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3:1 악한 권세에도 굴복해야 하는가?

조회 수 803 추천 수 29 2011.01.01 0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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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권세에도 굴복해야 하는가?


[질문]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 13:1)

지도자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당연히 신자들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불의한 지도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글을 쓸 당시의 초대 교회 상황을 보면 이방인인 로마의 압제와 핍박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권세에 순복하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군중들과 제자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로마정부나 헤롯 정부에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말씀하시며 순복하도록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저를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예를 보면 일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옳은 일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말씀에 어긋난 행동이었습니까? 어떤 분들은 어떤 일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먼저이기 때문에 만약 어떤 정부나 지도자가 이를 반해서 어떤 일을 요구하면 그 때는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일본 정부가 신사참배를 교회에도 강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먼저 섬기기 위해 저항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만약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했다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일본과 같이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착취했지만 다만 기독교를 장려했다면요. 그럼 이런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만약 목사님의 견해가 저항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주 기철 목사님과 같이 비폭력 무저항, 오직 순교와 같은 간접적인 저항만이 허용됩니까? 아니면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허용이 됩니까?

[답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곤혹스러워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앞뒤로 비교 분석해 보아도 오히려 혼란만 가중됩니다. 그럼 과연 정답은 없고,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악한 권세에 굴복한 것입니까? 항거한 것입니까? 항거한 것입니다. 그 방법만 그때까지 세상에는 없던 신적(divine)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 주제는 기독교의 본질 즉, 성경에 일관되게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핵심적인 뜻이 무엇인지와 관련해서 따져봐야 됩니다. 단순히 신자가 악한 권세에도 굴복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라는 한 가지 행동을 따로 떼어서 보면 해답을 얻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 신자가 행할 일의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모호하게 이해하는 것도 그 원인입니다. 나아가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혼동하는데서 기인하는 의문입니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이런 점들에 대해서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본질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b)고 했습니다. 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b-3)고 약속하셨습니다.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신자들과 잠시 계시다가 승천하시기 직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a)고 당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모든 초점이 모입니다. 살펴 본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십자가 달리기 전의 약속과 승천 시의 당부와 지금도 천국에서 하시는 일 모두가 그 초점과 연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결국 곧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라고 선언합니다.

한마디로 한 죄인이 성령의 중생함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외의 성경의 모든 진술은 바로 그런 믿음을 더 견고케 하거나, 더 세밀하게 설명한 부차적 내용이 됩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구원 외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기독교와 무관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 찬양, 감사, 선행, 구제, 봉사, 사단 및 세상 죄와의 싸움 등등 모두가 구원 받은 신자로선 마땅히 행할 바이자 참 신자라면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이는 또 다른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준비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모든 측면이 구원에 초점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저 혼자서 잘 믿기만 하면 되고, 악한 것의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싸우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기독교가 교회에 신자끼리 모여서 찬양하며 예배만 드리면 되는, 그래서 사회와 완전히 고립된 종교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온갖 모순, 질곡, 환난, 재앙, 죄악이 들끓고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아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데에는 시대, 지역, 인종, 문화, 종교를 넘어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원인과 해법은 각양각색입니다. 범(凡) 기독교 진영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모든 잘못의 궁극적 원인이 사탄에게 있다고 판단하면 사탄을 대적해 물리쳐야 하니까 은사, 신비주의로 흐릅니다. 또 사회 구조가 잘못되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긴 것이 원인이라면 정치적으로 개혁시켜야 한다는 반동신학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도덕적 잘못을 범한 것이 원인이라면 산상수훈을 열심히 실행하자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장하는 궁극적 원인은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의 영혼이 타락했기에 모든 죄악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이 믿음의 결국이 되며, 또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신 영생의 길도 성령으로 거듭나 그 영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거부하던 자에게 성령이 간섭하여 그분을 알고 동행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면 당연히 그분 뜻대로 살기를 소망하며 자기가 소속한 공동체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빛으로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목적과 수단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營)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2-54)

