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36:19-22)
믿음이란 인간을, 특별히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을 구태여 해야 하는 이유는 신앙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하는데도 많은 신자들이 그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출발해야 한다는 뜻은 신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지식부터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실제로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그분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열매 맺으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의 조건이나 자격이 그분의 보호와 인도의 조건과 이유가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로선 자신의 형편을 그분의 마음에 맞게 끌어올리기 이전에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바른 인식부터 가져야 합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감사와 경배와 찬송만을 그분께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면 자연히 그분의 마음에 들게 됩니다. 요컨대 그분의 주권적 은혜가 먼저이고 신자의 반응이 그 다음에 따르는 것이지 신자가 먼저 바치면 그분이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표적 예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탈출을 시도했거나 그렇게 해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귀환을 허락합니다. 우리 세대에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가운데 갑자기 소련이 붕괴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이, 그 배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조차 당신의 이름을 더럽혔음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포로로 잡혀가게 한 것은 범죄한 것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곳에선 철저하게 회개했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백성으로서 이방 앞에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도 계속해서 범죄해 이방의 조롱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뜻을 짐작해 보면, 우선 이방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판단하기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온 것은 여호와가 자기들 신보다 힘이 약하다고 오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도 구원의 대상인데 당신을 우습게 알게 될까 염려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그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차츰 이방신에 물들어 완전히 배교하게 되는 사태를 막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로 본토에 돌아가 회개시키고 다시 정결케 하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그곳에 남아 계속 죄짓는 모습을 이방인들로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너희끼리 숨어서 죄를 지어라는 궁여지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개망나니 짓을 하는 아들을 둔 부모가 제발 밖에 나가선 그렇게 하지 말라고 집안에선 무슨 짓을 해도 방관해 두는 것과 같은 심경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 체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들이 남에게 멸시받지 않게 하려고 아들을 먼저 배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비유컨대 자기 집에서 부모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불평하는 아이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잠시 남의 집에 보내 고생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정신 차리지 않고 계속 불평하고 나쁜 짓을 하므로 당신께서 직접 바로 잡기 위해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 셈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에게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24-27절)
단 하나 예쁜 구석이라곤 없고 전혀 반성의 기미도 없는데 당신께서 귀환시켜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고 심지어 당신의 신까지 주어서 더러운 짓과 우상 숭배를 그만두게 당신이 만들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찌 저렇게까지 완악할 수가 있는가 싶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절대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단에게 묶여 있는 죄인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신뿐입니다. 그것도 인간이 구하지 않았는데도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먼저 베풀어주는 은혜에 의해서만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아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37절) 다른 말로 포로 귀환이 하나님 주권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에도 힘입은바 커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에 언급한 내용과 모순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분명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루 속히 끝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회개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 시일이 오래되자 차츰 불평, 의심, 심지어 불신앙마저 함께 얹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방이 망하고 예루살렘의 옛 영광을 회복해달라고 열심히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사실 거기까지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이웃집에서 고생하며 정신 차리라고 보내질 정도의 아들이라면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또 그곳에서도 불평하고 잘못을 범하는 것이 얼마나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빨리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채거나 아버지에게 형식적으로라도 잘못했다고 빌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단지 당신께 도움을 요청한 것만으로도 기쁘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이방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 서지 않았어도 당신께 기도했다는 사실 만은 소중하게 받으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이 거룩하고 신령하게 되는 일, 즉 죄에서 깨끗케 되는 일은 그들이 직접 한 것은 하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베푼 일방적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적 형편이 나아지는 것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마저 응답하여 현실의 고난에서 구해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현실의 삶을 통해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 세상 앞에 서라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이 계약을 맺었는데 한 사람이 수도 없이 어겼습니다. 그런데도 상대는 계약에 규정된 손해보상 조항을 일일이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위약 사항이 너무 많아지면 아주 가끔 경미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다시 약속을 지킬 다짐만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쪽의 의무는 단 한 치도 어기기 않고 신실하게 이행합니다. 차츰 상대에 비해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여겨지며 그렇게 관용해준 은혜가 감사해 자기도 약속을 잘 지키려 할 것입니다. 어차피 내가 어겨도 상대는 계약대로 할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야지 하는 철면피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아니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그런 뻔뻔한 짓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 하기로 그분과 피의 언약을 맺은 사이입니다. 그 전에 그분이 먼저 찾아 오셔서 당신과 원수 된 자를 위해 대신 죽으시며 새 생명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과 당신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후에도 당신께서 간섭하셔서 거룩과 의와 빛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내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해주십니다. 그래도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고 요구하십니다. 너무나 큰 이 은혜 앞에 신자는 오직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서 그분의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하늘의 보물을 이 땅에 심고 당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나 그분의 영광을 미처 몰라도 됩니다. 솔직히 우리는 그런 것에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매사에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 일에도 최소한 그분의 선하고 거룩한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는 해야 합니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투정과 불평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가 차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시는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특별히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오직 당신의 영광을 당신께서 세우기 위해서 주관하십니다. 당신의 당신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당신의 공의는 절대 굽지 않으며 당신의 사랑을 한 없이 부어주십니다. 당신께서 목숨을 걸고 당신의 자녀들과 맺으신 언약을 절대로 끝까지 지키십니다. 결국은 우리로 당신의 영광을 얼굴과 얼굴로 맞대면 하여 목도케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조건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의 자녀와 맺은 언약을 이룸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이 조건이자 제약이 됩니다.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 언약을 이뤄나가십니다.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로선 도저히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아니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너무나 큰 은혜이자 사랑일 뿐입니다. 그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이자 아버지입니다. 아니 아빠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랑과 은혜를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분의 규례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 언약을 우리가 이뤄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실력과 품성이 절대 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계속 머물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에 반응만 하면 됩니다. 그분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분에게서 마쳐야 합니다. 그분과 원수 된 상태에서 죽음의 진노 아래 있던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에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7/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