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독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양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과 연결해도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맞으려면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것이 복을 받는 전제가 되기에 하나님도 차별하는 분이 됩니다. 돈 많고 권세 있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역차별을 받는 셈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우선 사람들의 기대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힘든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면 고난을 해결 받는 경우가 자주 있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더 좋아한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아예 그런 기대까지 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진리가 되려면 백이면 백 그렇게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항상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근거는 빈곤과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이뤄지니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보살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현실적 복을 더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었는데 또 다시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쉽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을 더 주는 것이 진실이 되려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구원 후에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본문의 결론도 “이는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복을 더 주시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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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란 반드시 자기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남이 한 것보다 우월할 때에 하는 법입니다. 단지 자기가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재벌 회장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랑한다면 바보입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두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랑은 소유, 자질, 권세의 많음보다는 그것을 이뤄낸 주체의 형편에 달렸습니다. 예컨대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아무 자랑거리가 안 돼지만 돌을 몇 달이나 앞둔 아기가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인간이 자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이유도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빤한 이치를 왜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가 하면 교회 안의 약한 자로 세상의 강한 자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의 강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신자의 자랑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부하고 권세 있게 만들어 세상에서 큰소리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거룩하고 신령한 자로 바꿔주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나 지혜 있는 것이나,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귀한 것이나, 멸시 받는 것이나 멸시하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주셨거나 허락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끼리의 평가, 그것도 상대적 일시적 비교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신자가 자랑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준거를 세상 사람의 잣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 따르기에 세상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아니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데도 세상에 자랑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 그것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면 신자로서 엄청난 자가당착이지 않습니까? 신자와 불신자는 이미 그 인생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정반대로 나뉘어졌기에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자랑할 사이가 아예 아닙니다.
나아가 본문의 근본 주제는 전도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데 있어서 세상에서의 지혜와 문벌이 아무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풍족하다고 느끼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도 자기들의 소유, 신분, 능력만 믿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너무나 허망하고 실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와 평강과 위로가 넘쳐서 그 인생이 거룩하고 의롭게 변하기 때문에 죄악과 사단에 묶여 있는 그들로선 부러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이루시고 또 변화시키는 그분의 사역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혹시라도 구원에 자기 쪽의 원인과 조건이 있었다고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자랑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유일한 기준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확고한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 자랑거리로 삼을 것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뿐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자랑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오직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인간 세상의 경계선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거룩한 영역 안으로 이미 옮겨진 자입니다. 신자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능력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세상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 멸시 받는 신자라도 오히려 그들로 부끄럽게 만들 만큼 거룩하고 신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서있기만 하면, 아니 더 이상 인생으로 자랑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분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자랑하려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소원합니까? 자신을 살찌우기를 간구합니까?
7/6/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