예수님이 잡혀가시던 날 밤 수제자 베드로가 용감하게 칼을 빼서 제사장 하속의 귀를 베자 꾸짖으며 하신 말씀입니다. 먼저 검을 가진 자 검으로 망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세상사에서 흔히 발생하는 인과응보의 원리나,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수단도 좋아야 한다는 진리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 영(지금으로 치면 사단 규모의 군대)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당장에라도 로마의 압제와 부패한 유대관원들을 물리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또 다시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다는 즉,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는 뜻으로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산상수훈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까지 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도 그랬고, 바울도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한 번도 항거하지 않고 복음만 전하려 노력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이 땅으로 불러온다는 것은 세상에선 최고 엄청난 일입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 로마와 유대를 물리칠 수 없다거나, 고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선 성경에 예언한 일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습니다. 수난의 종으로 와서 십자가에 달리어 죄인을 구원하겠다는 태초 전부터 마련된 계획을 이루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장에서 말한 기독교의 본질 그대로입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의 궁극적 원인은 인간 영혼의 타락 때문이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한 영혼씩 구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로 또 다른 자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방안으로 세상을 구속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b) 또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땅 끝까지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아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 기독교가 최선의 도덕률을 자랑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똑같은 방법으로 갚아선 절대로 상대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기에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 더 우선입니다.

수단까지 선해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목적 자체가 세상의 어떤 종교나 도덕과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와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때에 천국에서 큰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이 무너지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기독교적인 것과 신자다운 것

이런 맥락에서 많은 신자들이 정말로 신자답게 살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셔서 구원해주셨기에 이제부터 정말 거룩하게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너무나 옳은 반응이며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의인이 되는 것으로 그칩니다. 어떻게 하든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냅니다. 또 그래야 올바른 기독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야 어떻게 되던 죄인을 구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런 목표를 품게 된 것은 물론, 그 목표를 향해 부단 없이 진군한 것은 바로 주님과 신실한 교제를 이어갔기에 가능했습니다. 신자가 주님과 동행하면 자연히 의롭게 살게 됩니다. 신자에겐 주님과의 동행이 목표이며 그 목표가 달성되면 도덕적 종교적 삶은 당연한 결과로 감추려야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더러 열일을 제쳐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만 하는 광신자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든 마시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랑 행해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와 향기가 드러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 방향, 목표를 볼 때에 누구라도 그가 따르는 예수를 함께 믿고 싶은 마음이, 최소한 관심이 생기도록 영적 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모든 신자가 인생의 좌우명이자 목표로 삼아야할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적이고 또 그런 일을 교회에 함께 모여서 큰 행사를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봉사, 구제, 선행, 또 지금 주제가 된 악한 권세에 대항하는 일 등을 힘을 합쳐 열심히 수행하려 합니다. 또 다시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 내지 우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바로 질문하신 내용 중에 일제시대에 기독교인들도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독립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기독교인들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기독교인들이 꼭 주도한 것도 아니었고, 기독교인들이 없었으면 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천도교, 불교 신자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국민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참여했을 뿐입니다. 일본 당국에 한국의 전 국민이 하나 같이 독립을 갈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기독교인이 어떤 의로운 일에 참여 내지 주도했다고 다 기독교적인 일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신자답게 행할 때만 기독교적인 일이 됩니다. 반면에 기독교적인 일을 하려다 오히려 비성경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예컨대 성전 건축으로 교회 분쟁이 나서 서로 법원으로 끌고 가는 일 같이 말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신자답게 살면 그것이 바로 가장 기독교적, 성경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장 기독교적인 일은 신자 각자가 자기가 처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한 알의 썩어 없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처럼 신자가 행하는 일과 모이는 단체 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임하고 또 주위로 자꾸 조금씩 번져나가야 합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십자가 복음의 빛이 전염병처럼 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 한 사람이 자기 자리를 신자답게 온전히 지키면, 그래서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악은 없어지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한 사람으로도, 그것도 비폭력적으로 세계 최강 애굽과 대항토록 해서 당신의 이백만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엘리야 한 사람으로도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항토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곳곳에 숨겨둔 당신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만 이끌어 가십니다.  

악한 권세에는 항거해야 한다.

