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 축에도 못 끼는 교회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1:6,7)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인사를 끝내자마자 처음으로 꺼낸 말입니다. 그가 편지를 쓰게 된 목적이자 다시 확실하게 해놓고 싶은 과제라는 뜻입니다. 즉 이제부터 다른 복음의 잘못을 지적하고 또 참 복음과 어떻게 다른지 가르치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럼 다른 복음은 어떤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전반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본문에 그 명확한 답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속히 떠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림을 받았다면 속히는, 아니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전제된 것입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을 받지 않은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았다는 말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차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의 자녀가 된 것인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그래야만 올바른 복음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 당시에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율법에서 요구하는 사항들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다른 복음을 가르치긴 했지만 단순히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개인의 품성을 도야하기 위해 도덕 생활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최소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그분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구원을 얻어야만 한다는 인식만은 근본적으로 있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이 달랐을 뿐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절대적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야한다는 것은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표현한대로 복음은 복음이되 다른 복음인 셈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확실히 가르치고 베풀어야 할 것은 죄에서 구원입니다. 성도 각자가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처절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 죄를 세상에선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스스로는 도저히 씻을 길이 없기에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드러나 무조건적인 긍휼로만 용서 받을 수 있음을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죄가 얼마나 교묘하고 음흉한 흑암의 세력이며 또 인간들이 어떻게 그 세력에 완전 농락당해 노예가 되어 있는지 밝혀야 합니다.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타락상을 철저하게 해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더럽고 추한 모습을 십자가 예수의 사랑에 비추어 보고 영혼에 찔림을 받게 해야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꼬?”라는 울부짖음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해야 합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아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십자가 죄 씻음과 중생의 은혜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작금 교회에서 죄에서 구원 받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현실의 형통과 개인적 안위와 심리적 안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 축에도 끼지 못하지 않습니까? 세상과 인간의 윤리 내지 사상일 뿐입니다. 죄를 지적하면 교인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염려해 죄를 심리적 부조화라는 말로 둘러 표현하다보니 아예 죄 자체가 실종했습니다. 죄가 없어지고 나니 죄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마저 따라서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다른 복음조차 가르치지 않는 교회에 다른 교인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교인들만 넘쳐납니다. 바울이 지금 살았다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4/1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