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33:10-12)
세계정세는 현재 미국이 완전히 선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웠지만 화폐에 “In God We Trust"라는 말을 새겨 넣을 정도라 하나님이 세운 나라나 다름없습니다. 또 근래에 한국의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국운도 융성해졌습니다. 본 시편 기자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이라 복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잘 믿으면 개인도 나라도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증명하는 대표적 예로 한국과 미국을 자주 등장시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잘 믿는 것과 제대로 믿는 것은 사실은 동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잘 믿는다”는 것이 문제 해결하고 은혜 받으려 치성과 공적을 최대한 바쳐서 열심히 믿는 모습으로 변질되는 바람에 구태여 “제대로 믿어야 한다”고 표현해야만 하는 것은 기독교의 모순이자 큰 비극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믿는 것입니까? 기도 뜨겁게 하고 말씀을 열심히 보아야 합니까? 그 이전에 인간의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사실은 잘 믿는 것입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 인본주의로 흐를 것이 빤한데 어찌 하나님의 복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독립을 앞둔 미국 대륙회의에서 헌법에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개인의 권리”를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된 근본 원인인 신앙의 자유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 안에 속함은 물론이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이고도 포괄적인 인권과 자유는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으로 간주되지만 당시로선 아주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당시까지 모든 나라의 권력 구조는 왕정체제였습니다. 왕정체제란 근본적으로 왕은 군대를 동원해 외부의 대적을 막아주는 대신에 국민은 왕에게 자기들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저당 잡혀 놓는 제도입니다. 자유와 인권은 포기 내지 양보하되 전쟁으로 인한 수탈과 죽음만은 면하자는 뜻입니다. 오직 생존과 안전만이 삶의 모든 목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와는 달리 이스라엘이 신정국가가 실패하고 왕정체제가 등장한 것이 단적인 예였습니다. 사무엘이 왕정의 폐해를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해주어도 “백성이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19,20)라고 주장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랜 기간 왕정의 폐해가 쌓이는 실패를 겪다 보니까 사람들은 생존과 안전보다는 인권과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독립할 당시 세계는 “빵보다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미국 헌법이 개인의 포괄적 자유를 세계 최초로 보장했지만 사실은 그것을 최우선의 가치와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진정한 인권과 자유란 성경에 기원하고 있기에 오직 성경을 믿는 자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신자들처럼 아무런 외부적 제약이 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행복을 재앙과 질병과 가난에서 벗어나 고통이 없어지고 안락하게 살게 되는 것과도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기꺼이 들어가는 인간과 사회만이 진정한 인권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자유는 하나님의 뜻에 겸비하게 순종하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완전하고 선하고 거룩하기에 인간이 그분의 뜻을 따를 때만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 밖에 서면 인간이 자기 기분대로 할 수 있어 당장은 신날지 몰라도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배제되기 때문에 사실은 악에게 묶이는 자유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 안에서 자유는 악에서 자유롭게 되면서 선에 묶이는 자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혼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6:17-20)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신자는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자유이자, 선을 마음 놓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물론 미국 헌법에 인간의 포괄적 자유를 포함시킨 사람들이 로마서에서 이야기 하는 복음 안에서 선을 행하는 자유의 의미까지는 생각하지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아담과 이브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려 들면 반드시 죄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만은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하나님 안에서만 보장되는 가장 간단한 예가 하나 있습니다. “속이는 저울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1:1) 하나님이 착한 사람은 복주고 악한 사람 벌준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속이는 저울을 쓴 자가 돈은 더 많이 벌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절대 진정으로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두렵고 떨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그 영이 눌리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 안에는 오직 사기, 위계, 기만 등이 판을 치기에 진정한 자유가 실종될 것은 너무나 빤합니다.
미국이 자원이 풍부하고 제반 시대적인 국제정세와 어우러져 나라가 부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복을 받은 진짜 이유를 하나 들라면 완전실명제가 실시된 것입니다. 저울눈을 속일 수 없는 사회체제가 보장된 것입니다. 부정한 돈이 없어지는 바람에 오직 실력과 신용에서 우위인 자만 살아남는 풍토가 되었습니다. 자연히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과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또 당연히 부가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이 복을 받은 것이 청교도 이주자들이 잘 믿어서가 아니라 제대로 믿어서였습니다. 저울눈을 속이지 않고 페어플레이 정신을 살렸습니다. 미국은 정직한 신용사회라는 면에선 아직까지는 그나마 세계에서 제일 우위에 서 있습니다. 한국이 복을 받은 것도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새벽마다 축복해 달라고 기도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후손에게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목표로 비교적 정직하며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미국도 그 정직성이 많이 오염되어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들이 없어졌습니다. 드디어 일불짜리 주화에서 “In God We Trust"라는 문구마저 빼버렸습니다. 한국의 도덕적 종교적 타락상은 언급해 보아야 입만 아플 정도입니다. 두 나라 다 개신교 신자가 줄어서 국운이 쇠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뜨겁게 기도하는 소리가 낮아져서 경제가 하강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두려워하지 않고 저울눈을 속이는 사회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기 이전에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부가 쌓여도 그 부도 잠시 쌓였다가 곧 썩어 없어질 거짓의 부일뿐입니다. 하나님이 열방의 도모를 폐하고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악한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도모나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도모와 사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생각 자체가 너무나 어리석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롭습니까? 특별새벽기도에 눈물콧물 흘리며 100 일간 개근했더니 모든 묵은 문제가 해결되고 병도 나아서 자유로워졌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빵보다 자유를!” 수준에도 못 미치고 오히려 “자유 대신에 빵을!” 수준으로 되돌아 간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면 찬양 테이프를 하루 종일 틀어 놓았더니 아무 근심 걱정 없어지고 구름 위에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아 자유롭습니까? 자칫 종교적 진통제에 중독이 되지나 않았는지부터 점검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되어 선을 마음껏 행하는 자유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억매여도 내 존재, 삶, 인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나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증거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신자가 진짜 자유롭게 된 것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자신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 주어 자유롭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많은지, 자신이 이웃에 선을 행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여건과 힘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많은지 보면 압니다. 전자는 어지간해선 응답받기 힘들어 힘에 부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후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도 즉각적으로 간구한 것의 몇 십 배로 말입니다. 또 간구하지 않은 참 자유와 행복까지 얹어서 말입니다.
12/25/2006
제대로 믿으려는 자들이 잘 믿는(?) 자들에게 형편없이 밀리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제대로 믿기만을 고집하는 우둔한(?) 지체들이 있기에
그나마 다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음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금최강내강고수 김문수 형제님의 독문 표현으로는 "꼴통"입니다!^^)
내 신앙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테이션이 진품을 밀어내는 현상이 너무 심하여
성경적 믿음을 보기 원하는 갈급한 심정의 표현일 뿐입니다.
이러한 갈증을 풀어주시는 목사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