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4:19,20)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베드로를 평범하다 못해 비천한 어부의 자리에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인간도 누려보지 못한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자리에 세우셨고 또 주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서 사역할 동안에 서로 인간적 애증(愛憎)을 가장 많이 나눈 자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과 미운 정 고운 정 다든 자가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과연 처음 제자로 불려 나왔을 때와 그 후 3년간 주님과 동행하는 동안에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았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말하자면 그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소망이 확실히 있어서 주님을 따라나섰는지,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을 했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을 가졌던 것은 분명합니다. 십자가 처형 전날 비록 허풍으로 끝났지만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구하겠다고 나섰지 않습니까? 또 대제사장의 하속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는 용기도 보여주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로선 드디어 내가 나서서 사람을 낚는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기가 앞장서면 그 뒷감당은 주님이 다 해주시리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권능으로 로마와 유대 기득권층들과 한판 신나게 붙겠구나 싶어 제 혼자 들떠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착각이었고 그 후로는 보기에도 측은할 정도로 비참한 결말을 맞습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도 마다하고 갈릴리 바다로 돌아갔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소망은 포기하고 이전의 평범하고도 비천한 자리라도 유지하려고 낙향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분명 소망은 가졌으되 잘못된 소망을 가졌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니까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최고가 되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성격과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그는 무슨 일이든 맨 앞장서려 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누가 높을까 다툼도 했습니다. 항상 자칭 대장 노릇을 하려 들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사람을 낚는, 요즘 말로 하면 리더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어부는 고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낚습니다. 시장에 내다 팔면 생계 수단이 됩니다. 그럼 사람을 낚는 어부는 가장 먼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사람들 사이에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려 했습니다. 사람을 낚으라고 하니 자기가 깃발 들고 앞장 서나가면 그 뒤에 사람들이 줄줄 따라오는 겉모습만 상상했나 봅니다. 다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기 전에는 사람이 결코 낚이지 않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언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모 되었습니까? 외형적으로는 물론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고 난 이후 담대해져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에게 이미 아주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의 일생에 가장 치욕적이며 영혼 깊숙이 모멸감과 자괴감으로 인해 큰 상처가 된 스승을 세 번 부인했던 죄를 바로 그 스승으로부터 용서 받고난 이후입니다.
그는 사실 인간적인 의는 뛰어나 대장이 될 수 있는 기질이 충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스승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스스로도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실패였습니다. 그 실패와 죄책을 주님이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그의 영혼이 새롭게 거듭난 것입니다. 인간의 의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반대임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바뀌고 사람을 낚는 것이 단순히 세상에서 대장이 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용서를 받기 전까지 그는 스승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서운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나섰는데 사단에 놀아난다고 야단을 맞았고, 대제사장의 하속들을 가장 앞장서서 막았는데도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꾸중만 들었습니다. 여태껏 보여준 스승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간단히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바보같이 묵묵히 십자가의 길로 간 것이 끝내 못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승이 하고 있는 일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어정쩡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흔히 가장 사랑한 자가 한번 틀어지면 돌아서기 가장 힘들듯이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인간적인 섭섭함은 못내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향해선 자괴감과 죄책감, 주님을 향해선 섭섭함과 미안함 등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데 주님은 아무 설명도 없이 단순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물었습니다.
그 순간 자기가 주님에 대해 갖고 있던 애정에 비해 주님이 자기에게 갖고 있는 긍휼의 크기와는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동안의 모든 상처와 죄책들이 한꺼번에 눈 녹듯이 녹아내린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을 낚으려면 사랑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고 또 사람의 인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낚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절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어떤 사람도 낚을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그에게 또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요21:18) 그가 복음을 전하다 결국에는 순교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나아가 이전에는 네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려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 반대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장이 되어 인기를 얻어서 사람을 낚으려 했지만 오히려 종이 되어 사람들의 상처와 연약한 것을 감당해 줄 때에 그들이 너에게로 나올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와 부족한 것들을 채우며 섬길 때에 진정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낸시라는 한 여성이 삶에 대한 너무 심한 절망감 때문에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시도 했지만 하반신만 불구가 되고 살아났습니다. 병원에서 예수님이 "너는 지금까지 몸은 건강한데 마음이 불구였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몸은 불구지만 마음이 건강하게 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고서, 자기처럼 실망한자들을 위한 상담사역에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지금까지 네가 잘나서 남을 우습게보고 이끌고 갈려고만 했지만 지금부터는 네가 못나져서 남에게 이끌리어 가야 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 낚는 어부, 리더가 되는 훈련은 어부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부 자신이 귀하게 됩니다. 아직도 오순절 이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범했던 실패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교회 안에서 말입니다. 그들이 낚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명예와 권력과 이권입니다.
사람을 낚으려면 정말로 사람 자체를 낚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귀하다는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훈련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어부 자신이 십자가에서 철두철미하게 죽는 길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자신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한 치의 가감 없이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만 하면 리더의 개인적 자질과 실력이 어떠하든 그물이 찢어지고 남을 정도로 사람을 낚게 됩니다.
5/24/2006
우리 성도들은 지금까지 너무 오랫동안 "대장 리더"(세상적 지도자상)의 속임수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가르쳐 주시기 원하셨던 "졸개 리더"(성경적 지도자상)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무수히 넘쳐나는 "대장 리더들"이 사라지고
대신에 더 많은 "졸개 리더들"이 대접(인정)받는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목사님처럼 참 가르침을 나눠 주시는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