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이 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단2:17-19)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크게 두 가지 우를 범합니다.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만 집중해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색안경을 끼고 보아서 숲은커녕 나무도 못 보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본문의 의미는 정확하게 해석하지만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일관된 뜻과 잘 연결시키지 못해 나무는 보는데 숲은 못 보는 경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자기가 꾼 꿈의 스토리까지 알아맞히라는 얼토당토 않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갈대아 술사들이 전부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같은 운명이 될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에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여 하나님께 이상을 받아서 그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기도하기보다는 여럿이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난다고 해석합니다. 그것도 자기들뿐만 아니라 갈대아 술사들의 생명마저 살리는 선한 기도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고 믿습니다. 맞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
그러나 본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더 큰 숲을 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앞뒤 문맥을 함께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당시 상황에 우리 자신을 대입해 보아야만 합니다. 과연 우리가 그런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 다니엘과 같은 행동을 했을까, 아니면 어떻게 처신했을 지를 유추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주위 사람과 합심해서 뜨겁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다니엘처럼 담대하게 “왕께 구하기를 기한하여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보여 드리겠다”(16절)고 말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이 합심해서 기도한 것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기도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차피 죽게 될 터이니 기한이나 좀 벌어서 그 동안 기도해보고 알게 되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만이지 식의 이판사판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해몽해주겠다고 큰 소리쳤다가 실패하면 그 때는 왕을 조롱한 죄까지 추가되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어야 할 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해몽하는 은사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1:17) 그가 언제부터 그런 은사를 받게 되었는지, 즉 이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전부터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이 해몽만 하라고 했다면 갈대아 술사들도 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특별한 은사를 받은 다니엘이라도 그 꿈의 스토리까지 알아맞힌다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섣불리 자신 있다고 단언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확신에 차서 왕에게 기한을 구했습니다. 왕의 사형 집행 명령을 수행하러 나가는 시위대 장관을 “왕의 명령이 어찌 그리 급하뇨”(15절)라고 진정시킬 정도로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담대하게 왕에게 약속할 수 있었던 근거는 정작 은사보다 따로 있었습니다. 시위대 장관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갈대아 술사들이 “왕의 물으신 것은 희한한 일이라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2:11)라고 한 말에 주목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성령의 간섭으로 이런 확신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우상 신들을 섬기는 술사들마저 참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일을 알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 일은 하나님이 오히려 저들 술사와 왕과 이방 백성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려고 계획하신 일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그 일로 부르고 있는 중이다. 내가 기도한다면 여호와께서 반드시 이상으로 보여주실 것이다.”
나아가 이런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 까닭도 이전부터 항상 그렇게, 즉 이방에서 여호와의 영광만 높이는 자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측근시종이 된 것도 바로 이때를 대비한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왕의 횡포에서 생명을 구해달라고 친구와 합심해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도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6:10) 했던 것에서 보듯이 자신의 안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몽사 해석에 실패해 죽게 되면 어쩌나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자기 인생과 삶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는 바탕 위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단순히 급한 일이 생기면 그 상황에 맞추어 임시방편으로 그것도 자신의 평안만을 비는 신앙생활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 세 번 기도한 것도 하나님이 바벨론을 저주하고 이스라엘을 다시 흥하게 해서 포로에서 귀환시켜 달라고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의 권능이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드러나며 자신은 오직 그 일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주였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방의 왕만 6명이나 최측근에서 섬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섬김이 결국에는 고레스 왕으로 포로 석방 조서를 내리게끔 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여러 명이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을 진짜로 믿는 사람에게만 드러냅니다. 신자치고 그분의 권능을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말로만,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능을 항상 삶에서 맛보며 오직 그 권능으로만 자신의 삶과 인생이 영위되어야만 진짜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 진짜로 믿는 자들이 합심해 기도할 때에 큰 역사가 일어나는 법입니다.
다니엘은 몽사 해석은 오직 육체와 함께 거하지 않는 여호와 참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 아닌 몸으로 믿었고, 더 정확히는 자기 목숨을 걸고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과 삶이 그분의 능하신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오직 그분의 권능이 없다면 존재로서의 아무 가치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까지 확신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모든 종교가 취하는 자신을 위한 간구와는 다릅니다. 그런 면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기도가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평안을 위해 복을 받아내기 위한 일방적 통로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신자에게 실천되는 통로도 겸하며 오히려 이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신자로 신자답게 하는, 바꿔 말해 하나님이 당신을 당신답게 드러내는 길입니다. 요컨대 그분은 당신의 권능으로만 살고 죽는 당신의 참 자녀의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7/30/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