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 저주 받을 자들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9)
흔히들 기독교 신앙에 상식과 이성을 개입시키면 크게 잘못된 일인 양 말합니다. 신앙이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영역을 다루기에 상식과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긴 하지만 그것들에 반(反)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상식과 이성의 한계 안에 묶어 놓지 말라는 것이지 그것에 입각한 판단조차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상식과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는 데서 오히려 더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성경에 엄연히 기록된 대로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떤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그 종교의 경전을 온전히 그대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성경을 제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벌써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그중 대부분은 믿고 일부만 믿지 않는다고 해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믿지 않는 부분이 아무리 적다해도 자기 임의로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 차지한 아주 큰 죄입니다. 차라리 자기 이름으로 종교를 하나 창시하는 것이 낫습니다. 구약은 믿지만 신약은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와 이슬람처럼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유대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다른 복음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정죄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을찌어다”고 두 번이나 선포했습니다. 아니 “전에 말하였고 다시 말한다.”고 했으니 수시로 경고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다른 복음이 바로 오늘날 임의로 성경 일부는 믿고 일부는 믿지 않는 행태와 동일한 차원의 신앙입니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 은혜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여러 절차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면 부인했다면 아예 다른 종교라고 치부될 것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하고 따로 다른 복음을 덧붙였습니다. 마치 성경을 임의로 빼고 더하는 행태이지 않습니까?
율법도 성경의 일부이지 않느냐라고 강변할 수는 없습니다. 동물 희생의 속죄제는 예수님의 영단번의 대속적 죽음으로 대체되었고 여러 세부 조항들도 예수님 당신께서 직접 그 뜻은 이어서 지키되 형식들은 폐기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형식을 다시 부활시키겠다고 덤볐으니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 임의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믿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자칭 타칭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아니 바로 본문조차 그 말하는 대로 믿지 않지 않습니까?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한다고 해놓고 알게 모르게 그것만으로 부족하니까 다른 것도 함께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복잡한 신학적 논쟁은 제쳐두고 성경이 지금 그런 자들은 저주받는다고 크게 강조하고 있는데도 그러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종교에선 절대 그런 일이 안 생깁니다. 구약을 일부만 믿고도 유대교인이라고 또 코란을 암송하지 못하고도 회교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궁극적 절대자가 없는 불교나 무엇이나 신이 될 수 있다는 회교도라면 몰라도 기독교인이 성경을 부인하면 그 믿음은 둘째 치고 너무나 몰상식한 처사 아닙니까? 그것도 바울이 큰 음해를 받고 교회 안에 분쟁이 격심해질 정도로 더 큰 세력을 얻고서 말입니다. 오늘날 교계의 실정도 그 때와 하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참으로 은혜로운 것은 오히려 이런 사태들이 그리스도 복음만이 참 복음임을 더 확실하게 증명해준다는 사실입니다. 가짜를 본 뜬 가짜는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진짜에만 가짜들이 진짜 흉내를 내어서 어떻게든 이익을 보려고 들어붙는 법입니다. 명품에 짝퉁이 생기지 일반 브랜드를 모방해 짝퉁 만들어 파는 바보는 없습니다.
나아가 이처럼 이성과 상식을 초월한 일들이 다른 종교에는 없고 기독교 안에서만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 자체가 그것들을 초월한 종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성과 상식 자체를 부인하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의 지정의 영역만을 다루지만 기독교만은, 단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온전히 믿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죽이는 차원을 다루어 영생과 영벌을 가름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 낸 종교입니다. 자연히 인간 스스로의 수양과 선행을 강조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진리, 그것도 십자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진리는 그들로선 아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상식과 이성으로 한번 따져 보기 원합니다. 인간이 지정의적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아니 제대로 올바르게라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 없는 모든 인류가 유사 이래로 그렇게 노력했어도 결국은 실패로 끝났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해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실토를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아무리 훈련을 쌓은 훌륭한 인격의 지정의로도 자기 영혼의 흐름은 도저히 통제할 수 없더라는 뜻 아닙니까?
마음이 자기를 다스리지 자기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고 실토했듯이, 지정의가 영혼을 다스리지 않고 영혼이 지정의를 다스립니다. 인간 스스로 통제 가능한 부분은 지정의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선하고 경건하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절대 스스로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단에 묶여 있는 타락한 영혼을 예수님의 영으로 거듭나게 만들지 않고는 구원의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당신께서 택한 자녀를 그 권능으로 구원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당신께로 나올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 위에 더 보탤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보태면 십자가 자체를 부인 아니 대체하는 죄로 저주 받고 또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바로 지금 성경이 엄숙히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고도 어떻게 감히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지 참으로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십자가 은혜를 성경대로 온전히 믿는 신자 가운데도 실제 행함에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컨대 기도하면서 혹시라도 내 정성이 부족해서 응답이 더디지 않는지 의심한다면 십자가 은혜 위에 내 임의로 뭔가 또 보태려는 의도 아닙니까? 세상 어느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지 못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딘 것은 정욕으로 구한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과 나 사이에 때와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럴수록 더 십자가 은혜에만 의지하여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제대로 믿은 후에도 십자가를 잠시라도 놓치면 자칫 바울이 선언한 저주에는 빠지지 않을지라도 사단의 꾐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오직 그 은혜에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 밖에 있는 자에게는 아무리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저주는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문제는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그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지 알아 제대로 은혜답게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붙들고 있는 신자에게만 관심을 두고 계심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최소한의 상식에 걸맞게 성경을 온전히 믿는 기독교인들 말입니다.
4/16/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