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6:9) 신자가 지녀야 할 완전한 지혜

조회 수 945 추천 수 41 2009.09.29 17: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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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지녀야 할 완전한 지혜


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완전한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미6:9)


하나님의 자비가 크다고 해서 무조건 무한히 참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자가 잘못하는 사사건건 매를 들지는 않지만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고 사생자가 아닌 친자식이기에 사랑의 매를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징계를 받을 때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순전한 믿음인지 여부가 판명됩니다.

선지자는 이미 7절에서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가나안 우상숭배종교를 본 뜬 것으로 인간이 신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뜻합니다.  허물과 죄를 위해 그런 것을 바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들의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징계 받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징계를 최대한 빨리 거두어달라고 최고의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허물과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나아가 하나님의 선을 행하겠다는 헌신과 실천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징계란 현실에선 환난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징계를 빨리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신앙으로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안일뿐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이 강수같이 흐를 수밖에 없고 물론 그 배후에는 제사장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찌니라.” 징계를 순순히 받으라고 합니다. 구태여 천천의 수양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제사를 부인하는 뜻이 아닙니다. 가식적 기복적인 제사보다 심령의 진정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선을 행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비록 징계가 환난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순순히 그냥 당하라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모든 일이 숙명이니까 기도도 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환난의 원인이 하나님의 매인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인지, 사단의 훼방인지, 다른 이의 죄로 인한 피해인지 등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기까지의 모든 경과를, 특별히 자기 허물과 죄가 있었는지 기도하며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 그 죄를 회개하고 그분과의 관계부터 올바르게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 맞고 있는 매를 언제 어떻게 거둘지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리라는 원리를 순순히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환난은 마땅히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한 지혜”라고까지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의 수준과 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물론 어지간한 믿음으로 환난의 원인을 정확하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징계인지를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수가 없습니다. 환난을 그치게 해달라고 간구는 하되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기도도 동시에 해야 합니다. 성경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모든 신자를 완전한 종교인으로 만들려는 뜻은 하나님에게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알게 모르게 지었는지 모르니까 항상 자신의 영적 실체부터 먼저 살피라는 것입니다. 또 환난이 닥치면 그저 빨리 구원해달라는 기도밖에 못하는데 이런 완전한 지혜를 깨달을 수 있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세상만사가 갈수록 복잡하고 험악해집니다. 모든 이가 서로 더 많이 죄지으려 경쟁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신자를 삼키려고 문 밖에 서성입니다. 신자 스스로도 옛사람의 썩어질 구습이 무시로 속에서 꿈틀거립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지 않고는 승리할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정말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죄로 인해 징계 받는다는 사실을 신자 본인은 쉽게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 기도를 많이 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그 정도로 선하거나 믿음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너무나 크셔서 어지간한 잘못이나, 한두 번의 죄로는 징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아주 크고 명백한 죄나, 습관적인 잘못에만 벌을 주시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때에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해야 합니다. 빨리 징계를 거두어달라는 뜻으로 헌금이나 봉사를 많이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죄를 지었으니 순순히 그에 적합한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모나 선생님에게 잘못을 범해 놓고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 하나님에게만은 죽어도 벌을 못 받거나 안 받겠다고 그리도 떼를 씁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그저 불평불만만 늘어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명백히 큰 죄나 습관적 죄로 징계를 주건만 막상 신자 본인은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합니다. 혹시 어렴풋이 눈치 채도 일부러 외면, 부인하려 듭니다. 기껏해야 자기변명과 핑계를 대기 바쁩니다. 그런 핑계조차 없으면 뭔가 종교적 보상행위를 통해 상쇄하자고 덤빕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본질입니다.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해서 신자가 포악, 음란, 방탕의 죄를 즐기자고 덤비지는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습니다. 최소한 그럴싸하거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다고 우깁니다.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기 의를 내세우려 드는 지독하고도 끈질긴 타성입니다. 자신의 영적 실체가 얼마나 가난한지 잘 보지 못하는 무지 내지는 보아도 부인하는 완악함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배경에는 신자가 되었어도 여전히 세상의 안락과 형통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었으니 복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든가 최소한 환난은 없어져야 한다는 아주 뿌리 깊고 근본적인 사고가 신자가 짓는 모든 죄의 원천입니다. 그런 잘못된 생각의 발단 또한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입성하기 합당하게끔 거룩하게 바꾸는 것을 가장 우선적인 목표로 삼기에 신자를 대하는 모든 섭리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징계라는 사랑의 매를 들고 또 신자는 순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져야 할 완전한 지혜가 신령한 기도나 은사를 통해 장래 일을 예언하거나, 현실의 여러 대체 방안 중에 어디로 가는 것이 더 성공적일까 구체적으로 알아내거나,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족집게처럼 지적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세상과 사람 앞에 높이려는 너무나 오래 되고 견고한 진을 허물 수 있는 새로운 신앙적 사고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명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분별력입니다. 또 그럴 때에는 순히 받고 자신부터 성령의 씻음의 능력에 의지하여 깨끗케 할 수 있는 세정력입니다. 나아가 그 깨끗하고 가난해진 심령의 바탕 위에 하나님의 선을 자기 주위의 적은 자에게서부터 행하는 실천력입니다.

선지자는 지금 완전한 지혜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주님답게 경배하라는 뜻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분이 나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알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신자가 오직 공의를 세우고 인자를 사랑하며 당신과 동행하는 것을(8절) 원하십니다. 말하자면 환난 중에 무조건 구해달라고 매달리기보다 자기부터 돌아볼 줄 아는 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지혜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9/29/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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