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막1:43-45)
문둥병자를 낫게 해주신 예수님은 당신의 차후 사역이 방해받을까봐 염려하여 그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엄하게 당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 받는 종으로서 오직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만약 초자연적 치유 사실이 자꾸 알려지면 사람들은 큰 능력으로 로마를 무찔러 주는 영웅적 메시야로만 기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밀로 하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것인데 그 반대로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침을 받은 자가 그 비밀을 지켜 주리라고 기대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저히 지켜질 수 없는 이유를 최소한 셋은 들 수 있는데도 천하의(?) 예수님이 그것도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순진하기조차 합니다.
우선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서 보듯이 사람은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를 받으면 더욱 발설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치유를 해준 은인이 부탁한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대단한 분과 자신이 개인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라도 비밀을 지키기 힘듭니다.
둘째는 너무나 큰 은혜가 진심으로 감격스러워 남들에게 그 은혜를 널리 알리고 싶어지는 경우입니다. 아직도 절망 가운데 죽지 못해 겨우 목숨만 이어가고 있는 동료 문둥병자의 안타까운 형편을 생각하면 최소한도 그들에게만은 가르쳐 주고 싶은 법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일조차 막으시려는 뜻은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경우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라도 비밀 유지가 힘듭니다. 현대 의술로도 치유가 안 되는 문둥병이 깨끗하게 나았는데 사람들은 궁금해서라도 경위를 파고듭니다. 끝까지 비밀로 했다가는 그 본인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 있습니다. 또 율법으로 문둥병이 나으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찾아가 그 나은 것을 보이고 정결례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그 율법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럼 당장 제사장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해야 할 텐데 비밀을 지키리라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본문의 문둥병자가 스스로 그 약속을 파기한 것으로 보아 두 번째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대단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종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분에게 찾아와서 은혜를 입기를 바란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는 문둥병은 일반적인 피부병까지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일부러 손을 대어 낫게 하신 것으로 보아 문자 그대로 문둥병자였을 것이며 그런 불치병이 나았다면 주위에 알리지 않는 자가 오히려 잘못된 것입니다. 비밀 엄수가 되지 않을 것이 너무나 빤한데 왜 예수님은 꼭 그런 당부를 하셨을까요?
앞으로의 사역이 방해 받을 것을 염려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실 그 이후에 예수님이 당신이 하실 일을 사람들 때문에 하지 못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역이 반드시 복음서에 기록된 그 모습 그대로 이뤄져야 했고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세리 삭개오를 찾아가 그 집에 유하셨고, 수가 성의 여인을 만나러 일부러 우물에 나오는 시간에 맞추어 사마리아로 통행했고, 나사로는 사흘이나 지체한 후에 그 무덤으로 찾아가셨지 않습니까?
혹시 비밀을 지키라고 하면 더 발설하게 되니까 역으로 더 큰 소문을 기대한 것일까요? 그분은 그야말로 연한 순이자 어린 양으로 더러운 죄악은 단 하나도 범치 않았고 아니 아예 함께 공존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무리의 죄악을 대신 다 감당하셨습니다. 그런 위계(僞計)는 인간에게나 해당되지 예수님에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에게만 그 사실을 알리라고 했으니 미리부터 그들과의 종교적 긴장관계를 조성하려 한 것일까요? 그래서 십자가 처형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닦으신 것일까요? 인간으로선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을 예수라는 자가 고쳐주었다고 자꾸 찾아오니 제사장들로선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당시 제사장은 실제로 어지간한 병의 치료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기들 영역을 침범하는 자가 나타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뜻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은 문자 그대로 선(善) 그 자체입니다. 특별한 계획을 세워도 반드시 선한 목적과 방법으로 하시지 일부러 분쟁을 야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제사장께 보이라는 말씀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고 또 십자가 죽음 전이라 율법대로 순수하게 지키라는 당부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순수하고 단순하십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일차적으로 기록된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서 동네에 드러나게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바로 그것이 염려한 내용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은 동네에 드러나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모여들게 해서 인기를 얻고 싶었던 것입니까? 정반대입니다. 당신의 임의대로 언제 어디든 누구라도 찾아가고 싶은데 그것이 방해받을까 가장 염려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환자와 죄인을 찾아가고 싶었지 죄인과 환자들로 찾아오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선택의 차원을 넘어선 의미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감찰하고 계셔서 당신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를 미리 아십니다. 심령이 가난해져 당신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를 반드시 그분께서 직접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소문이 나고 인기가 올라 어떤 동네에 들어가면 모두 모이기에 가라지와 알곡이 섞인 채 그 모두를 상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구별해낼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긍휼을 원하는 자와 일대일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실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자신의 뜻 외에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변경 혹은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당신과 교제하고 싶은 자와 더 오래 교제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뜻은 단 한 치의 변화 없이 동일합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은혜를 갈급해 하며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자는 당신께서 아시고 반드시 찾아와 주십니다. 위로, 권면, 치유, 소생의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 주십니다. 신자가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하십니다. 나아가 그분은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하실 용의와 준비가, 아니 소망과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신자가 원하는 세기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원하면, 아니 거절만 않으면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신자와 동행해 주십니다. 그분이 오직 한 가지 염려하는 것은 신자가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할까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신자를 향해 갖고 있는 가장 큰 비밀입니다.
그런데도 혹시 당신은 그 은혜에 타성이 붙어 싫증을 내거나 세상이 더 좋아 그분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는가요? 등은 안 돌리더라도 형식적, 의무적으로 만나고 있지는 않는 가요? 아니면 당신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 예수님도 조용히 말고 드러나게 찾아와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1/1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