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과연 하나님인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나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1:19-22)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요한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마3:5,6) 그로부터 물로 죄를 씻는 침례를 받았다. 요한은 또 자기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실 이는 자기보다 능력이 많으며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고 예언했다.(눅3:16) 메시아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한 것이다.
요한 스스로 자기보다 능력 많은 이가 오신다고 했으니 그도 나름대로 신령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요한이 심판의 때가 다가왔으며 곧 더 큰 능력의 사람이 오신다고 선언했다. 그런 선지자적 예언을 접한 예루살렘에선 설왕설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약성경에 능통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파송하여 조사토록 했다. 우선 침례를 주고 있으니 혹시라도 그가 메시아가 아닌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대체 너는 누구냐?”는 것이다. 혹시 그리스도면 빨리 분명하게 밝히라는 뜻이었다. 요한도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정상적 인간이라면 절대 자신을 메시아와 동등시하지 못한다. 과대망상증에 걸린 정신이상자이거나, 이단교주 행세로 치부하겠다는 사기꾼이 아닌 다음에는 말이다. 요한으로선 아무리 어르고 달래듯 추궁해도 “노(no)" 외의 대답은 없었다.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의 정도를 잘 알기에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비록 그 경외심과 소망의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게 많이 변질되었어도 그 열성만은 대단했다는 뜻이다. 그는 성령의 인도대로 메시아 오심을 선포하는 선지자였을 뿐이다. 자신이 분명 인간에 불과한데 어찌 감히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로선 더 이상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역으로 따지면 스스로 메시아라고 선언한 예수는 정말 메시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에서 뛰어내려 보라거나,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거나, 천하만국 영광을 다주겠다는 사단의 꾐을 예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과대망상증 환자는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또 극심한 비방과 멸시와 핍박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한마디 반발, 대꾸, 변론도 않으시고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사기꾼일 수도 결코 없다는 말이다. 그의 메시아 자기선언(self-declaration)을 부인할 근거가 도리어 다 부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는 인간이 제 멋대로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진짜로 메시아일 수밖에 없는, 아니 실제로 메시야였다. 당신의 말대로 모든 인간이 따라 걸어가야 할 길이요, 목표로 삼아야 할 진리요, 모든 삶의 원천이 되는 생명이요, 죽음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부활이었다. 어떤 논리적인 변박도 그의 정체성에 흠집 낼 수 없다. 현란하고도 억지스런 인간적 혀 놀림에 불과하다. 아니 그럴수록 그분의 주님 되심이 더욱 증명될 뿐이다.
예수가 하나님인 수많은 증거
예수의 자기 선언 말고 그분의 메시아 됨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더 없는가? 성경에 따르면 수없이 많다. 침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올 분은 불과 성령으로 침례를 줄 것이라고 소개했다. 구원할 자와 심판할 자를 나누는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요한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광야에 외치는 자”(사40:3)로서 인류에게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 오는”(사52:7)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 또 그래서 예수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마11:11)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던 그마저 예수가 로마를 물리칠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고 세리와 죄인 같은 소외된 사람들만 만나고 다니니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11:3)라고 물었다.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4-6)
소경, 앉은뱅이, 문둥이, 귀머거리는 현대첨단과학으로도 불치의 병이다. 죽은 자는 도무지 살릴 수 없다. 예수가 행한 이적들은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배를 전복시킬 것 같은 강풍과 파도마저 말 한마디로 명하여 잠잠케 했다.(마8:23-27) 거기다 자신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고 예언한 그대로 죽음에서 승리하셨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자기가 기록한 복음서의 결론을 이렇게 끝맺었다.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예수가 하나님인 증거가 너무나 많아 다 기록할 수도 없어 일부만 골랐다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그 일부 기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뜻임)임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분을 믿고 인도함을 받으면 참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못 믿겠다고 한다. 너무 황당하다는 뜻은 인간으로선 도무지 가능치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일은 상상도 못해 본 일이라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성경이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모든 것이 진짜로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고대의 책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다. 문제는 예수의 대한 기록이 사실인지 여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성경보다 세속의 역사가 더 확실하게 증명한다. 거짓된 사실을 두고 초대교회 신자들이 산 채로 맹수 밥이 되어 죽는 고통을 자청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또 그 후로 지금까지도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즉, 예수가 하나님으로써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곳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릴 리는 없지 않는가?
세계 사대 종교의 실상
중고등학교에서 세계 사대 종교는 불교, 회교, 유교, 기독교라고 배웠다. 또 그것을 창시한 석가, 마호메트, 공자, 예수를 세계 사대 성자 내지 위인이라고 칭한다. 나머지 모든 군소종교들은 이 넷보다 열등한 종교로 취급되어도 아무도 시비 걸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네 종교를 조금만 따져 봐도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얻는다.