이상의 세 가지 전제를 가지고 질문하신 주제를 본격적으로 살펴봅시다. 세 전제를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봅시다. 기독교의 본질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비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세상 문제의 근본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각 신자가 밀알이 되는 삶과 함께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셋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면 이 답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각자가 옳다고 믿는 고유의 방법에 따라 악한 권세를 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악한 권세를 다루는 것은 어떤 면에선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폭력 살인이나 테러처럼 부적절하거나 무자비한 복수극을 자행하는 것을 제하고는, 틀린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악을 제거하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그 방법도 선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이 노하실 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또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비폭력이 겉으로만 저항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은 아주 강력한, 어떤 경우는 최고로 강력한 저항 수단이 됩니다. 쉬운 예로 군대에 가면 소위 고문관이라 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센 기합을 받아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입니다. 나중에는 상관이 때리다, 때리다 지쳐서 그냥 열외로 제쳐둡니다. 아무리 두들겨 패도 피를 흘리며 다시 때리라고 일어나는 상대는 나중에 오히려 무서워지고 슬슬 피하게 되지 않습니까?  

인도의 간디가 무저항주의로 유명하지만 평화적 인도적 이유 외에도 당시 인도 군중에는 효과적인 현실적 저항 수단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무기보다는 더 큰 효력을 나타냈고 또 영국과 인도 양쪽에 다 유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저항주의에도 두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상대를 반드시 무너트리겠다는 분노와 증오를 품고서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어서 혹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채택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는 정말로 인도적 평화적 목적을 갖고 경제적 사회적 육신적 손해 없이 함께 타협하여 상생(相生)하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무저항주의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 삼의 동기가 있습니다. 자기는 죽더라도 상대를, 그것도 원수이자 자기를 핍박하는 자임에도 먼저 살리겠다는 뜻입니다. 또 그러려면  사실상 자기부터 먼저 죽어야만 가능합니다.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심하게 말해 모독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이 땅의 악의 세력을 당장 무너뜨리는 것이 기독교가 행할 본질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저 자기가 처한 곳에서 염병처럼 복음을 번져나가게만 해야 합니다. 무저항도 오직 상대에게 복음의 새 생명을 주어서 살리기 위한 방편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예수님, 스데반, 바울, 주기철 목사 뿐 아니라 독일 나치 제국에 항거한 본회퍼 목사가 그러하지 않습니까?  회퍼 목사도 초대교회의 신자가 그러했듯이 분명히 악의 세력에 항거했습니다.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기독교적으로 즉, 기독교라는 거창한 이름을 걸고서 항거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밀알 된 신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신자답게 산 것뿐입니다.  

반면에 십자가 원정은 실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오명만 남겼습니다. 또 서구제국들이 기독교 포교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아프리카 남미를 수탈한 것은 정말 큰 죄악이었습니다. 물론 이 두 사건 모두 나름대로는 일부 선한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행하지 않았고, 그마저 기독교적으로 세력화 하는 방법으로 성취하려 들었기에 오히려 비기독교적 결과만 낳았습니다.  

질문자께서 오해하는, 사실은 이런 의문을 갖는 모든 신자들이 갖는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악한 세력에 항거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위에 있는 권세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밝혔기에 이 문제는 그 목적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롬13:3,4 발췌)

관원들의 권세는 세상의 악을 하나님 대신에 통제하라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자들이 그러지 못하거나 오히려 악 자체가 되어버리면 끝까지 굴복할 이유나 필요는 없습니다. 단 기독교의 본질을 침범하는 일이 아닌 이상에는, 예컨대 로마 황제와 예수 중에 하나를 택해 경배하라는 요구 같은, 기독교라는 명분을 갖고 항거하지 말고 신자 개인의 자격으로 항거하면 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영혼 구원 외의 일을 하면 자칫 기독교의 본질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뿐이라고 오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대외적 공식적 거창한 일을 통해선 예수님의 이름이 거의 높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도 하나 있습니다. 영혼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다가  반대의 극단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기독교가 사회와 담을 쌓은 고립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이 본질이고 우선이긴 해도 일반적으로 선한 일 역시 분명 하나님의 일이자 신자가 감당해야 할 의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주일에 교회 가도 주중에는 일반 직업을 갖지 않습니까? 자기가 몸담은 정치, 사회, 과학, 예술, 운동 등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훌륭한 성취를 달성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도 당연히 악한 권세에 항거해야 합니다.

쉬운 예로 4.19 항쟁에 신자가 교회에서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독재자의 영혼이 불쌍해서 구원해달라고 데모 대신 교회에 남아 기도했다고 해서 틀렸다고도 말은 못합니다. 그러나 양쪽 다 예수님처럼 “원수는 끝까지 사랑하되 그가 저지른 죄악은 철저히 저주하는” 자세로 데모와 기도에 열심히 참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극적인 방안은 폭력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신자가 선행, 구제. 봉사에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처럼 악의 세력에 항거도 하되 기독교라는 이름을 걸고 단체로 모여서 거창한 행사로 행해선 안 되며, 또 악을 무찌르기 위해서 동일한 악인 폭력을 동원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전쟁은 이와는 다른 경우입니다.)    

