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18:24,25) 요한의 세례와 성령 세례

조회 수 1014 추천 수 52 2009.08.26 19: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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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와 성령 세례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해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18:24,25)


구원의 길을 묻고자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또 세례 요한도 자신은 물로 세례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의 성령세례의 차이에 대해 정확히 정리되어 있지 못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나아가 방언 같은 외적 은사가 수반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라고 잘못 가르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본문은 자칫 그런 오해를 더 부추길 우려가 있습니다. 성경에 능한 자인 아볼로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회당에서 열심히 예수에 관해 자세히 가르치는 데도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고 가르치는 자인데도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뜻이 되므로 언뜻 방언 같은 은사를 받아야만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아볼로를 통해 요한과 성령세례의 차이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을 정확히 하려면 무엇보다 텍스트 내에서 먼저 해답을 구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아볼로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26절)고 합니다. 성경에 능한 아볼로보다 이들 부부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의 세례만 아는 그가 안타까워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으므로 당연히 그런 가르침 중에 아볼로에게 성령세례가 임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8절) 성령세례를 받았더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확신하여 이전의 자기 같은 유대인들에게 증거하더라는 것입니다. 방언 같은 은사를 받았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제 둘의 차이가 명료해졌는데, 성령세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며 요한의 세례는 아직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아볼로가 예수에 대해 자세히 가르친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한이 어떤 세례를 주었는지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마3:8,9)고 선포했습니다. 자기는 “너희로 회개키 위하여”(11절)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오실 메시야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어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요한의 세례를 단순히 도덕적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더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주겠다는 여호와의 언약 즉,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자동적으로 들어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주어서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할 것이라면 당연히 구원을 주는 세례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요구하는 회개도 택함 받은 족속이므로 구원을 이미 확보했다는 과신에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두 계층은 유대사회에서 어쨌든 도덕적으로는 가장 우월한 편이었지 않습니까? 엄밀히 따지면 도덕적 죄를 많이 지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적게 지었기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것을 회개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요한은 종교적 회개를 요구한 셈입니다. 형식적 가식적 습관적으로 종교 예식과 계명을 준수해 놓고는 하나님 앞에 할 바를 다했다고 여기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죄인이라고 매도하는 잘못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종교적 도덕적 우월성이 하나님 앞에선 오히려 얼마나 큰 교만인지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는 영적 회개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철두철미 깨달아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는 회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자기 대신에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고는 자신의 죄책이 도무지 씻어지지 않음을 확신하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요한의 세례는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한 준비라면 성령 세례는 실제로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게 합니다. 사단에 묶인 한 죄인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아볼로가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라는 뜻은 그분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도 몰랐던 것입니다. 바울처럼 영원히 살아계시는 주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대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옛사람이 죽어 없어지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단지 도덕적, 종교적 스승으로만 알아서 산상수훈 같은 가르침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 메시아이신 예수님 그분을 믿고 영접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 방언 같은 외적 은사가 수반되지 않으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옳으려면 어떤 뜻이 됩니까?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과정에 성령 세례가 전혀 없었거나, 성령이 아주 약하게 혹은 초보적 단계로 간섭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것이 순전히 인간의 자력에 의했거나, 아니면 인간과 하나님이 힘을 합쳐서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극단적으로는 방언 같은 은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 믿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는 해석도 가능해집니다.  

또 정말 그렇다면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이 “그 과정은 몰라도 방언을 하면 거듭난 줄 알라”고 대답했을 것 아닙니까? 주님은 그 대신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모르듯이 성령세례도 본인이 알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볼로처럼 예수만이 그리스도라고 확정적으로 전파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 없이는 사단에게 가로막혀 있는 죄인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추일 틈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진 채 세상의 쾌락과 죄악만을 쫓던 사람이 자기 스스로 다시 그분께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음도 전혀 인정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성령이 어떤 이에게는 강하게 다른 이에게는 약하게 역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사람에 따라 차등해서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은 언제 어디서나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다함없습니다. 그분의 권능이 조금이라도, 그 권능이 항상 완전하기에 이런 표현 자체가 모순이 있지만, 임하면 어떤 완악한 죄인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미친 성령의 권능에 마치 우열이 있는 듯 여겨지는 이유는 당사자 안에 죄악, 탐욕, 교만이 가로 막고 있는 정도와 또 하나님을 향한 갈증, 소망, 열심 등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럴 뿐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세상도 뒤엎을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었지만 그 역사한 산출이 각기 다르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각 신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권능의 양이 많고 적은 것이 아니며, 질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각기 다른 종류의 역사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모든 성도에게 개별적으로 다르게 간섭하신 것입니다.

방언 같은 성령의 외적 은사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진술하고 있습니까?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12:4-7,11) 성령, 주, 하나님은 동일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은사, 직임, 역사만 즉 역할과 결과만 서로 다를 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각 자에게 베푸는 권능이 그 질과 양에서 다르다면 이미 인간을 차별 내지 편애하는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성령세례의 첫째 역할과 목적은 한 죄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영을 가로막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쫓아내고 성령님이 대신 좌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권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절대로 구원에서 질과 양에 우열이 있거나 다른 종류의 구원을 주지는 않을 것 않습니까?

예컨대 어떤 이단처럼 해의 천국에 가는 일등 구원, 달의 천국에 가는 이등 구원 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연옥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기다리거나, 연옥에서의 보상여부에 따라 천국으로 올라가는 구원의 일시보류 내지는 대기성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임하며 그 결과도 동일하며 한번 구원은 영원토록 유효한 것입니다.

죄의 영원한 형벌에서 자유를 얻는 구원에 차별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의 대속 죽음의 효력이 사람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다시 죽거나 또 다른 인간의 공로가 보태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외적 은사를 받는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실질적 내용입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필연적으로 이런 논리적 결론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의 은사를 교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믿음이 성숙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며 그리스도를 더 잘 증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이 갈리는 것입니다. 즉 죽고 사는 둘 중의 하나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유익은 살아 있는데 더 잘 살게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한 죄인이 성령으로 거듭남에 차별이 있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부족, 훼손, 차별이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 영혼의 타락에도 마찬가지로 차별이 있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덜 죄인과 더 죄인이 있게 됩니다. 사단이 어떤 이의 사정을 봐주어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기 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성립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 예수님을 모르는 모든 인간은 절대 스스로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을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모두가 철저하게 타락되어 있기에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만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구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본문의 아볼로 같은 인격자, 학자, 도덕군자, 종교가도 예수를 스승으로 알았을 뿐입니다.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는 그분 앞에서 자신의 영적실체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요컨대 한 죄인이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엎드리면서 제발 주님의 보혈로 덧입혀 살려달라는 간구가, 아니 그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헌신하게 됩니다. 이것 외에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점검할 길은 없습니다. 이런 고백과 헌신이 없으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깊이 회개하고 종교적으로 경건한 의식을 거치고 심지어 초자연적 능력이 나타나도 성령세례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 아직 요한의 세례밖에 알지 못합니까?

9/26/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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