 통해서 응답해 주시는 방식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뿐입니다.

신자는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각자가 소속한 일터에서 맡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승리하여야 합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말입니다.        

5/1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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