종교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윤리적 삶을 훈련시키고 고달픈 삶에 대한 정서적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죽어서 절대자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다. 전자는 모든 종교가 구체적 내용과 방식만 다를 뿐 다 제공한다. 문제는 후자다. 사후의 영원한 운명도 온전히 책임을 져야 온전한 세계적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교는 그런 부분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야말로 도덕철학일 뿐이다. 불교도 거의 그러하다. 절대자 신이 없다. 자신이 득도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면 구원이다. 말하자면 이 둘은 벌써 구원을 주는 절대적 하나님과는 사실상 무관하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반쪽 종교이자 수신제가(修身齊家)만 하는 현실적 매뉴얼과 다름없다.
이제 남은 것은 둘인데 회교가 시작된 연유가 특이하다. 마호메트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부패상을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신자들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예언자로 나서서 창시한 종교가 회교다. 예수가 가르치고 계시한 내용들이 실현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나름의 명분을 내걸고 말이다.
회교를 믿는 아랍인에게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동일한 조상이다. 유대인은 사라에게서 난 이삭을, 아랍인은 그녀의 몸종 하갈에서 난 이스마엘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회교도들도 구약성경의 가치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를 인정한 바탕에서 시작했기에 그를 훌륭한 선지자로도 인정한다. 회교 경전인 코란의 내용과 가르침은 제쳐두고, 회교라는 종교의 출현과정만 따지면 기독교의 아류 내지 한 지파라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 종교 간의 우월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과연 어느 종교가 다루고 있느냐를 살피는 중이다. 불교와 유교는 구원과 무관하다. 회교도 뿌리는 기독교에 두고 있고 예수를 여전히 참 선지자로 인정한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예수가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을 계시하고 있음을 사대 종교가 오히려 변증하고 있는 셈이다.
마호메트와 예수는 함께 비교할 수 없다. 상대적 평가를 하다보면 어차피 평가 사안에 따라 한 쪽에 열등한 점수가 매겨질 수 있다. 그 종교인들에겐 그 창시자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한분씩 절대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데 마호메트에 대해선 저부터 문외한인데다 아무리 객관 타당한 평가를 해도 여전히 신성모독문제는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 따져볼 수 있는 것은 예수에 대한 절대 평가뿐이다.
참으로 다행히도 그분에 대한 절대평가는 아무리 나쁘게 나와도 명예훼손이나 신성모독의 죄로 걸리지 않는다. 예수는 이 땅에서 사역할 동안에 이미 가장 심한 명예훼손과 모든 종류의 신성모독을 다 겪었다. 역사상 가장 선하고 의로운 자가 가장 말도 안 되는 핍박과 멸시와 비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가 십자가에 죽은 이유가 그런 우매하고 악한 자들의 죄와 허물을, 당신을 모멸하는 죄까지 당연히 포함해서, 용서하기 위한 목적이었지 않는가?.
작금 유독 기독교만 세간에서 모든 욕을 먹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한 비방은 당장 신성모독에 걸리지만, 예수는 신성모독의 죄조차 용서한다고 이미 십자가에 선언했으니 아무리 욕해도 괜찮다. 역설적으로 말해 기독교 신자들은 기독교가 근거 없는 비방을 당한다고 덩달아 분노할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절대적 진리 됨을 세상이 증명하고 있기에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유독 기독교만 욕을 먹는 영적인 이유, 다른 말로 더 정확한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는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시어 당신께 겸손히 나오는 자들을 그 빛 가운데로 인도하겠다고 초대했다. 그럼에도 어둠을 더 좋아한 인간들이 빛으로 가는 것이 싫었다. 바꿔 말해 기독교만 일방적으로 욕을 먹는 사실마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진리 됨을 확실히 변호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아래 구절을 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8-20)
전무후무한 인물, 예수
어쨌든 예수만 절대평가 하여 메시아인지 살펴보자. 이미 침례 요한이 제자들을 시켜 따져본 그런 차원 말고 조금 다르게 접근해 보겠다. 지금껏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역사적 인물을 성경에 대입시켜 보라는 것이다. 인류를 위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자들이나, 인격적으로 널리 존경받는 자들이나, 또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을 복음서가 증명하는 내용과 비교해보자는 것이다.
