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두려우심을 아는가?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고후5:1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려고 사도 직분을 맡게 된 동기와 그 직분이 갖는 의미에 관해 변증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은 자”(18,19절), 즉 복음을 전하는 자로 알리워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단순히 사도로서 너무나 지당한 말을 했다고 간주하면 안 됩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반드시 그렇게만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의 상벌 여부는 제쳐두고 복음 전도자가 아닌 자신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에만 자기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삼층천에 불려 올라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지극히 큰 계시”(고후12:4,7)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곳의 상급과 형벌을 다 보았고 또 장래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땅이 어떻게 될지에 관한 계시를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 그곳에서 본 무시무시한 벌을 받을까 두려워 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인간에 관한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확실히 보고 들은 자로선 그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전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선 다른 이들에게 단지 윤리적 혹은 종교적 스승으로 불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원한 생명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길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죄인과 하나님을 진짜로 화해시켜서 사람들로 그 인생을 완전히 뒤바뀌게 하려는 것이었지 단지 현재보다 조금 더 선하게 살도록 촉구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온갖 멸시를 받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구속의 은혜를 생각해보면 두렵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진정한 의미가 깊이 와 닿으면 닿을수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으며 자연히 평생을 걸고 오직 그 은혜만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상벌을 떠나서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복음 전도자 외에 어떤 다른 직분으로 기억한다면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드러난 그분의 경륜을 알려주지 않아 그들 삶에 예수님의 사랑이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크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악을 철두철미하게 저주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는 당연히 철두철미하게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삼층천까지 갖다 온 바울만큼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완악한 인간이 맞게 될 최후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알고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가 느꼈을 주에 대한 두려움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에 따르면 모든 교인들도 자기처럼 그렇게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복음이 증거되지 않고 다른 직분으로 세상이 기억해주고 있다면 그만큼 신자로서 큰 잘못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주의 두려우심을 제대로 아는지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해 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을 과연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과 기쁨으로 여기고 있는지 말입니다.
11/12/2007
지나온 제 신앙이 거꾸로 신앙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와 앞으로 제가
어떠한 신앙으로 살아야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