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을 정설로 바꾸려는 신자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역설의 절정입니다. 역설이 진리가 되는 이유는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그 만큼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생각을 담은 성경 말씀도 당연히 역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보배는 철제 금고에 넣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넣는 바보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예수라는 보배를 신자라는 질그릇에 보관토록 했습니다. 그럼 역설적으로 질그릇은 반드시 깨어져서 그 속의 보배가 세상 앞에 찬란한 모습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또 역설적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며.” 질그릇은 깨어졌는데도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니 오히려 깨어져야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질그릇 속에는 보배가 있으며 능력의 심히 큰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의미의 역설로만 받아들여선 안 됩니다. 신자의 삶이 실제로 역설적이어야 합니다. 신자의 인생이 불신자의 눈에 혹은 자신이 생각해도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만 생기고 핍박을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한 것같이 보여도, 신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 확신한 바탕에서 모든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의 인생 자체가 불신자의 눈에는 완전한 역설로 실제 비춰져야 합니다.
신자 속의 보배 되신 예수님의 심히 크신 능력이 절대로 사람이나 세상으로부터 우겨쌈이나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 없으며 낙심하지도 않을 것 아닙니까? 또 신자가 아무리 큰 핍박 가운데 있어도 결코 망하기까지 버려두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끝 날까지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함께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거나 성공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는 우겨쌈과 거꾸러뜨림과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그로 인해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천국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영원히 남으며 또 이 땅에서도 그분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갈수록 빛을 더 발하게 됩니다. 세상은 신자가 완전히 망했다고 간주할지라도 신자는 오히려 맡은 바 소명을 완수했다고 여기는 또 다른 역설입니다.
그런데 더 심한 역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12절) 신자는 사망했습니다. 질그릇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반면에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이 도리어 살아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10,11절)
이제 왜 이런 역설이 일어나는지 설명이 가능해졌습니다. 신자 속에 있는 보배 자체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함께 일어나는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듯이 신자도 먼저 죽어야 다시 온전하고도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신자가 세상 앞에 드러내는 예수의 빛도 죽음과 부활을 함께 불러오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자신부터 그분을 닮아야 보배의 빛이 반사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어서” 더 많은 사람들로 보게 해야 합니다. 깨어진 틈새가 더 크고 더 많을수록 빛은 더 새어나옵니다. 완전히 다 깨어져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면 오직 보배만 드러납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닮아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깨어져 죽어야 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일 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역설을 보태면 질그릇인 신자가 잘 깨어지도록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신자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위해 최대한 빨리 크게 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보배가 질그릇을 보배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항상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순서는 당연히 죽음이 먼저이고 생명은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 중 하나만 가져선 결코 완전한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생명만 소유하려 들어선 질그릇을 절대 깨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질그릇을 보배처럼 꾸미려고만 합니다. 반대로 죽음만 갖고 있어선 도덕적 수양이나 율법적 종교로 전락해 예수의 빛이 아닌 자기의 의만 세상 앞에 자랑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종교는 죽음과 생명이 공존하고 또 죽어야 오히려 더 온전하게 살 수 있다고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잘 살기 위해선 그 삶 자체를 더 윤택하고 풍성하게 가꾸어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그릇을 갈고 닦기만 바쁘지 그 속에 보배를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역설 자체를 본성적으로 거부하는 인간이 자기 이성으로만 고안해낸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 땅의 고통스런 삶과 인간 내면에서 끝없이 솟아오르는 탐욕과 죄악의 늪에서 헤어나려고 그릇 자체를 깨려는 시도는 합니다. 그러나 깨어져봐야 속에 담고 있는 것이 전혀 없기에 깨어진 것으로 그냥 그만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되고 참 생명으로 가는 길은 완전히 폐쇄됩니다. 당연히 아무 것도 없는 ‘무(無)’가 추구하는 목표이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깨우침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 스스로는 자기라는 그릇을 절대 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또 말 그대로 인간 내면에서 탐욕과 죄악이 끝없이 솟아납니다. 아무리 그것에서 벗어나려 해도 불가능합니다. 그야말로 죽음 외에는 빠져나갈 방도가 전무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과 타종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그릇은 오직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으로만 깨어질 수 있다는 또 다른 역설 을 논한 것입니다. 또 이 역설은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이 신자와 함께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또한 신자 자신부터 깨어지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 능력을 오히려 자신의 그릇을 갈고 닦는데 쓰고 있으니 이 얼마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신앙의 역설입니까? 역설의 종교인 기독교를 인간 이성으로 다시 뒤집어 하늘이 아니라 세상에서 통하려는 정설(定說)로 만들려는 짓 아닙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과는 전혀 무관한 신앙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정설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오직 당신의 정설만이 통합니다. 또 그 정설은 인간에게는 당연히 역설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저 사람은 세상과 거꾸로 걸어가며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데도 이상하게 그 속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빛이 비취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질그릇을 깨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용을 쓰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심지어 질그릇 자체를 보배로 만들려고 갈고 닦고 있는 중이든지 말입니다. 그것도 새벽마다 열심히 울부짖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11/2/2007
그런데 목사님!
기독교의 역설을 인간의 정설로 바꾸어 이야기하는 분들과
또 이를 아주 타당히 여기는 동조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은
작금 기독교가 처한 위기를 반증하는 현상이 아닐는지요?
역설을 역설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야 지극히 옳습니다만
이를 꺼리는 사람들의 인식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목사님 같으신 분들의 애쓰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같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