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내가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욥23:1-5)
모든 세대의 대부분의 신자가 저지르는 큰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면 항상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좋은 하나님이 됩니다. 반면에 나쁜 일이 생기면 당장에 하나님을 나쁘다고 믿거나 대놓고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신자로서 체면과 기본적 의무감이 있어서 선뜻 그럴 배짱은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자기에 대한 보호를 중지했거나 멀리 가버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기도나 성경 공부할 때는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럼 스스로 모순에 빠질 뿐 아니라 믿음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떠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떠났는가라는 원망이 자꾸 앞서니 탈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다는 욥도 동일한 잘못을 범했습니다. 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고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신음소리마저 작아지고 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혹독한 원망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혹독함은 저주가 섞인 원망이 아니라 도대체 하나님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불만이었습니다.
믿는 자가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떠나갔다고 고백할 정도면 사실상 가장 큰 원망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안 주어도 함께 한다는 확신만 있어도, 나아가 지금 현재 겪는 환난이 그분으로부터 받는 벌이라는 믿음만 있어도 그분의 은혜 가운데 있는 능력 있는 신자입니다. 회개와 소생으로 가는 문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고난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찾아오니까 미칠 지경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끝나면 다음에는 더 큰 고난이, 어떤 때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여러 고난이 겹치니까 환장할 노릇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예측 가능하게 하나씩 찾아오면 벌써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래 일이 되고 계획을 세워 미리 대처하면 그만입니다. 고난은 반드시 고통스런 과정과 부작용을 동반하니까 고난일 수밖에 없습니다.
환난 중에 신자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믿음은 기도와 말씀과 찬양으로 무장하여 평강을 유지하고 인내하며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를 떠났나보다는 생각이 들면서 겉으로 열심히 기도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출발은 자신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실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실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믿음 자체부터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살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구조적으로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의 흉계와 인간의 죄악이 합작하여 온갖 모순과 왜곡을 양산해내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제 잘 믿고 있으니 나에게 만은 고난이 따라와선 안 되고 올 수도 없다고, 설혹 믿지는 않더라도, 은근히 기대하는 것만큼 믿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착각 중의 착각, 망상 중의 망상입니다. 가장 큰 망상을 고쳐야 믿음이 출발이라도 될 것 아닙니까?
고난이 하나님의 부재증명(不在證明)이 아니라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라면 다음 단계의 믿음도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 고난이 있기에, 그것도 바로 나 자신에게 고난이 있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고난이 있기에 하나님은 신자를 감찰하고 동행해 주실 수 있습니다. 고난이 없어서 신자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면 구태여 감찰하고 동행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준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신자의 고난의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세상(사람들)의 악과 사단의 모략과 자신의 실수와 죄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이 안 지켜 봐줄 수 없는 것입니다.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범죄 발생 시간에 없었다는 부재증명을 알리바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흥미롭게도 신자들이 고난에 대해 하나님을 두고 상반된 두 개의 알리바이를 갖고 판단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자기에게 고난을 허락할 리 없다고 착각하는 것은 고난이 발생한 시점과 현장에 그분이 없었다는 알리바이를 스스로 세워주는 셈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도대체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두 번째는 고난이 발생한 경위야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고 따져볼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만큼 기도하고 교회 봉사했으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어야 할 텐데 어디 갔는가라고 원망합니다. 신자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더러 내가 기도할 때에 도대체 어디 가있었는지 알리바이를 대라고 따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왜 합니까?
신자에게는 고난이 없다고 축복이 아니며 고난이 있다고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짜로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동행하십니다. 고난이 있기에 더 동행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이상 신자에게 또 다른 특별한 은혜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데 무엇을 또 바랄 것입니까? 신자가 그분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분도 신자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자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테스트해보고 또 더 키우는 수단은 고난 밖에 없습니다. 이왕이면 원인도 모르는 극심한 고난이 오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와 분명히 동행하면서도 때로는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이란 고난 가운데서도 신자 쪽에서 하나님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은 하나님을 계속되는 고난의 용의자 리스트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꾸로 그분을 고난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해 자꾸 당신의 알리바이를 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처음 고난이 일어날 때에 또 내가 지금 이렇게 계속 당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고 따집니다.
하나님이 신자로부터 그런 추궁을 당할 때마다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반대로 고난이 발생할 때에 너야말로 어디에 가있었느냐고 알리바이를 대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네와 동행하는 나를 버려두고 네 스스로 세상과 죄악을 향해 달려 가놓고 이제 와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날더러 범인 취급하려드니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
온 천하 만물의 주인이시며 신자에게 사랑스런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 부재하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부재하는 것은 오직 신자의 믿음일 뿐입니다. 그렇게 성숙되고 강한 믿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특별히 환난 가운데도 하나님에게 알리바이를 요구하지 않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에게 알리바이는 영원토록 필요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 죄악과 세상과 사단이 있는 곳에 가있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부터 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알리바이가 없다면 해야 할 일은 회개뿐입니다. 그런데도 혹시 지금 하나님에게 알리바이를 대라고 추궁하면서 거꾸로 덮어씌우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기도 중에 말입니다.
11/13/2006
역시 생각케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린 어쩌면 우리 신앙의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묵상, 기도, 헌금, 봉사, 교제 등등 모든 신앙모습들을 재평가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삼박자 축복이라든지 천국체험이라든지 경박한 간증 등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주님과 함께 달린 강도 중 한 명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주님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셨던 당신의 사명이었으나 강도는 엄겹결에 당한 돌발사고였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가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주님은 6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만큼 고통의 시간이 짧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더 긴 시간 고통을 당하고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다리뼈 꺾임을 당했습니다.
누가 더 큰 고통의 당했으며 누구의 고난이 더 의미가 있느냐 아니면 강도의 말대로 "주님은 죄없이, 자기들은 죄 값을 치르는 것이다."라는 의미를 곱씹어 보자는 뜻도 아닙니다.
강도의 자세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그냥 참았을 뿐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신음 흘렸을 뿐입니다. 문제는, 그 강도가 끝까지 주님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사실은 주님이 놓지 않으신 것이지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행동은 주님의 손을 잡는 것 하나 뿐일 것입니다. 나머지는 입에 발린 말에 지니지 않을 수 있고 허망한 신기루에 불과할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목사님의 오늘 말씀 가운데는 이러한 의미도 포함된 것 같이 느껴지기에 더 깊이 생각하며 나갑니다.
항상 감사~~~~~~~~~~~~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