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煩惱)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3:20-26)
성경의 인물 중에 욥만큼 큰 고통을 당한 자는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졸지에 모든 자식과 재산을 다 잃고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도졌습니다. 오죽 고통이 심했으면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 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죽음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어 어떤 고통이 임할지 모르고 또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두렵지 않고 자기 지식으로 도무지 파악이 안 될 때에 공포가 오는 법입니다. 간단한 예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 귀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나타날지 몰라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일순간에 끝나므로 그 고통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고 그 과정 또한 오히려 평강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잠간의 고통 후에는 최고의 안식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어렸을 때에 아파서 주사를 맞기 전에는 너무 두렵다가도 막상 맞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편안하게 잠을 잘 자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욥은 죽지도 못하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자기 온 몸이 아프지만 그 고통이 하루도 안 빠지고 한 순간도 그치지 않습니다.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앓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도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평강과 안온과 안식이 없이 고난만 임한”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고통뿐이었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삼십 세 때에 큰 환난을 당해 완전히 고통 중에 둘러싸였습니다. 일기에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나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까? 나는 죽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최초로 간호사라는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 90세까지 그 일에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들과 비슷한 경우를 겪는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 질병이 아니라도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한숨과 단내와 불평뿐입니다. 더 이상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싫고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후회가 되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죽은 자와 방불해져 삶의 의미와 기쁨은 찾을 수조차 없이 절망의 벼랑 끝에 이른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람이 택할 길은 셋뿐입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탈출을 포기하고 그 상태로 머물러 있거나, 마지막은 어떻게 하든 그 역경을 뚫어보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그 고통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것이 두려울 뿐 아니라 그런 상태로라도 살아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그런 상태에선 결코 삶을 마감할 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리 말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해도 그래도 삶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셋째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고통을 탈출해 나갈 수 있는 방도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터널에 빨려 들어가고 있고 또 빨려 들어갈수록 그 터널이 더 깊어지니 문제입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욥에게는 한 가닥 믿음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힘을 내어 찬양 부르고 말씀 보며 기도하는 그런 류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둘려 싸여 그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라고 한탄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왜 고통과 빛을 동시에 같이 주었는가라고 불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빛이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하나님이 고통을 끝내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고통을 끝내달라고 소원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불평했고 고통의 원인이라도 알게 해달라고 떼썼지 않습니까? 어쩌면 고통을 끝내고자 하는 소망마저 접어버린 그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빛은 단순히 하나님 당신이었습니다. 어찌 곤고한 자에게 빛을, 마음이 번뇌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었느냐고 한탄했습니다. 말하자면 왜 자기로 하나님을 알게 해서 스스로 죽지도 못하게 하느냐는 원망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다면 세상 사람처럼 벌써 목을 매달아 죽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알기에 절대 죽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죽음 중에 하나님을 택하겠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한 말 같습니까? 이 고통을 없애는 아무리 좋은 세상적 방법이 있더라도 하나님과는 맞바꾸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고통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해졌다고 합니다. 이 고통을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들어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여전히 그분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자기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고통이 너무 심해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한숨과 단내와 불평뿐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너무나 힘들어 신자가 기도도 못하고 심지어 불평을 터트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믿음, 오히려 가장 강한 믿음은 자기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하나님만의 주권적이고 거룩한 간섭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풍부하든 궁핍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아직도 숨이라도 쉬고 있고 태양이 떠서 움직이고 있는 한 그분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절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권적 간섭이기에 그분은 최종적인 해결책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거룩한 간섭이라 반드시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며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며 신자의 유익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큰 환난이 닥쳐 현실적으로는 아득해질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음을 알아 하나님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원하시는 최고로 소중한 믿음입니다.
예의 나이팅게일의 경우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해서 그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그 후 그 소명을 이뤄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 또한 말로는 죽음 외에 소망이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께 자신에 대한 계획을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은 극심한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과는 바꾸지 않았습니다. 삶을 포기한 자는 절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기도하는 자가 삶을 포기할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자를 포기할 리는 더더욱 만무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믿음으로 기도하여 이겨야겠다고 너무 쉽게 결단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이 고통을 없애주는 세상적인 방법이 있으면 하나님을 포기하고 그것을 따르고 싶은지 곰곰이 묵상해 보십시오. 아니 하나님이 나를 지금 포기한 것일까 아닌가만 따져 보십시오. 그래서 설령 하나님이 이 고통을 끝을 내지 않고 그대로 죽음으로 이끈다 해도 따를 수 있을지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분명한 답을 얻고 난 후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렇다고 또 하나님이 고통을 당장 끝내 주시리라 쉽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이전에 그 고통을 통해 당신의 인생에 이루실 계획부터 말씀해 주십니다. 그 소명을 붙들고 나아갈 때만이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고통과 함께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1/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