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약대를 위하여 긷는지라.”(창24:16-20)
아브라함의 노종 엘리에셀이 외아들 이삭의 신부감을 고르려고 자기 주인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순탄한 인도를 간구하자 바로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성경은 리브가가 보기에 “심히 아리땁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외모가 아주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그네를 대접하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외모보다 그녀의 성격이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한 늙은 나그네의 요청에 의해 물을 주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건조한 중동 지역에선 고래로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낙타에게 물을 주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합니다. 리브가는 엘리에셀이 요청도 하기 전에 자진해서 약대에게 물을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엘리에셀은 이 여행길에 약대 열 필을 몰고 나섰습니다.(창24:10) 사막을 가로지르는 필수적인 교통과 운반 수단인 낙타 없이는 꼼짝도 못하기에 다음 여행길을 위해 낙타가 배불리 물을 먹는 일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허기진 낙타 한 마리는 단 번에 약 20갤런의 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열 마리면 200갤런(약 760리터)의 물을 먹여야 하는데 실감나게 이야기하면 5갤런 물통으로는 40번, 2리터짜리 페트병으로는 380번 먹인 셈입니다. 남자 장정도 아닌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러서 이만한 양을 먹이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에셀이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노인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선물을 실어야 하고 또 여분으로 준비했다고 해도 낙타가 열 마리나 된 것을 보면 틀림없이 또 다른 종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물을 나눠서 먹였다고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리브가가 낙타에게 물을 배불리 먹였다는 것은 이 일행이 다음 행선지로 바로 출발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부감을 구하러 와서 그곳에 머무를 자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단지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소홀히 대하거나 아니면 적당히 성의만 보여도 되었는데 오히려 더 성의껏 대접했습니다.
엘리에셀은 “그를 묵묵히 주목하여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약대가 마시기를 다하매”(21,22절) 하나님이 인도하심임을 확신하고 그녀의 집에 묵기를 요청했습니다. 외모만 아리따울 뿐 아니라 품성의 아름다움도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행길을 위해 약대부터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지혜, 열 마리를 먹이는 엄청난 양을 끝까지 수행하는 성실성과 책임감, 자진해서 먼저 호의를 베푸는 친절함 등등 현숙한 아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그 한 가지 행동에 다 드러났던 것입니다. 엘리에셀로선 리브가가 그 힘든 일을 정말 자기 일인 양 기꺼이 그것도 아무 주저함도 없이 ‘급히’ ‘달려가며’ 하는 것을 보고 평소 때의 그녀의 성격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성격이란 완전히 형성되어 언제, 어디, 누구, 무슨 일에서든 동일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몸에 완전히 베여서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어떤 일정한 성향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누구라도 평소 때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잘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 비천한 자, 늙은 나그네에게라도 한결 같은 태도로 잘 하고 못하고는 오직 성격에 좌우됩니다.
한 마디로 성격은 속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속이 아름다워야 겉도 자연적으로 아름다워집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종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 자체에 따라 각기 다른 열매가 달리는 법이지, 특별한 열매를 아무리 갖다 붙여도 나무 자체가 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리브가에게는 단 하나의 가식, 위선, 기만, 거짓이 없이 평소 때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엘리에셀이 낙타를 열 마리나 데리고 있고 겉옷 모양이 보통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서 잘해준 것이 아니라 어떤 비천한 나그네가 왔어도 똑 같이 했을 것이며 그래서 그 성격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진리와 질서와 성실이 바탕이 되어야만 합니다. 가식적, 불규칙적, 순간적인 것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습니다. 일시적, 감정적, 기회주의적 아름다움은 단지 외식적인 아름다움이거나 숨겨진 다른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화장하고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젊은 여자의 미모는 순간적일 수 있지만 세상의 어떤 어머니라도 다 아름답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진실 된 마음이 끝까지 한결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아름다우려면 속마음이 진실 되기에 어떤 상황과 여건에서도 행동과 반응이 그 속마음과 완전히 일치해 한 결 같아야 합니다. 가식은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몰라도 뭔지 모르지만 부자연스러워 보이기 마련이고 당연히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쉽게 말해 마음과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나 똑 같은 사람이라야 아름답습니다. 가식이 없기에 모든 면에서 아무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고도 당당한 사람, 본문의 리브가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해 놓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심히 아름답다고 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속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대로 행동하되 그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질서를 위배하여 그 마음이 사단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자 말과 행동마저 부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아름다움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들의 외모는 여전히 심히 아리따웠겠지만 마음은 심히 부패해졌습니다.
아담 이후 원죄 하에 태어나는 자는 영육 간에 다 부패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얻었어도 아직은 죄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자라도 마음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창조 당시의 심히 아리따운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해 보기 때문에 의롭다고 칭해줄 뿐입니다. 신자가 천국에 가서 완전히 영화로워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신자의 아름다움을 측량하는 또 하나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갖고 있습니다. 신자의 믿음입니다.. 그럼 신자가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이 심히 아름답다고 보아주실까요? 기도원에 가서 사십 일 금식 기도를 해야 합니까? 교회를 신축할 만큼 많은 헌금을 해야 합니까?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개근해야 합니까?
아름다운 믿음도 동일합니다. 한 결 같이 변함없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믿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언제, 어디, 어떤 사람과 사건을 만나더라도 믿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 속에 사방이 막혀 있던 형통과 위안이 흘러넘치든 하나님을 향한 갈망, 신뢰, 의지, 소망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목에 칼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며 그분 외에는 내 삶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와 기쁨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이 보신다면 심히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자신이 있습니까? 당신의 형편과 외모와 감정이 아무리 초라하고 가난하고 애통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 요요(yoyo)처럼 오르락내리락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그분에게 심히 아리따운 자녀입니다. 우리의 그 후패한 현실적 형편, 외모와 건강, 감정과 행동 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의 보혈로 영원토록 다 덮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