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9:25 왜 함 대신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조회 수 1185 추천 수 21 2011.07.02 04: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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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함 대신 가나안을 저주했는가?


[질문]


최근 창세기 9장 말씀의 노아의 포도주 사건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냈을 때 함이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아마도 조롱하는 투로) 알리자 셈과 야벳이 아버지에게 치욕을 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아버지를 덮어 주는 장면, 그리고 노아가 깨어나 사건의 전모를 알고 저주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읽다 보니 어딘가 좀 이상하다 싶은 부분이 있어서 해설을 듣고 싶습니다.

1. 25절에 보면, 분명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조롱을 한 것은 함인데 노아가 저주하는 대상은 함의 아들 가나안입니다. 성경에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죄를 잊지 않으신다는 의미이고 앞에 나온 인자를 천 대까지 베푼다는 것이 더 강조되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노아는 거의 가나안으로부터 나오는 족속 전체를 저주한 듯 보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도 가나안 자손은 죄다 노예가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함이 아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것도 가나안의 후손 전체가 저주를 받게 되었나요?

2. 아버지 노아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셈과 야벳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27절에는 하나님께서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말은 셈 아래로 들어가 셈의 축복을 누린다는 의미로 보여지는데, 셈이 장자이기 때문에 더 많은 축복을 가져간 것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저의 해석이 잘못된 건가요?

[답변]

성경난제 해석의 두 원칙


질문하신 주제는 신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기록된 부분 내에서도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상황이 노정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나옵니다. 합리적 유추가 힘든 성경 난제들을 해석하는 원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성품에 바탕을 두고 접근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에 명확하게 계시되어 있는 여타 영적 원리나 다른 구절들과 비추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간과는 달리 완전하게 공평하신 하나님이 모순되고 불합리한 처사를 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저주에 불공평성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인간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전후 사정에 따르면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가나안이 하나님께 벌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벌 받았을 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비의 악행을 삼사 대까지 보응한다는 말씀에 대한 질문자님의 생각은 옳습니다. 하나님에게나, 원죄라는 성경 원리에 아비가 공산당이면 아들도 빨갱이 취급하는 것 같은 연좌제는 결코 적용되지 않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반드시 개인별로 이뤄질 뿐입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빨이 시지 않는 법입니다. (이에 대해선 성경문답사이트 # 230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가요?"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이 굽어지게 만드는 해석은, 해석자의 의도가 전혀 그렇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해도, 틀린 것입니다. 또 아비 함의 죄 때문에 아들 가나안이 벌 받았다는 해석도 잘못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 설명이 논리적으로 그럴싸해도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적 원리에 비추어서 당연히 배제 되어야 합니다.  

왜 함은 저주 받지 않았는가?

이에 관해선 많은 의견들이 있으나 대표적인 몇 개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려고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 후손들을 저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이 노아의 막내아들인 것 같이 가나안도 막내이므로 같은 원리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두 해석은 아비가 받을 벌을 무죄한 아들에게, 그것도 같은 막내아들이라는 이유로 내리는 하나님이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성경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기계적인 하나님이 되어버리기에 잘못된 해석입니다.  

가나안이 아비의 수치를 먼저 보고 아비 함에게 일러바쳤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대한 변증은 분명히 됩니다. 상당한 타당성과 가능성이 있는 유추이긴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자의적으로 유추했다는 약점이 생깁니다.  

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 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실제로 25-27절에 나타나는 가나안과 셈과 야벳이 문맥상 의미로는 그 개인보다 종족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장래 일을 예언하는 예가 종종 있기에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해석하면 함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는 모순이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도 이미 죄악에 빠져서 함과 같은 잘못을 평소에도 잘 저지르고 다님을 조부인 노아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드시 본인의 잘못에 따라 벌하는 하나님 심판의 공평성에 비추어 볼 때에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이 저주 받지 않은 이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결정적 난점에 대해 "Hard Sayings of the Bible"(성경의 난제들, Kaiser, Davids, Bruce, Brauch 공저, IVP 1996 발간)이란 책에 아주 타당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

“노아는 그의 아들을 저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함과 그의 두 형들은 노아와 함께 하나님이 이미 축복한(창9:1)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노아든 어느 누구든 그 축복을 저주로 바꿀 수는 없다. 민수기 22-24장의 발람의 예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p.117, 필자 번역)  

함이 노아에게 잘못을 범한 당사자이기에 벌 받아 마땅하지만, 노아로선 이미 하나님이 직접 축복한 그를 저주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은 아비와 같이 동일한 죄의 성향을 보이기에 그를 저주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 여타 기록에 따른 해석이기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이 택정하여 은혜로 주신 구원이 취소 불가능함을 이미 여기서도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함의 잘못으로 그 후손이 다 벌 받아야 한다면 성경은 다른 아들들도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창10:6에 따르면 함에게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노아는 가나안만 지적해서 저주했습니다. 다른 아들들은 특별한 잘못이 없었고, 가나안만 평소에 죄를 많이 범하는 줄 노아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타당성이 붙습니다.

