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니라 하니라.”(눅2:8-14)
신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10:31) 하여야 합니다. 그럼 과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근사한 예배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입니까? 뜨거운 찬양과 심령을 찌르는 말씀에 감동되어 가슴이 찡해졌기에 하나님께 박수치며 감사하는 것입니까?
원칙적으로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신학적 용어가 몇 있습니다. 전지전능(Omniscience and Omnipotence), 거룩(Holy), 주권(Sovereignty), 통치(Reign), 영광(Glory) 같은 단어들입니다. 원칙적이라고 말한 의미는 인간도 그 속성 중 일부를 닮거나 나눠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지성과 능력이 있어 성결해지며 자유의지를 갖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동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몰라도 영광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어져야만 합니다.
불완전하고 죄에 찌든 인간에게 영광이란 원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한다고 해서 그 일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열매와 베풀어진 은혜가 영광스럽다면 몰라도 그 일이나 인간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가 은혜 받는 일을 하나님은 분명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일에 성도가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만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성도가 조금이라도 차지하거나 나눠가질 수 있다고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합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전유물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려면 그분의 임재가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쉽게 말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그분에게 하듯이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교회 봉사를 해도, 전도를 해도, 주님이 항상 감독관 내지 관찰자로 동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연히 거룩하고 선해질 것이며 또 그렇게 한 일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이 임재할 것이라는 추측, 기대, 인식, 믿음만으로 행해선 안 됩니다. 실제로 그분과의 전인격적인 대면 아래 범사의 세밀한 부분까지 동행하고 있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정말 그 분의 임재 아래 들어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밤에 밝은 빛이 비취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천군천사가 찬양하는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최초의 성탄절에 비유컨대 헨델의 메시야, 그것도 하늘 무대에서 펼쳐지는 장엄하고도 거룩한 공연을 관람한 셈입니다. 얼마나 놀랍고도 신비했겠습니까?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경이로움이 전신을 완전히 감쌌을 것이며 가슴 깊이에서 감격과 흥분이 샘솟았을 것입니다. 찬양이 끝나도 얼마동안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아기 예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그 부모 외에 최초로 알현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2:15,20) 아기 예수는 강보에 싸인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구유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구간 안에는 성령의 교통과 간섭이 충만하게 임하였기에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자연스레 찬송을 부르며 돌아갔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임재 아래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경이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무한히 크심과 절대적으로 선하심과 다함이 없는 긍휼을 깨닫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기에 자연히 그분께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최소한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그분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의미는 그분의 크심에 반비례해서 신자의 왜소함, 연약함, 무능함을 철두철미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비췰 때에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일차적인 이유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직접 뵈면 그 자리에서 다 죽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와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하나님은 어떤 더럽고 추한 것도 그 자리에서 태워 없애버리는 소멸하는 불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신 그분의 빛이 다만 한 줄기라도 확실하게 비취면 죄에 찌든 인간으로선 죽고 살고를 떠나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안심시켰습니다. 나아가 죽지 않을 뿐 아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까지 주었습니다. 구주가 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드디어 죄악과 고통과 사망의 그늘 아래에 있는 인간 세상에 대해 극적인 구원 조치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표적으로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보라고 했습니다. 표적이라면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큰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 상례인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은 바로 심판입니다. 인간은 그 앞에서 자기의 의로 살아남을 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당신께서 감당하실 것이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무서워 할 것이 없으니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구유에서 평화롭게 누워 자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큰 능력으로 고통과 질병과 핍박에서 구해주는 구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지금 천사들이 목자를 먼저 찾아와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이 당신의 큰 경륜으로 택하신 자를 먼저 찾아와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해주는 구원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뵈어도 죽지 않는 화목을 이루기 위해 당신께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임하며 또 그럴 때에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 이뤄진 것이므로 하늘에선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의 핵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너무나 크신 긍휼과 자비와 권능과 은혜 앞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철저하게 깨달아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그분께 하듯이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면서 공포심이 아닌 경외감으로 두렵고 떨려야 합니다. 아니 정말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경외감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너무나 큰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기쁘게 감사하며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도리어 이상한 것 아닙니까?
다른 말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생각부터 가장 먼저 버려야 합니다. 대신에 그 일은 하나님이 시킨 일일 뿐 아니라 그분이 직접 주관하고 있으며 자기는 단지 쓰임 받고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일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더 쌓을 것이라는 각오, 헌신, 열심을 다 빼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쌓으려 한다고 절대 더 높여지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이 임재한 곳에만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아 아주 작은 일에서나마 쓰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는 영광이라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죽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실체를 대면하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으로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신자가 이 땅에서부터 그분과 동역하는 너무나 영광스런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4:16)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면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기에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능욕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일만큼 그분께 더 큰 일이 없으며 그 외에 또 다른 영광이 그분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려 하지 말고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자신을 통해 세상과 사람 앞에 반사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으로 종교적인 큰일을 했어도 세상 앞에 자기 영광을 높인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12/26/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