케이스 별 분석

질문자께서 제기한 케이스들을 구체적으로 따지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케이스 (1): “일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옳은 일입니까?”

당연히 옳은 일이고 신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하여 말과 문화를 말살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은 분명히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능한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삼일 독립만세 운동도 사실상 평화운동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선 간디처럼 현실적으로 그런 방안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무기를 사용하는 독립군에 참여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치르는 형국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치르는 형국”이라는 표현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정식전쟁이 아니지만 전쟁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란 일본군인 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살인이 아닌 일본국 군대를 대상으로 나라를 지키는 싸움입니다. 또 기독교인 신자 한 사람이 아닌 한국 군대의 사병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나라 간에 정식 전쟁이 나면 신자라도 반드시 참전해야 합니다. 독립군 항쟁이 그런 전쟁과 같은 의미이기에 신자가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든 항일투쟁이든 기독교의 본질적인 일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독교가 아니면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인만 행했던 일도 아니며, 기독교가 주도한 일조차 아닙니다. 신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에 참여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입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그 일에 참여한 신자도 당연히 국민으로 참여한 것이지 신자의 자격이 우선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객관적인 구분을 먼저 정확히 하지 않고 단지 신자가 행했으니 기독교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삼일운동은 한국 국민이 행한 한국의 독립운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사회적 일을 벌이지 말고 각자가 신자답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신자답게 사는 것 중에 중요한 일입니다.

반면에 일제 시대에도 신자가 가만히 전도만 하면서 살았다고 해서 비신자라고 비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당장에 나라 별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모든 신자가 기 다 나서서 전쟁이나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당시 로마 압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했기에 열심당만 하나님이 사랑한 것도, 아니면 폭력적으로 항거했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열심당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것도,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자기 안에 진정으로 예수를 모셨다면 열심당원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끊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포기하라는 신사참배를 강요해 온다면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혹시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여전한데 너무나 죽음이 두려워서 굴복했다면 나중에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진짜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인지는 본인과 하나님만 알고 또 그 진심을 알아서 구원해 줄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 갖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초대교회 당시 신자들이 이스라엘 독립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선 각지에 교회를 세워서 기독교의 기초부터 확고하게 다져야 할 시대적 책무가 있었습니다. 또 로마는 비교적 식민지의 문화, 관습, 종교 등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가 사회적 악을 제거하는 책임을 그런대로 충실히 행했습니다. 현대의 어떤 나라보다 더 민주적이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인권, 자유,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인 인류애(humanism)적 가치도 인간 사회의 발달과 함께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선각자들의 희생을 딛고 얻어진 것입니다. 단순히 초대 교회 당시에 교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지 않았다고 그 잘못을 비난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케이스 (2): “만약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했다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일본과 같이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 착취했지만 다만 기독교를 장려했다면요. 그럼 이런 경우에는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이야말로 기독교적인 것과 신자답게 사는 것을 잘 분별해야 할 케이스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국가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 시킨 것은 사실상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그 나라의 정치세력이 한 일입니다. 여전히 정치적인 잘못을 저지른 악에 불과합니다.

또 그들이 비록 기독교를 전했다고 해서 그 잘못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의도적이었건, 기독교진리를 제대로 몰랐건, 어쨌든 비성경적인 일을 했으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오용한 것입니다.

그들도 반드시 그 일을 원상 복구시켜야 하며 진정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거는, 올바르게만 진행된다면 물론 모든 신자가 다 연약하긴 마찬가지라 그렇게 되는 것이 아주 힘들긴 하지만,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1) 케이스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신자는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신자보다 국민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 학생도 교회 활동과 동시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단 이 때도 가능한 비폭력적 운동에 치우쳐야 하겠지만 적극적인 활동을 해도 됩니다. 역시 기독교라는 명분으로 세력화 시키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가능한 말로써 설득하는 절차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정치적 세력이 그 일을 행한 것이지만 일제와는 달리 그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기독교 이단과의 투쟁이라고 봐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처음 전해 받는 한국의 입장에서 그들보다 더 정확하게 기독교의 본질을 알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기독교의 본질을 제대로 깨우쳐 신자답게 사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입니다.  