그 결론은 예수의 일대기에 딱 적합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징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사이에는 차이점도 많지만 상호 유사성을 얼마든지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또 아인스타인과 호킹 박사와도 그렇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그렇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고호와 고갱 등등 인간끼리는 비슷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반면에 정말 엄밀히 따져 예수와 닮은 인간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그의 출생, 사역, 이적, 가르침, 마지막 고난주간, 골고다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등등 어떤 누구도 그와 조금이라도 비슷하지 않았다. 기껏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선행 정도만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어려운 자를 도운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 수십 년 동안의 숙원만 골라서 도와주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임에도 갖지 못한 것을 새롭게 만들어서 공짜로 주었다.
예컨대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머거리, 귀신 들린 자들의 병을 고친 것만 해도 그렇다. 아직까지도 그런 불치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조차 불가능하지만, 예수는 그런 치료를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 형상과 기능을 완벽히 회복시켰다. 완전한 새사람으로 바꿔주었다. 단순히 자기에게 남아도는 시간과 여유로 즉,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을 쪼개어 적선하는 도움이 절대 아니었다. 인간을 지으시어 인간을 인간보다 더 속속들이 아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와줄 수 없는 그런 도움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인물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류 역사를 그분의 오심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단순히 그분의 능력만 따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분의 가르침만 해도 어떤 심오한 랍비와도 차원이 전혀 다른 영적 권세가 있었다. 거기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아셨다.
특별히 다른 인간의 심령 깊숙한 생각과 죄까지 미리 다 아시고 예리하게 지적하셨다. 그것도 정죄나 심판의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진리를 깨우치게 해서 고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말씀만 하셨다. 나아가 그런 자를 구원하시려고 당신께서 먼저 찾아가셨다. 이처럼 그분의 특이하심(unique), 그분만의 유일하신 특성을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한이 없다. 그럼에도 꼭 살펴야만 하는 특성이 하나 더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불신자들까지도 잘 알고 있는 사랑에 관한 15가지 특성을 말한 구절이다. 그런데 그 15가지 특성 앞에 자기 이름을 대입해 아래 문장처럼 완성해보라. 또 인류 중에서 가장 사랑을 가장 많이 실천했다고 여길 만한 사람을 대입해보라. “OOO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누구에게나 오래 참고, OOO는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누구에게나 온유하며, ....”라고 말이다.
과연 그 15가지 특성을 모든 경우에 다 완벽하게 만족시킬만한 인물이 있는가? 결코 없다. 오직 예수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슈바이처나 마더 테레사를 쉽게 떠올릴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슈바이처는 오히려 현지인들에게 냉혹한 인물이었다는 평만 들었다. 테레사는 예수 같은 핍박을 겪지 않았다. 그분의 섬김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예수와 동일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박해자까지 끝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없었다.
예수는 정말로 그랬다. 억지로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갔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갖다 대었다.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셨다. 원수를 사랑했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했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배반하여 판 가룟 유다에게도 마지막까지 계속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위선적 종교지도자들 저주하면서 야단쳤지만 십자가에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세상에 없는 사랑이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면 더 쉽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부모자식 사이만큼 사랑이 돈독한 경우는 없다. 따라서 사랑하는 주체에 자기를, 그 대상에 자기 자식을 대입해서 상기의 문장을 다시 완성시켜 보라. 열다섯 중에 과연 몇 문장이 자신 있게 자기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온전히 완성되는 문장이 하나라도 있는 자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슈바이처와 테레사를 결코 폄하하지 않았다는 뜻이 이에 해당된다. 테레사 수녀에겐 당연히 자식이 없었지만 자신의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도 그 열다섯 특성을 다 적용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그런데 특이하게도 회교 경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기독교의 잘못을 바로잡는 완전한 새 계시라고 자랑하는 데도 말이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앞글에서 살펴본 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분이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성경을 읽는 독자가 꼭 알아야 할 그분의 인간과 이 땅을 향한 뜻과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책이든 처음과 끝을 보면 그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계22:21) 둘을 연결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창조는 이미 실현된 사실이다. 혹시 진화에 심취하여 창조가 선뜻 안 믿어진다 해도 한 개인의 입장에선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은 어떤 연유든 이왕에 벌어진 일이다. 성경도 창조에 대해선 맨 첫 두 장의 간략한 설명으로 그친다. 나머지 모든 부분에선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의 문제를 다루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대로 하면 인간이 정작 관심 가져야 할 측면은 시작보다 끝 부분에서 말하는 예수의 은혜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더러 꼭 알게 하고 싶은 당신의 뜻은 예수의 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예수의 은혜를 모르면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 밖에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도리어 예수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은혜란 당신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이 땅의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본체라는 것이 성경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을 온전히 성취한 인물도 예수요, 신약성경 기록에 예수 외의 인물로 대입(代入)이 전혀 불가능하기에, 성경은 오직 예수 이야기다. 특별히 어떤 이도 행하지 못했던 사랑을 예수가 십자가에서 베풀었다는 예수의 사랑 이야기다.
