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서 사람들에게 각광 받는 큰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그런 마음이 좀체 없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선뜻 생기지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라는 뿌리 깊은 원죄의 잔재가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교회 건축 같은 일에는 수 천 만원도 헌금하지만 길거리 걸인에게는 단돈 천원 주기를 아까워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저들 뒤에 폭력배가 있으니 차라리 안 도와주는 것이 나을지 몰라” 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동냥이나 하고 있어. 아예 모른 척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 식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을 도와줘 봐야 아무 보상을 받을 수 없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한 마디로 큰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TV 방송국에서 모금만 하면 몇 시간이고 줄 서서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두 달란트 남긴 자와 똑 같이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의 중요도를 수치로 측량할 수 있는 세상 가치의 경중(輕重)으로 구분 짓습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게으르지 않는 것, 즉 맡은바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느냐로 따진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작은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수위, 환경미화원(청소부), 우편배달부, 버스운전수 등등입니다. 정말 누구나 큰 기술 없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보수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한 자들을 더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이 박봉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불쌍하게 여긴 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큰 충성이 요구되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 일을 하는 기능은 별 것 아니라도 전혀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최고로 힘든 일입니다. 아무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그 일이 이뤄내는 결과도 아주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존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 수백억 들여서 짓는 일과 길거리 청소부의 일주일 분의 일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청소부가 일주일만 일 안 해도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교회 건물을 새롭게 거창하게 지으면 좋겠지만 구태여 안 지어도 옛날 건물에서 사역하는 데 큰 불편이 없으면 그만입니다.
세상에서 화려하게 조명 받는 일은 누군가가 언제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에 누가 권면 안 해도 합니다. 신자가 나서서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대신에 정말 구석진 곳에서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보잘 것 없고 고달프며 성과가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확고한 소명의식에서만 나옵니다. 그 일을 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절대 충성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선하고 의미 있다는 생각만으로 안 됩니다. 음지의 궂은 일은 불신자라도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도덕적 의미 외에 그 일에 자기의 전부를 걸어도 될 만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알기 쉽게 자기 생명과 맞바꾸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고 또 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시키신 일(천직의식)임에 전혀 의심이 없고 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겠다는 헌신(소명의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불신자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선한 일을 하며 어떤 때는 자기 목숨도 바칩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아주 드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고 항상 그 자신의 이름이 납니다. 심지어 일부러 이름을 내기 위해 음지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자기는 완전히 죽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합니다. 빌딩 수위를 하면 근무시간, 순찰시간을 칼 같이 잘 지켜야 합니다. 신자 수위가 경비서는 날은 사장이하 전 직원이 안심하고 퇴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 밤에 불시에 근무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조차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평소 언행이 아주 인자하고 예의 발라서 그 품성으로도 회사 직원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박봉에도 항상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야 하고 아내와 자녀들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기도와 말씀으로 이겨내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찾아가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이름이 추켜세워지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고전4:1) 다른 사람들이 신자를 보고 마땅히 그렇게 여길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은 충성인데(2절),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5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 단순히 선하게 살았는지 악한 짓을 많이 했는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생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석진 곳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궂은일을 한 동기마저 하나님은 다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취는 무대 복판에서 서서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살았던 인생인지 아닌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습니까? 신자의 충성도는 맡은 직분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각광을 받고 싶어서 한 일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에게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여전히 악하고 게으른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면 정작 그분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지 않습니까? 오직 목사 아무개, 선교사 아무개, 장로 아무개의 일만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할 것은 신자 본인입니다. 섞어질 것 같은 일을 했다고 밀알 자체가 썩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아무나 쉽게 하기 힘든 일을 했어도 얼마든지 밀알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밀알은 반드시 땅에 파묻혀 완전히 죽어야만 밀알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자문(自問)해 봅시다. 지금 하나님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위에 내 자신을 향해 설치된 모든 조명등과 마이크 시설과 심지어 무대마저 다 걷어치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과연 충성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10/23/2006
그러나 성경과는 정확히 일치됩니다!!!
주목받는 자의 삶을 미화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요령 따위나 가르치고 있는 교회의 실패,
한시 바삐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또 다시 생각하며 나갑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