신자가 정작 항거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 위에 있는 권세가 분명히 악하다면 신자는 적극적으로 항거해야 합니다. 적극적이라는 말이, 전쟁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폭력까지 용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말 그 사람보다 그가 행한 죄악을 저주하기에 모든 열심을 다해서 선으로 바꾸겠다는 자세를 말합니다. 또 그 당사자는 너무나 불쌍하기에 내가 바꿀 수는 없지만 주님의 은총이 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자라면 북한의 악한 정권은 미워하고 항거해야하지만, 그 정권의 하수인들과 심지어 김정일까지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솔직히 그가 너무나 우매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엄청난 심판이 눈앞에 빤히 기다리지 않습니까? 신자도 인간인지라 그가 미운 감정은 자연스레 들지만 그 차원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 자기 가까운 사람을 향한 미운감정부터 주님 안에서 바르게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혼 구원 외에도 신자는 자기 직업을 통해서 일반적으로 선한 업적을 달성해 인류에게 공헌해야 합니다. 예컨대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는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는 대신에 노예제도를 없애는 데에 평생을 바쳐, 그것도 비폭력적인 방안으로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결국은 영국의회로 노예폐지법을 통과시키게 했지 않습니까? 바로 악한 권세에 항거하는 가장 기독교적인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신자는 일상의 삶에서 항상 악한 권세와 항거하고 있는 셈이며, 또 그 일에 정말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예수님이 최후의 성찬 때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일차적으로 당장에 닥칠 종교적 핍박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의 자유가 확보된 미국의 신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屬)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신자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선 안 됩니다. 간단히 말해 부정부패에 절대 연루되어선 안 되며 죄와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예컨대 학생이라면 결코 치팅(cheating) 해선 안 되며, 회사원이라면 직무상 횡령을 해선 안 됩니다. 예술가라면 표절을 하지 말고, 의사라면 돈보다 생명을 먼저 살리는 의술을 베풀어야 하며, 정치가라면 뇌물을 절대 받아선 안 됩니다. 나아가 그렇게 삶으로써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해야 한다면 기꺼이 당해야 합니다.

또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게 전해지는 일도 적극 막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받을 것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성경을 성경대로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경을 통해 계시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끝까지 수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시어 보좌에 계신데 기껏 골고다 형장에 세운 교회 건물을 수호하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 그런 우를 범하는 대신에, 그분의 이름이 손상되는 것을  끝까지 막아야 합니다.  

신자는 정작 이 두 가지 일, 자기를 거룩하게 바꾸고 또 그럴 능력을 주시는 진리의 성경 말씀을 훼방하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적극적으로 항거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한 정치적 권세는, 가난한자와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가 이어가는 동안에는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히틀러나 김일성을 무너뜨리면 또 다른 그보다 더 악한 권세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도 그 일을 아시고 묵인하는, 어떤 면에선 당신이 주관하신 일입니다. 과연 신자들 가운데 본회퍼나 주기철 목사처럼 한 알의 썩어죽는 밀알이 있는지 보시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를 통해서 십자가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진리가 이어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금도 그분은 한 명의 남은 자를 통해서만 이 땅을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이세벨, 아합, 히틀러, 김정일 모두에게 하나님은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습니다.

신자가 적극적으로 항거할 대상은 자신이 진짜 신자답게 사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종류의 악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내면의 죄의 본성, 자기중심주의, 교만, 탐욕, 또 그것을 부추기는 외부의 유혹과 시험, 다른 이들의 죄악, 사탄의 미혹하는 세력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악한 정치적 사회적 권세도 포함되지만 우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한 사람의 신자라도 정작 신자답게 사는 일이 악한 권세를 무너트리는 일보다 더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또 정말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누가 나서서 기독교적으로 의로운 일을 주도하지 않아도 수도 없이 많은 본회퍼나 주기철 목사가 나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 사회는 악한 권세가 발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깨끗해져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강조하지만 상기에 기술한 내용은 사회악의 궁극적 원인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배역하는 바람에 그 영혼이 부패되기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에서의 답변입니다. 이런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각자가 믿는 바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저의 답변은 기독교의 기치를 높이 쳐들고 제2의 십자가 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잘못이지만, 비폭력적으로 개인적으로 적극적으로 악한 권세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8/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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