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8-10)
미국 헌법에는 사람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처음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이 과연 어떤 행복관을 가지고 있었을까 추정해보기 위해서 Life 잡지사에서 한 조사를 실시했던 적이 있습니다. 노동자, 회사 사장, 학자, 성직자 등 각종 직업을 망라하여 과연 어떤 것이 행복인지 질문하여 사람마다 공통적인 행복의 조건을 추출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임금을 받을 수 있으며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이 가장 필수적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인종적 차별이 없어야 하며 성실함이나 이타적 헌신 같은 대답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소아마비 여자 환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고통과 아픔은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인성을 형성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고통 그 자체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종종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던 것을 우리 내부에서 행복을 찾도록 바꿔주기 때문입니다.” 외부적인 환경이 좋아져 고통 없이 안락하게 지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혼도 못한 젊은 핸디캡의 여자가 실제로 겪은 고난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신자들도 이 여인과 같은 행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행복의 조건은 외부의 형통이 아니라 내면의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오히려 자신의 내면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서 그 가운데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도 그렇게 해야 하지만 크리스찬의 행복관은 이것과도 달라야 합니다.
행복이란 추구한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을 외부 환경의 변화에서 찾든 내면의 성품과 생각을 바꾸어서 추구하든 인간의 노력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연약하며 불완전한 인간으로선 아무리 노력해도 궁극적인 성공은 거둘 수 없습니다. 또 모든 인간이 죄와 탐욕에 찌든 이상 그런 시도는 시작할 때부터 실패할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신자들이 고난을 오히려 감사하고 또 믿음을 성숙시키는 계기로 삼으려고 의지적인 노력을 많이 하고 때로는 성공을 거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라 금방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간혹 신자 체면이 있어서 남들 앞에선 행복한 척 위장을 할지라도 실제 자기 내면의 깊은 감정에는 아무 기쁨이 없다는 것을 본인만은 압니다. 심지어 그런 위장이 자기마저 속여서 한 동안 행복해지다가 고난이 닥치면 금방 그 위장은 실체를 드러내고 심령의 평강도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까?
이 시편 기자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성도를 하필이면 왜 젊은 사자와 비교했을까요? 사자는 백수의 왕인데 그 중에서도 젊은 사자라면 사실상 굶어서 주리는 법은 없습니다. 시쳇말로 세상 동물은 전부 자기 밥입니다. 젊은 사자의 발톱을 피해나갈 수 있는 동물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한 주먹 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른 동물이 멸종되어 다 없어지지 않는 한 굶어서 주리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젊은 사자란 현실적인 능력이 가장 출중하여 세상의 권력과 재물에서 하나 부족할 것 없다고 자신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사는 자입니다. 자기 힘만 믿고 매사를 자기 생각대로 해치우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도 하나님이 막으시면 하루아침에 망하고 생명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선이 어디가 되어야 합니까? 아무리 자기가 젊은 사자처럼 현실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도 자기 힘만 의지해서는 궁극적인 행복은 절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물, 권력, 명예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면의 평강마저 하나님의 주관아래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그 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대답한 사항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까 아예 무시하고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외부적 형통이든 내면적 평강이든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므로 그분께 간구하여 추구하라는 단순한 뜻도 아닙니다. 본 시편 기자의 말 대로 “여호와가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여호와(그분)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그럼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고 부족함이 없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서 고난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에 “모든 좋은 것”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더 큰 축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만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신께서 선이라고 하면 절대로 다 선이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당신의 독선적인 판단과 기준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 관해 제대로 묵상하면 반드시 그분의 좋고 선함을 고난 가운데서도 실제로 맛보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평소 때에는 세상에서 젊은 사자처럼 설치다가 궁핍해지면 잠시 피난을 가는 도피처가 아닙니다. 신자는 항상 그분께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도저히 참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세상을 떠나서 항상 거처하는 곳이 그분의 품 안이어야 합니다. 그분과의 동행 자체가 피난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가시는 곳에 가 있지 않다면 아무리 외부적 형통과 내면적 평강이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은 사단의 통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곳에는 필연적으로 사단의 다스리며 역으로 사단이 부재한 곳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행복은 그 본질상 추구한다고 획득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행복은 반드시 발견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좋고 선한 행복이라는 객관적 실체가 있어서 그것을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도하여 현실의 문제가 해결 되고 고난에서 구원 받으면, 또는 그 반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큰일을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아주 큰 착각일 뿐입니다. 그 또한 여전히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이 반드시 발견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곳을 찾아가서 그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나아가 오직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해야 하며 또 그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해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던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거처이며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대장치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품 안에 있는 자신을 반드시 발견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에 자기는 더 이상 불쌍한 존재가 아니며 불행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다는 철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었으므로 반드시 그분의 유업을 받게 되어 있다는 부분에 절대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시쳇말로 때려죽어도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며 나는 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혹시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참된 행복은 그렇게 한다고 결코 얻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그분은 인간을 오직 당신의 자녀삼아 당신이 정해놓은 길로 동행하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선 그분과의 동행 외에는 다른 어떤 행복도 필요 없다는 확신이 있기 전에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12/27/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