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누구든지 네 연소(年少)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2,13)
찬물에도 순서가 있다는 속담처럼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유교적 가르침에 익숙한 한국인은 나이에 아주 민감합니다. 어떤 시비라도 논리적 타당성이 결핍하면 마지막 히든카드로 끄집어내는 것이 나이타령입니다. 나이도 어린 것이 감히 손윗사람에게 대든다는 것입니다.
연로(年老)한 자를 공경하고 연소(年少)하다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함은 강조하는 정도만 다르지 모든 민족에게 요구되는 공통적인 덕목입니다. 특별히 지도자에 대해선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도자라는 특성상 오히려 이 원리가 무너지기 훨씬 더 쉽습니다. 대중의 기대치에 못 미치면 쉽게 비방을 받고 또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는 정적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일수록 자신만의 권위를 스스로 세워야 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도자라면 그 신분과 특권만으로도 당연히 권위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오히려 권위가 가장 손상당하기 쉽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럼 역으로 말하면 지도자가 단지 지도자라는 이유로만 권위를 세우려 들면 더 세워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후임 사역자로 세워두고 온 젊은 디모데에게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권면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지금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을 야단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럴만한, 심지어 그 자리를 노린다 해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더러 아무리 젊어도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니까 응당 자기 말에 순종하리라 섣불리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 직분을 앞세워서 목사인척 한다고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정말 목사답게 행하면 자연히 권위가 생기고 교인들도 순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교회 안팎의 모든 신자들을 지칭)에게 본(本)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본이 되지 않고는 절대 연소함을 업신여기는 일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를 개척 설립한 바울 사도가 세운 후임 목사라는 타이틀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본만 보이면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그 권위에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과 행실만이 아니고 추가로 사랑, 믿음, 정절에도 본을 보이라고 권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 유익만 돌아오면 사랑 없이도, 심지어 악의를 감추고도 말과 행실에 얼마든지 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만장자의 유산만 바라고 결혼한 젊은 여자는 말과 행동으로 남편을 너무나 잘 섬기지 않습니까? 사단이 신자와 교회에 잘 쓰는 수법입니다. 젊은 여자가 남편 죽기만 기다리듯이 사단도 신자에게 현실 형통을, 목사에게 가짜 권위를 세워주어 양쪽 다 겉으로 아무리 부흥해도 속으로 썩어 들어가길 바랄 뿐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킬 목적만으로 진정한 사랑 없이도 말과 행동으로 정성껏 성도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할지는 몰라도 온전한 본을 보인 것이 아니기에 얼마 안 가 목사는 신자들의 업신여김을 당하게 됩니다. 목사는 정말 모든 성도를 한 결 같이 사랑해야 하고 또 그러면 말과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레 일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 받는 자가 부자연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느끼면 이미 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위에 믿음도 요구됩니다. 불신자도 간혹 아무 이해타산 없는 이타적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영적지도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권능과 은혜를 온전히 믿는 믿음 안에서 자기를 따르는 양떼를 사랑해야 합니다. 목사 자신이 섬기려 하기보다는 신자 스스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기 죄와 허물을 날마다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도록 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완전한 은혜를 충만히 받을 수 있게끔 가르치고 인도해야 합니다.
목사에게 마지막으로 요구되는 절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을 목사 자신에게서부터 확실하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먼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사랑으로 섬기고 가르쳐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데도 성경이 마지막으로 또 다시 강조한 뜻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나이를 업신여김을 가장 쉽게 받을 수 있는 일반적 조건이 아니라 디모데에게만 해당되는 하나의 특별한 예로 든 것입니다. 그에겐 나이가 어린 것 빼고는 목사로서 부족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마다 나름대로 현실적 약점은 있게 마련이지만 영적으로 바로 서있기만 하면 그 약점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목사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절제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 또한 역으로 말하면 목사가 그런 것들에 진정한 본을 보이면 어떤 인간적 제약 조건도 절대 업신여김을 만들어내는 동인(動因)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같은 현실 조건은 사람을 판단하는 세상기준이지 목사를 판단하는 교회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를 비롯한 모든 교회 사역자는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고 가르치면서 누가 봐도 스스로 복음 안에 살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순수한 복음만 전하면 목사의 권위는 절로 세워집니다. 진리가 권능을 갖는 이유도 바로 온전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뺏기지 않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권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말과 행동과 사랑과 믿음과 절제의 본을 보이는 것 위에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사실상 행함보다는 진리를 제대로 알아 올바른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더 중점을 두라는 뜻입니다. 또 바울이 읽으라고 한 것은 당연히 성경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사단에 미혹되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거짓 교사들과(1-3절), 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앞세워 육체의 연습을 강조하는 자들이(7,8절)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것에 절대 관심이나 신경을 빼앗기지 말며 오직 성경대로만 믿고 행하고 가르치라고 한 것입니다. 목사부터 영적으로 진리에서 멀어질 때에 필연적으로 그 권위가 떨어지며 업신여김도 쉽게 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이 아직도 하나 남았습니다. 디모데더러 바울 자신이 에베소에 다시 갈 때까지 오직 진리만 붙들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진리를 안 붙들어도 된다거나, 가서 그동안 업신여긴 자들을 혼내주겠다거나, 바울이 디모데 편을 서주니까 더 이상 업신여기지도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디모데의 영적 권위와는 별개로 개척한 목사이자 사도인 바울이 감으로써 더 이상 권위에 대한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 단순한 사실에 가장 중요한 의미가 포함됩니까? 업신여김은 업신여김을 당하는 자가 없애려 아무리 인위적으로 노력한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업신여기는 자들이 더 이상 업신여길 사유나 필요가 없어질 때에 비로소 그치는 법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전혀 업신여기지 않는 바울이 디모데의 자리를 대신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더 이상 그 문제를 염려할 필요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듯이 말입니다.
