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해석함에 자주, 아니 매번 범하는 잘못은 앞뒤 문맥(context)과 연결해서 검토하지 않고 단순히 한 구절씩 떼어서 본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저자가 당시 상황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은 헤아리지 못하고 그 구절의 문자가 대변하는 표면적 의미만 생각하고 치웁니다. 그것도 자기 상황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보기 위해서라도 한 구절씩 따로 떼어 읽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바울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구절만 보고 자기에게 적용합니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도도 현실적 고난에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워서 염려를 많이 했는데 믿음이 연약한 내가 그러는 것은 당연하지 뭐!” 식입니다. 바울이 두려워하며 떨었던 진짜 내용에 대해선 알지 못하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를 필두로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를 읽어보면 그만큼 치밀하고 논리적인 사람이 과연 따로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가 육신적으로 잠시 자랑한 대로 가마리엘 문하의 최고 수제자요,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그런 세상적 지식과 종교적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를 나사렛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스데반을 순교로 몰아가는데 군중들을 앞장서 선동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전후 문맥과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말을 불쑥 꺼낼 리는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전도함에 있어서 인간적 지혜의 무용(無用)함과 대비해서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현실적 고난에 관한 언급은 앞뒤로 아무리 보아도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가 진작 두려워했던 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바울이 염려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전도할 때에 혹시라도 성령의 나타남이 없고 자신의 옛날 버릇대로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나 않을까 조심했다는 것입니다. 단 한 절만 연결해 읽어도, 그것도 깊이 따져볼 것 없이 적혀 있는 그대로만 생각해도 전혀 다른 뜻의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정도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이 지적한 그대로 “수건으로 가려진 완고한 마음”(고후3:14)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과 소원에 맞추어 스스로 성경을 재단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자기 요구대로 부리려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분이 지금 자기에게 정말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진지하게 헤아려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가장 첫 걸음은 문맥 안에서 올바른 뜻부터 추출해 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에덴에서 전도에 실패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만 찾으니까 자신의 철학적 지혜를 동원해 설교했지만 그들에게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 복음이 먹힐 리 없었던 것입니다. 또 그동안 유대인들로부터는 많은 박해와 훼방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를 전할 뿐 아니라 현실적 형통은 전혀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와보니 여전히 철학적 사변을 좋아해 아주 교만한데다 도덕적 타락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그들을 훈계하여 변화시키려고 자신의 철학적 도덕적 지혜로 그들을 설득하려 들지나 않을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 앞에 혹시라도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들어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을지 극도로 조심했던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존 울만은 18세기 미국의 퀘이크 교도로 노예 해방 운동을 선도한 자입니다. 그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동안에 필연적으로 반대자의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기 일기에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 배는 떨었고 내 입술도 떨렸으며 내 식욕을 잃었고 외적으로 약해졌다. 그리고 이 괴로운 때에 휴식을 할까 봐 나는 속으로 떨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핍박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런 반응으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약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작 속으로는 무엇 때문에 떨었다고 합니까? “휴식을 할까봐”였습니다. 그 운동을 중지하고픈 마음이 들까봐, 즉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중도포기하고 자신의 육신적 안락을 취할까봐 염려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염려하고 두려워지는 근거는 크게 보아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결과가 제대로 잘 이뤄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전혀 예상치 않는 어떤 어려운 일이 갑자기 발행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과가 잘못되던 앞으로 큰 일이 벌어지든 둘 다 미래의 일입니다. 미래의 일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이라서 아예 예측도 할 수 없기에 걱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자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라고 합니다. 현재 하는 일의 결과를 하나님 안에서 실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예측 못할 미래 일도 그분 안에서 증거를 취하라는 것 아닙니까? 요컨대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자기와 연관된 현실의 문제는 오직 그분께 맡겨서 염려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냄을 받은 신자는 바울이나 존 울만처럼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소명을 잘 실현하지 못할까를 염려해야 합니다. 현실의 환난과 핍박이 고통스럽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1:7)인지라 얼마든지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바울이나 울만 같이 큰일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일을 당신의 주관 하에 책임지시므로 오직 당신과 동행하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든 혹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나 않을까만 염려해도 됩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잘 받기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세상과 짝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즐겁고 풍성하기에 기꺼이 그렇게 소원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그분께 드려야 하고 그러면 그분이 맡기신 일도 함께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 자신의 현실적 고난을 없애거나 줄이는데 동원하라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주신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현실의 고난은 받기로 각오해야만 두려운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솔직히 우리는 그분의 뜻과는 정반대로 자신이 고난 받지 않는 데에만 믿음을 동원하여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주신 소명을 중지하게 될지나 않을지 염려한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현실의 두려움을 다 없애주십니다. 고난보다 휴식을 염려하십시오. 또 바로 그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7/12/2007
박 신(http://www.nosuchjes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