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기뻐할 수 있는가?(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사형을 앞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천국 소망을 견고히 붙들어야만 어떤 환난에서도 염려를 없애고 평강을 가질 수 있다고 권면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저작 당시의 상황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 공(共)히 적용될 수 있는 영원한 원리를 천명하기에, 오늘날의 신자도 매일 겪는 현실의 삶에서 이 권면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는 바울과 달리 일상적 삶에선 천국 면류관까지 그 신앙적 사고가 미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되어 영화롭게 될 것은 먼 장래의 일로만 여겨집니다. 이 땅에선 도무지 알 수 없고 짐작조차 못하는 미지의 일이라고 간주하고 맙니다.
이는 큰 잘못으로 비유컨대 경주하는 운동선수가 출발은 했는데 골인할 지점을 모르거나, 잊고 있거나, 보지 않고 뛰고 있는 꼴입니다. 만약 모른다면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즉, 십자가의 구원도 받지 않은 셈입니다. 반면에 잊고 있거나 보지 않고 뛰는 것은 그나마 변명의 여지는 있습니다. 사단과 세상의 훼방으로 종착지를 향한 시계(視界)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는 현재 상황에서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을 더 풍성하게 가꾸는 것이 신자가 행할 급선무이자 하나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신자가 천국을 미처 떠올리지 못해도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말씀을 열심히 읽고 간절하고도 뜨겁게 기도합니다. 염려 불안이 들면 의지적으로 물리치고 계속 힘들면 때로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 두려움의 영이 물러가라고 믿음으로 선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시적으로는 분명 효과는 있는 것 같은데 환난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 여전히 염려 불안이 끊이지 않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환경을 보지 말고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제는 또 의도적으로 주변 상황을 무시, 외면, 부인 심지어 포기하려 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과 교회 활동에 전무하기로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여전히 일시적 효과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 활동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괜찮은데 잠시 손을 놓으면 평강 대신에 염려가 자신을 주장합니다. 대체 무엇이 잘못입니까? 믿음이 너무 약한 것입니까?
역설적으로 말해 사실상 우리 믿음생활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신앙 활동으로 진정하고도 영속적인 평강을 얻지 못했다면 그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거의 모든 신자가 본문을 읽고 보이는 반응은 이렇습니다. “그래 맞아. 이제 항상 기뻐해야지. 정말로 기뻐해야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항상 감사하면서 기도해야지. 그럼 하나님이 나에게 평강으로 채워주실 것이야.”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환난이 닥쳤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또 감사함으로만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감사할 일이 생기면 그냥 찬양하게 되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 불안하니까 기도하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속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권면인데도 하나님 말씀이니까 무작정 그대로 따르려고만 합니다.
거기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지금껏 실패했으면서도 다시 계속 시도합니다. 내 믿음이 약해 말씀대로 따르지 못했으니까 실패했다고만 여깁니다. 말하자면 항상 기뻐하지 못했고 또 감사함으로 기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못된 생각 아닙니까? 항상 기뻐할 수 있다면 이미 신앙이 더 이상 소용없는 궁극적 종착지에 도착한 셈 아닙니까?
항상 기뻐하지 못한 것은 실패의 본질이 아니라 그 결과일 뿐입니다. 신자의 실패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정확하고도 온당한 근거와 이유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흔한 생각대로 하자면 기도하지 않았기에, 말씀 보지 않았기에, 심지어 항상 기뻐하려 노력하지 않았기에 평강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럼 기도만 하면, 말씀만 보면, 또 기뻐하려 노력만 하면 기뻐져야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기도하고 말씀 보았다는 것 자체가 기쁨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뻐하려 노력했다는 것은 더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렇게 맹목적, 광신적이지 않습니다. 바울도 구원의 완성이 이미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는 근거를 들어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했습니다. 평소에 천국까지 생각하지 못해도 이 땅에서 항상 기뻐할 분명한 근거를 찾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흔히 이해하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니 믿음은 바로 그 근거를 찾는 씨름입니다.
환난 중에 불안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언제 어떤 식으로 결말날지 몰라서입니다. 기도가 바로 환난에서 빨리 구해달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한다고 언제 어떻게 해결 될 것이라는 답을 얻습니까?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해도 여전히 불안한 것입니다. 또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그래서 열심히 말씀 보고 뜨겁게 기도해도 미래에 일어날 일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반면에 미래를 주관하는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미래를 보면 자연히 불안해지지만 절대적 공의와 사랑으로 미래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을 아니까 염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대부분의 신자가 범하는 잘못은 우선 말씀의 표면적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강단도 문제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니까 그저 그렇게만 하려 합니다. 그 이유나 근거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말씀 그대로 순종하면 되지 복잡하게 따지지 말라고 하며 또 그러는 것을 잘못된 신앙이라고 매도합니다. 기뻐해야 할 이유나 근거를 따지는 것이 오히려 순종을 더 잘하려는 목적인데도 말입니다.
더 결정적 잘못은 기도하여 미래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려 드는 것입니다. 단순히 많이 기도하고 말씀 읽으면 믿음이 자라고 형통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 할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신자가 누릴 평강의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맛에 자기를 바꿔 나가야 합니다.
본문에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근거를, 천국 소망이 미처 견고해지지 않아도, 아주 확실히 밝혀 놓았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세상을 이처럼”, 말하자면 당신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죽어 마땅한 자마저 오히려 긍휼히 여기사 당신의 독생자를 죽인 핏 값으로 구원해주실 만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신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절대 감소, 변경, 포기케 할 수 없다는 절대적 진리를 알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지금껏 저지른 실패를 한 마디로 줄이면 “항상 기뻐하지 않았으니까 염려 불안이 없어지지 않았다.”입니다. 너무나 비논리적 사고입니다. 같은 뜻의 행동을 반복해 말한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환경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을 현실을 외면 부인하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염려가 바로 그 현실에서 기인하기에 현실을 떠나선 도무지 해결 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또 하나님만 바라보라니까 그저 교회에서 종교 생활에만 전무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전혀 관심 없이 말입니다. 그분 대신 자기 믿음만 본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땅의 자기 미래도 알고 있었습니다. 곧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며 그 극심한 고통도 가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 너머의 부활 소망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처럼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들어 매어서 과연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확실히 알 수 있다면 말입니다.
10/15/2009
저도 주님 사랑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신자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