예수가 오기 전에는 이 땅에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이 직접 오셔서 죄인을 위해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가 온 것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허망한 가운데 있던 인간들에겐 너무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성경에 미리 약속한 예수가 바로 복음이라고 한다.
구약성경은 예수가 오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힌 책이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오셔서 하신 일과 그 결과와 의미를 설명한 책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기에 그 기록한 대로 믿고 그 믿는 바대로 따른다는 것은 바로 예수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열심히 준행하여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 주시는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예수의 구원에 관한 책이다. 진심으로 모든 편견과 선입견과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버리고 예수를 알고자 하는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는 성령의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8)
예수에 대한 두 극단적 반응
이처럼 성경 말씀만으로 예수를 만나도 한 죄인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인 것이다. 역으로 성경은 하나님이신 예수를 기록한 책인지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이 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긴다면 과연 그것이 사실인지 정말로 진지하게 마음을 열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어보라. 마음을 열라는 것이 그 사실을 믿어보려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단순히 예수에 대한 꼬투리부터 잡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과연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려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마음으로 읽으라는 것이다.
그럼 다 읽고 난 반응은 오직 둘로만 나타난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절로 믿어진 것이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말씀 앞에 자기 심령의 벌거벗음을 발견하고 예수의 십자가 앞에 항복하게 된다. 실제로 그랬던 자들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아니 성경과 예수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그 허구성과 불합리성을 입증해보겠다고 전문적 지식을 갖고 대들었다가 거꾸로 뒤바뀐 사람도 얼마든지 많다.
대표적 예로 셋만 들어보자. 먼저 철저한 불신자로 예수를 부인하는 소설을 지으려고 성경을 읽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예수에 대한 가장 위대한 영화 벤허의 원작을 지은 루 웰레스를 들 수 있다. 또 예수의 부활이 엉터리임을 파헤치려고 성경을 깊이 연구한 프랭크 모리슨은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라는 부활이 객관적 사실이자 그 증거가 충분하다는 책을 지었다. 나아가 우주가 창조되었을 리 없고 진화가 옳음을 증명하려던 리 스트로벨은 거꾸로 진화가 완전히 허구임을 과학적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창조세계의 비밀”이라는 베스트 셀러를 저작하게 되었다. 셋 다 예수의 극렬한 반대자였다가 성경을 통해 예수를 만나자 오히려 예수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물론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오히려 죽기로 반대쪽에 서게 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열린 마음이 아닌 닫힌 마음 즉, 편견과 선입관을 제거하지 않은 채 끝까지 꼬투리 잡을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예수의 극렬한 반대자가 된다.
지금 그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니다. 성경과 예수를 조금이라도 깊이 접한 자에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극렬한 반대자 아니면 열렬한 옹호자, 그 중간 회색 지대에 남는 자는 원칙적으로 없다. 아직도 그렇지 못한 자들은 사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인들이다.
바꿔 말해 성경은 단순히 감동, 교훈, 경계를 주는 책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기에 성령의 조명으로 읽으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한마디로 감동 대신에 구원을 주는 책이다. 한 인간의 가슴과 머리에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그 인간 존재 전체를 새롭게 뒤집어엎어서 세상으로만 향하던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책이다. 성경을 통해 이런 변화를 얻지 못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성경을 읽는 현대 독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십자가 진리가 실제로 그대로 이뤄진다. 성경과 예수가 구원 생명과 사망 심판 둘 중 하나의 극단적 반응 밖에 일으키지 않는다는 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요 예수는 하나님이다. 너무나 간단한 논리다.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구원 아니면 심판 둘 중의 하나이듯이 예수도 하나님 아니면 미친 사람 내지 과대망상증 환자 둘 중 하나다. 성경도 전설, 동화 같은 엉터리이거나 그 기록된 그대로의 사실과 진리일 뿐이다.
10/1/2012
그런 엄청난 사랑을 퍼부으시면서 믿으라고, 제발 믿고 구원에 이르고 심판에 이르지 말라며 애원하시는 십자가 사랑을 노래하시는 말씀이 바로 성경 속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는데...
늘 그 말씀을 대충읽고, 대충읽고..그리고 차갑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자리에 앉아있음만 즐기는..
그 미지근한 자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등에 업고선 이웃들을 판단하고파 하고, 정죄하고파 하고.. 그리고 자신에겐 이런저런 변명만 줄곧 늘어놓는 너무도 못된 모습, 이런 모습을 고백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