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왜 죽었는가?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성경이 노아를 설명한 수식어로만 따지면 아마 성경인물 중에 최고 경건한 자로 보입니다. 의인, 당세에 완전한 자, 또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습니다. 비교급 표현방식이 없는 히브리어 문법에는 반복법으로 대체하는데 세 번을 거푸 칭찬했다면 당연히 최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에녹과 대조해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바로 옮겨졌는데 노아는 왜 그러지 못했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노아가 나중에 대낮에 술 취하는 등의 죄를 범해서입니까? 물론 그렇긴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각 자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말하는 바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육신적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일 년을 상징하는 365세를 산 에녹처럼 하나님과 하루도 빠짐없이 동행하면 수명과 상관없이 죽음을 초월하는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가 범죄만 하지 않았어도 육신적인 죽음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려고” 홍수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최초의 인간을 지어놓고 심히 좋아하셨던 이 땅이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제 2의 실낙원 같은 형벌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에녹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셨던 목적을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줍니다. 반면에 노아는 죄를 범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둘 다 아무리 죄악이 관영해도 당신께서 따로 남겨둔 당신과 동행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진리도 나타냅니다. 에녹이든 노아든 각기 자기가 속한 시대와 장소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온전히 드러내는데 쓰임 받은 도구였을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1-23)
모든 인간은 토기장이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귀하게도 천하게도 쓰일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그 선악(善惡)간 뿐 아니라 가부(可否)간도 따질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인간끼리도, 최소한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불신자들을 향해서만은 절대 그 우열(優劣)간을 경쟁, 시기, 질투해선 안 됩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간에 그래야 함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조차 안 되니 어찌된 연유입니까?
하나님은 타락 이후의 인류를 오직 두 부류로만 나눕니다. 진노를 면하지 못할 자와 당신의 영광을 볼 자입니다. 창조 후에 타락한 채로 육신의 삶을 마감하는 자와 타락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영원히 살 자입니다. 후자에 속한 신자로선 오직 하나님이 그 시대와 그 장소에서 자기에게 맡겨준 그분의 일에 모든 것을 걸기만 하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미 주셨으니 바칠 그 모든 것 안에는 육신적 생명도 포함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11/5/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