상기에 인용한 책에선 가나안의 잘못을 함과 같은 성향 즉, 성적 문란함으로 해석하고 또 그런 성향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봅니다. 실제로 가나안 지역에선 그런 증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고, 율법에서 성적범죄에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 이유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바로 그 지역에 있었으며,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했던 로마제국조차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근동 지역을 정복한 후에 그들의 도가 지나친 성적 타락에 대해 놀랬다고 그 책에서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가 성령의 간섭으로 예언한 것도,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가나안 족속이 저주를 받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습니다.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구체적 실현 여부보다는 노아 때에 이미 예언한 것이 달성되는데 장구한 세월이 흘렀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극단적으로 타락한 그런 족속에게마저 한없는 인자와 긍휼로 회개하기를 오래 동안 기다려 주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은 애굽에서 사백년 간 노예 살이 시키면서도 가나안 땅에 죄악이 차고 넘칠 때까지 그 진멸을 미루었습니다.

성경의 이중적 예언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비교적 의견이 일치됩니다. 우선 노아의 손자 대에서 세부적으로 종족들이 나눠지지만, 세 아들 중에 야벳은 백인종,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들의 조상으로 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고 해서 인종 간의 우열을 비교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말해 백인이 가장 우월하고, 황인은 그 다음에, 흑인은 맨 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는 백인종이 우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역사를 따지면 거의 모든 문명의 발상은 오히려 셈족에 의해서였습니다. 최근에는 황인종의 도약이 두드러집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흑인들의 시대가 도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구절을 인종 간의 우열의 차이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비성경적이자 반역사적 해석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종차별적 저주는 더더욱 아닙니다. 분명 가나안 족속만 저주받았지 구스의 후손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저주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 구절을 (의도적으로?) 오역해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킨 잘못을 범했던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런 오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대에 이 두 제도를 금지시킨 사람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자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노예제도는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에 의해, 인종차별은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에 의해 폐지되었습니다.  

본문은 문자적 의미 그대로 예언입니다. 성경에는 장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그 본인은 구체적으로 전혀 몰라도 성령의 간섭으로 묵시적으로, 때로는 아주 생생한 묘사를 통해 예언하는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또 그런 예언들은 한 사건보다는 점층적으로 여러 단계에 걸쳐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는 "예언적 안목"(Biblical Prophetic Perspective) 혹은 "이중적 성취"(Dual or Dynamic Fulfillment)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본문의 예언도 역사적으로 수차에 걸쳐 달성된 것으로 봅니다. 먼저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절)의 경우를 봅시다.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식 관용구입니다. 가장 비참한 종이라는 뜻이지 종들이 된 여러 종족들 밑에 있는 종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노예가 자기 밑에 노예를 둔다는 것 자체가 비논리적입니다.    

이 예언은 먼저 가나안 족속들이 셈 족인 이스라엘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또 비천한 종의 신세가 됨으로서 달성되었습니다.(수9:23, 왕상9:20,21) 정말로 “가나안은 셈의 종이”(26절) 되었습니다. 또 후대에 야벳 족속인 페르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 등에 의해서 가나안 족속인 페니키아가 철저히 정복당했습니다.  

27절에서 우선 “야벳을 창대케 하사”의 문자적 의미는 넓은 공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야벳은 14종족의 선조가 되었고(창10:2-5) 또 그 후손인 백인들이 헬라와 로마 제국을 이루었고 또 근대 유럽과 현대 미국에서 창대케 되었습니다.

또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주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중근동과 페르시아는 물론 인도까지 정복해서 제국에 편입시킴으로써 달성되었습니다. 야벳이 셈의 장막(지역)에 거한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에서 ‘그’라는 대명사가 받는 의미가 애매합니다. 어쨌든 셈족으로 받으면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종이 된 것으로, 또 야벳으로 받아도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달성된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이런 이중적 예언이 문자적 현실적으로 성취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영적인 진리도 자주 내포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신다”는 구절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구원이 셈 족속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셈이 장자라서기 보다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택정이라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그 장막에 거하게 하시되 창대케 한 후라고 말합니다. 셈의 장막은 당연히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영적차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벳 족속이 처음 얼마 동안은 셈 족속과 종교적 영적으로 분리되겠지만 나중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족속도 야벳의 종이 되므로 언젠가는 동일한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결국 이 저주의 예언은, 성경의 다른 저주의 예언들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당장은 심판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이끄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를 통해 모든 열방을 셈의 장막으로 모을 것이 즉, 이방인의 구원 계획이 선포된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지만 동시에 여자의 후손으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제 홍수 후에 노아의 가족만 있는 상황에서 인간들이 범죄했지만 동일하게 궁극적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먼저 저주의 예언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오랜 인내 후에 가나안 정복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유대에서 발원되어 사마리아를 통과하고 유럽을 거쳐 차츰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건너오는데 근 이천 년이 걸리긴 했지만 구원의 약속도 달성되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더디게 이뤄지고 여전히 세상에는 온갖 고난과 죄악이 넘치는 것 같아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으로선 주님을 다시 보내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역사 완성을 곧바로 내일이라도 이룰 수 있습니다.

셈의 장막 밖에 있었던(인종적 의미가 아닌 영적 차원에서) 우리로선 그 안으로 불러주신 은혜만도 평생을 두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항상 경성하여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세상과 사람 앞에 그분의 빛을 드러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처럼 정미하고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해지고 또 주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6/8/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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