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6:1-15 하나님의 영에게 쉼을 주고 있는가? 12/7/2017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6:12)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열방들의 심판이 된다. 네 말 탄 자의 첫째 환상이 이스라엘의 곤궁한 상황과 열방의 평안의 대조였지만, 마지막 여덟 번째 네 병거의 환상은 반대로 이스라엘의 평화와 열방의 심판의 대조다. 놀랍게도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마저 쉼을 얻었다고 한다.(8절) 네 병거는 온 세상의 주 앞에 서있다 나가는 바람 즉, 심판을 행하는 성령의 역사다. 특별히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했다고 한다. 스가랴 시대 대적은 바벨론이었고 또 바벨론은 항상 죄악의 도성이자 사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 모든 구약예언이 그러하듯 가까운 미래뿐 아니라 종말론적 예언이다.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사탄의 도성이 완전히 심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이 쉼을 얻지 못한다. 사탄이 그만큼 하나님에게 위협 고민거리가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 땅의 인간들을, 당신의 백성들마저 사탄의 교묘하고 음흉하고 끈질긴 시험과 훼방에 넘어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너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종말론적 심판이 시급 절실할 뿐 아니라. 반드시 당신의 때에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현장지도자 스룹바벨 두 사람의 지도 아래 성전재건이 완수될 것인데 은과 금의 면류관을 여호수아에게만 씌우라고 했다.(11절) 그가 전 백성을 대표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실제적 회복은 성전재건보다 그로 인한 영적부흥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차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12절)할 것이라고 한다. 그럼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은 무엇인가? 그들이 성전재건을 하지 못한다는 뜻인가? 또 그 면류관을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16절)고도 한다. 재건되지도 않을 성전에 어떻게 둘 수 있는가? 이 싹은 이새의 집안에서 나실 새싹(순)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실 당신의 몸으로 이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이다. 헤롯 성전을 허물라 사흘 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하신 그 성전이다.(요2:19) 그러니까 그 성전은 “먼 데 사람들이 와서 (함께) 건축”(15절) 되리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성경예언이 당대,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겹쳐서 하나로 말하는 것은 후대의 성경독자로 한 눈에 다 함께 보아 알게 하려는 목적이다. 또 미래의 일을 현재 상황처럼, 심지어 과거시제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미래 예언이 반드시 일어남을 보장하는 뜻이다. 스가랴 때에, 아니 창조 전부터 예수님의 초림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 은혜를 베풀고 재림으로 끝까지 완악한 자들의 심판을 완성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선 이미 실현된 과거로 자리 잡고 있었다. 믿음은 온전히 실현된(될) 미래를 현재에 적용시키는 실력이다. 신자는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완성될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자다. 바꿔 말해 구약백성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이 쉼을 얻게 하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째 성전(교회) 안에 오직 여호수아(예수)의 면류관(십자가)만 두어야 한다. 둘째 먼데서 오는 사람과 함께 성전(교회)을 지어나가야 한다. 예수님처럼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 사랑을 누리게 해야 한다. 과연 이일에 충성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