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모순된 이름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5:29)
성경에는 가끔 잘 이해되지 않거나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은 노아의 이름을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안위하는 자”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유가 어떻게 되었던 결과적으로 인류를 멸망시킨 장본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차라리 그 이름에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처럼 공의나 심판의 의미가 들어가는 것이 타당했지 않았을까요?
히브리인들의 이름에는, 노아는 유대 민족이 형성되기 전이지만 고대인들도 동일한 개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본인의 특성과 운명을 나타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당대의 의인이라는 관점에선 그 특성을 잘 나타낸 이름이라 할 수 있지만, 그의 운명과 하나님의 계시라는 관점에선 아무래도 어긋나 보입니다.
그러나 이름에는 이 외에도 또 다른 가장 보편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부모의 평소 신념이나 자식에 대한 소망을 반영한 것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은 어쨌든 아비 라멕(가인의 후예 라멕과는 다름)이 지어준 것으로 가장 먼저 그의 입장에서 그 뜻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위하다’의 원어 ‘나함’에는 ‘한숨 쉬다’, ‘동정하다’, ‘후회하다’, ‘위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인해 저주 받은 땅에서의 당시 생활상이 정말 힘들고 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였기에 라멕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을 간절히 기구한 뜻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그런 신앙으로 아들을 양육했기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에서도 노아라는 이름이 사실상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3)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야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저주 받은 땅에서 죄악이 관영해 있기에 더더욱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는 결코 참 안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요컨대 죄악이 깨끗케 되지 않은 상태에선 안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사이가 벌어진 인간을 다시 당신 곁에 가깝게 두시려고 세상을 물로 깨끗이 씻어서 인류에게 진정한 안위를 주시겠다는 뜻이 계시된 것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창조 때에 주신 약속을 다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 또 이후로는 비록 인간이 또 다시 죄악에 빠져도 땅에 대한 저주는 없을 것이라고 확약했습니다. 나아가 생명 되는 사람의 피를 절대로 흘리지 말라고, 즉 땅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로채는 죄를 더 이상 범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한 마디로 죄가 제거된 거룩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아 이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분에게 모순은 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작금의 교회 안에 아주 모순된 신앙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통렬히 지적하여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참 안위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이 심리 치유와 긍정적 사고에만 의지하는 가짜 안위가 바겐세일 되고 있습니다. 안위를 예수님 밖에서 쉽게 얻으려 해선 계속해서 더 큰 고난에 빠질 뿐입니다.
11/1/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