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된 최고 큰 축복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6:39-41)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도 아주 고급한, 혹은 인간이 가르친 중에는 최고 좋은 도덕률이라고 대체로 인정합니다. 문제는 신자들마저 그 정도의 평가로 그치는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선 감히 생각도 못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말씀을 보고 듣는 순간 초자연적 기운이 흘러넘쳐서 저절로 그분 앞에 항복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오히려 대부분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오직 당신께서 은혜를 주신 자에게만 살아 역사합니다.
그분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다 그분의 사정을 비춰주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죄인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실 목적으로 하신 말씀이라도 여전히 인간의 언어라는 통로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어리석고 죄에 찌든 완악한 자연인의 입장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또 다른 종류의 격언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반면에 지금 실제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고급한 도덕률 이상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일관된 맥이 있습니다. 또 언제나 그 맥은 인간의 개별적 행동들(doing)이 아니라 존재전체(a whole being)의 변화를 목표로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하자 있는 몇몇 성품의 개선에 머물기보다 아예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은혜를 주려고 작정한 자에게는 그분의 가르침은 정말 우레와 같은 하늘의 음성으로 들리고 그 살아 역사하는 권능에 따라 자신의 전부가 점차 바뀌어 가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전혀 들리지도 않는 자와는 정반대로 정말로 심오하고 신령한 의미까지 깨닫게 됩니다. 또 그런 깊은 뜻은 특이하게도 논리적으로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한 부분에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일반적 교훈과 완연히 다르다면 통상적으로 합당한 논리보다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더 주목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도 먼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는 비유를 말씀했습니다. 그럼 선생부터 소경에서 나음을 입어야 제자들도 눈을 뜰 수 있다고 해야 논리적 흐름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가 온전케 되어서 그 선생과 같아지라고만 말했습니다. 스승 소경이 제자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졌는데 제자만 눈을 떠서 탈출하라는 셈입니다.
인간에게라면 마땅히 적용될 이런 논리적 부자연스러움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전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첫 번 문장은 다른 이들의 가르침을 소경에 비유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소경일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둘째 문장의 선생이 비로소 당신을 지칭합니다. 또 그래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닮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케 될 차원까지 말입니다.
당신께서 하나님으로 온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으로 온전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바로 앞의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6절)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가르침입니다. 바꿔 말해 제자더러 인간 중에 최고로 경건하고 의로운 수준이 되라는 정도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으로서 너희에게 명하는데 나 곧, 하나님처럼 온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입니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까? 혹시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면 인간에게 무조건 최대한도, 아니 무한대의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온전케 되는 모습의 예로 든 것이 무엇입니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자가 되지 말고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부터 빼라”고 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부터 겸손하고도 정직하게 점검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신자가, 아니 불신자라도 어느 정도 달성 가능한 계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여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이 가장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남부터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이(41,42절) 소경 인도의 비유(39,40절)와 나무의 종류에 따라 열매가 각기 다르게 열린다는 비유(43,44)의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 두 비유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 눈 속에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소경된 실상(實狀)이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소경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나무가 소경 나무였다는 것입니다. 내 눈의 들보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면서도 남의 눈에선 티라도 들춰내겠다는 심보가 항상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소경으로 태어나기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참 실체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그렇게 된 까닭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아니 밀어내고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형통과 안일만 추구하며 살려니까 그 일에 방해되는 하나님도 없애버린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된 후에 나타나는 가장 확실하고도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남의 눈의 티부터 보는 너무나 끈질기고도 고쳐지기 힘든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잘못은 어지간해선 보지 못하는 대신에 남의 잘못은 금방 알아챕니다. 남의 잘못이 자신의 만족, 행복, 형통에 방해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전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남의 눈의 티만 잘도 골라내는 습관도 인간이 타락하여 이미 못된 나무가 되었기에 그 열매는 당연히 못된 것으로 맺히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전부가 악해졌기에 모두 소경이 되어서 서로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하니까 함께 구렁텅이로 밀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련의 이 세 가르침의 결론(45절)으로 내린 말씀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남의 눈의 티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악한 심보가 마음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가득하다는 것은 마음에는 그것밖에는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존재 전체가 너무나 더럽고 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도덕적 측면에서 단지 불신자들보다 더 나아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우월한 상대적 의로움으로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의롭다고 칭송 받은 바리새인들만 저주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과 같아지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가르침도 신자이기에 덜 교만하고 더 겸손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계명은 또 동일한 주제에 일관되게 연결된 말씀입니다. 바로 선대하는 자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심령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 증거는 역으로 따져 남의 상황, 신분, 소유 등에 일절 상관 않고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온전하심 같아지라고 말하는 그 온전하심은 100% 절대적으로 온전한 것입니다. 단 한 치의 죄악이 개입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원수까지 용서하고 선대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까지해줄 수 있습니까? 자꾸만 거의 자동적으로 눈에 먼저 들어오는 남의 티는 아예 무시하거나 전부 용납하고서 사랑하는 그런 일을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더러 하자 하나 없는 완벽하게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도저히 그럴 수 없음을 철저하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우리의 영적 실체가 아직도 남의 눈에 티는 잘 건져내어도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수준에 뒤쳐져 있음을 솔직하고도 겸허히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나를 선대하는 자만 자꾸 선대하고 싶은 본성이 더 강함을 깨닫고서 영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 철두철미 애통해 하라는 것입니다.
저를 필두로 우리 모두는 예수를 열심히 믿고 있어도 영적 시력은 별로 되살아나지 못해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 같은 일을 너무 잦게 행합니다. 그 해결책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부터도 도무지 당신께서 선대할 만한 자격과 조건이라곤 하나 없었고, 아니 당신의 원수 되었음에도 다 용서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절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의지적으로 믿음을 더 강하게 굳히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믿음까지 포함해서 나의 실상을 철저히 재해부하는 작업입니다. 내 속에 남아 있는 영적 소경된 부분을 하나 남김없이 다 깨부수는 일입니다. 믿음마저 순전치 못하고 온갖 탐욕과 죄악의 공해로 찌들어 있음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그런 깨고 부수는 작업이 단번에는 절대 가능하지 않음을 알기에 평생을 두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나를 선대는커녕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적 같은 이웃을 만날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남의 눈의 티가 내 시야에 습관적으로 먼저 비춰지는 순간 내 눈부터 먼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에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도덕적 교훈을 넘어서 나라는 존재 전부를 바꾸는 온전하신 능력으로 나타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아래 말씀이 비로소 살아있는 절대적 진리로 역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우리 모두가 예수를 몰랐을 때는 더럽고 추한 소경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온전한 나무에 온전한 가지로 붙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기만 하면 당신의 말씀의 권능이 우리를 실제로 깨끗하게 씻어서, 비록 그 세기는 약하고 속도도 더딜지라도, 당신의 장성한 분량으로 이끌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신자만의 가장 큰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10/11/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