요컨대 남들이 완전히 업신여기지 않게 될 때까지 온전히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대로 행하는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으니 더 이상 업신여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거나, 이제는 목사 체면을 봐서라도 권위를 좀 세워달라고 구걸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진심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권위는 참 권위가 아닙니다. 인위적 권위는 금방 밑천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권위도 스스로 권위답게 세워져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작금 신자나 기독교나 다 불신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해결책은 하나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답게 믿고 행할 때에, 개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만이 업신여김이 사라집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완전히 거듭나서 그분을 닮아가며 그분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기독교도 절대로 성경을 그 진리대로 선포하고 가르치고 행해야 합니다. 현재 신자나 교회가 그렇게 하는 길을 모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할 뿐입니다. 업신여기는 자들이 문제가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을 짓을 멈추지 않기에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 안에 서있지 않으면 신자나 기독교나 또 그들이 이뤄내는 어떤 일도 거짓입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의 훼방과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따로 어떤 행사나 일이 필요치 않습니다. 신자 한 사람이라도 신자답게, 하나의 교회라도 교회답게, 특별히 한 명의 목사라도 목사답게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실제로 모든 것을 걸고 살고 죽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제 내가 신자다워졌다, 혹은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개독교가 아니라 기독교로 돌아왔다고 아무리 외쳐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행사는 아무리 거창하고 경건해 보여도 더더욱 의미가 없습니다. 경건을 행한 후에도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만 하는데 행하겠다는 정도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비유컨대 대학생이 유치원생처럼 굴면서도 자기는 대학생이라고 우기면 웃기다 못해 얼마나 불쌍한 꼴이 되겠습니까? 누가 뭐래도 성경말씀을 온전히 믿고 그대로 따르며 행하면 됩니다. 어느 누구가 알아주지 않아도 단 한 명의 신자라도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상마저 바라봐도 안 됩니다. 아니, 그저 그냥 순순히 믿은 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온당한 믿음 아닙니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하나님과 죄인들을 연결시켜 죄인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일만 전문으로 하는 자입니다. 목사부터 복음의 진리의 무한한 권능과 은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 안에서 철저하게 변화된 체험이 있고 또 항상 그 안에서 호흡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로 자신의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절제를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은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 앞에 동일한 본을 보일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자이며, 신자는 목사의 본을 통해 예수님의 본을 배우며 따르는 자입니다. 목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믿는 자들도 엉뚱한 길로 접어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주님 앞에 불려가는 그날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직분이, 가문이, 학벌이, 인간적 지혜와, 교회에서 부여해준 권한이 절대 목사의 권위를 세우지 못합니다. 목사는 영적인 일을 다루기 때문에 그 권위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전부를 깨트려 철저하게 낮아진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십니다. 성경의 진리를 끝까지 진리답게 붙들어야만 합니다. 이것 외의 목사 권위는 전부 종교적 놀음을 한 것뿐입니다. 또 일시적, 거짓, 심지어 사단의 장단에 놀아난 권위입니다.
요컨대 영적인 일에서만은 세상 방식을 통해 인위적으로 권위를 높이려 들면 오히려 절대 권위가 생기지 않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가장 풍성하게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참 복음에는 하나님이 복음답게 만드시는 당신의 능력이 반드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은 십자가의 방식이 아니고는 세상을, 특별히 신자와 교회와 기독교를 다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믿는 자에게 본을 보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목사의 권위는 세상이 끝까지 부인한다고 해도, 그 반대로 처음부터 칭찬하고 인정해 준다 해도, 하나님이 세워주신 십자가 복음의 권위가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권위가 전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목사로서 할 일은 전혀 하지 않은 꼴이지 않습니까?
7/24/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