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42:8)
시편 42편에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여럿 있는데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선 기도를 밤에 한다고 합니다.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식적으로는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간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는 해질녘부터 다음날 그 때까지가 하루인지라 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져도 새벽은 초저녁 내지 해질녘이어야지 밤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 구절의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이 밤낮 구분 없이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니까 성도도 밤낮 구분 없이 그분께 감사하고 기도하며 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분석해보면 낮에는 하나님이, 밤에는 신자가 행동의 주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적 표현이라 대조하는 기법을 동원하긴 했지만 너무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낮은 신자가 열심히 일하고 밤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에 맞추어 해석해보면 신자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함께 했기에 그 일을 쉬고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따라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신자가 겪는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인자가 이미 함께 하므로 구태여 그 일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해달라는 간구는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상식과 달리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된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6/7절) 영혼은 완전 낙망이 될 정도로 큰 고난 중에 있었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내용은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니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9/10절)였습니다. 여전히 고난 중에서 해결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주위의 조롱마저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찬송의 기도를, 아무리 양보해도 찬송과 함께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파도와 물결이 엄몰(淹沒)하여 쫄딱 망하기 일보직전에 말입니다. 과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서 형편없이 타락하여 완전히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타락된 세상을 원래 모습대로 바꿀 때까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환난이 자꾸 겹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뿐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도 고난은 신자와 불신자 그것도 신자의 믿음 상태와 아무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거푸 생기게 마련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장 첫 부분이 바로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잘 믿으면 환난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면 성경의 서두부터 부인하는 셈입니다.
요컨대 잘 믿는데 왜 이런 환난이 생기는지 따지고 불만을 가질 이유가 오히려 불신자에게 있지 신자에게는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이 사단의 수중에 놀아나고 있음을 이미 알지만 불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아가 불신자는 만약 하나님이 계신다면 무조건 현실의 형통으로 축복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럼 신자는 어차피 환난은 겹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손 놓고 포기하고 있어야 합니까? 그런 사실을 알기에 더더욱 그래선 안 됩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게 된다는 것을 아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든지 차라리 빨리 죽겠다고 덤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짧고 한번 뿐인 인생이라 더 최선을 다해 보람차게 살아야 하듯이 환난은 어차피 겹치지만 더욱 잘 적응하여 이겨내고 환난 중에도 가치 있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자가 그럴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비록 세상은 타락되어 있지만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신자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알 수 있도록 완전히 공개하지는 않는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가 이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는 탄식이 고난을 겪을 때마다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숨겨 놓은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신자더러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숨겨져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발견한 자만이 그 사랑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또 발견할 자만이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아무나 다 당신을 강제적으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를 항상 사단과 당신이 줄다리기 하는 한 복판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단보다 힘이 약하거나 신자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혹시라도 신자가 사단에게 넘어가더라도 언제든 바로 빼내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단의 존재는 하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신자를 마치 외줄타기 하듯이 버려두는 이유도 말 그대로 외줄타기 하도록 버려두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포기하고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로 하여금 항상 사단과 하나님 양쪽에서 자기를 끌고 있는 힘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원하는 쪽으로 스스로 가도록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자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 받아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필립 얀시는 “내 눈이 주의 영광을 보네”(Rumors of Another World / 좋은씨앗사 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은 좌로나 우로 똑 같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면에서 말 타기와 비슷하다. 안장에 머물러 있어야만 말 타기의 스릴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신중하고도 지속적인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균형 잡힌 삶을 살게 하려면 반드시 좌우 즉 사단과 하나님의 끌어당김이 신자 앞에 병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의 끌어당김은 항상 화려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것은 비공개로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도 아직은 현란한 쪽으로 따르려는 습성이 너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절대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으시고 신자를 그냥 그렇게 두셨습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이릅니까?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 쪽으로 기꺼이 따를 때까지 그렇게 놓아두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도 사단 쪽으로 따르려는 습성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당신의 유업을 이을 자로 적합해질 때까지 당신께서 우리를 기어코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할진대 신자가 해야 할 일이란 얀시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라는 안장에 걸터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시편 기자는 완전히 엄몰될 파도와 물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의 파도와 물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의심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한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어서 아직은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참 신자란 반드시 불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자여야 합니다. 말하자면 환난이 격심한 와중에, 그것도 오늘도 밖에 나가 종일 핍박과 조롱만 받았을 뿐인데도 밤에 찬양의 기도를 하는 자입니다. 비록 사단과 인간의 죄악으로 세상이 헝클어져 환난이 겹치지만 그것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과 사랑이 자기를 한 시도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왜소한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 감사, 기도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아니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려 달려오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도 그분이 나를 알고 영원토록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불신자로선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 아닙니까? 예수를 알기 전에는 나도 이해하지도 꿈도 못 꾸었던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영혼이 주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 아닙니까?
신자란 인생이 외줄타기처럼 험난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 스릴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능숙한 말 타기 선수는 더 험난한 곳에서 타기 원하지 평지는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낮에는 여호와의 인자가 나를 붙들고 있기에 어떤 힘든 일이라도 그분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을 즐긴 자만이 밤에 진정한 찬양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밤에 찬양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새벽에만 울며불며 떼를 쓰고 치웁니까?
1/12/1007
"참 신자란 반드시 불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자"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음은 아직도 사단에게 더 가까운 쪽으로 살아가고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내 모습을 바라보시는 내 하나님의 심장은 지금 어떠실지를 생각해 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