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2:3-5 일시라도 복종치 말라

조회 수 467 추천 수 12 2009.09.20 00:16:52
일시라도 복종치 말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잡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2:3-5)


초대 교회 당시 이방인이 개종할 때에 율법의 정결례, 특별히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가 큰 논쟁거리였습니다. 당시 교회의 주를 이룬 유대인으로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아예 무시하기가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같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동역자 디도가 헬라인이었지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억지로”라는 용어는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 구원과 믿음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또 만약 디도가 할례 받겠다고 자원했다면 주었을 것이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지금 강조하고자 한 초점은 이방인에게 할례 주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보다는 다른 데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받으려면 예수님의 은혜로만 부족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설명한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의 자유를 “엿보고”, 그들의 “종으로 삼고자” 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방심해 실수하는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바울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나서서 시키는지 아닌지 여부”를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바울이 할례를 하라고 시키면 그들 주장에 동조해 주는 셈이 되므로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익히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할례를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을 더 문제 삼겠다는 뜻입니다. 우선 그들은 할례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이왕이면 하는 것이 더 좋지 않느냐고 물고 늘어질 참이었습니다. 나아가 구원 받은 자는 복음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되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복음에 도움이 되는 일마저 하지 않는다면 그 믿는 바와 다르지 않느냐고 따질 작정이었습니다. 심지어 남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권하면 이미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까지 억지 부릴 가능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할례에 관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말하든 그들의 흉계에 걸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염려했던 것도 자기 같은 사역자가 남에게 일상적 일이 아닌 종교적 문제에 관해 어떻게 권하든 그 권면은 이미 복음과 연관된 가르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가 구원 받는 문제와 상관없다는 진리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그의 적대자에게 혹시라도 그 가르침과 연관되어 약점 잡힐 일은 의식적으로 단 하나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하라고도 말라고도 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완전히 그의 자유의사에 맡겼습니다. 디도도 바울에게 복음을 배워 사역자의 신분이 되었기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원칙을 얼마나 확고하게 실천했는지 아십니까? 초대교회들은 할례에 관한 논쟁이 거듭되자 결국 기독교 사상 최초의 공의회를 예루살렘에서 열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에 입각한 원칙을 베드로가 적극적으로 옹호해 준 것에 힘입어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치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에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강조하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행15장)  

본문에 앞서 바울은 그 공의회에 자신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언급(2:1,2)했으므로 갈라디아 교회 내에선 그 결의가 있은 이후에도 여전히 논쟁의 불씨가 살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이 서신의 저작 연대를 AD 55 년으로 보면 AD 49년에 있었던 총회 후 6년이 지난 뒤까지 그랬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일시(一時)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단 한 번도 원칙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AD 32년에 회심한 것으로 보면 무려 23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주의자의 눈치를 본 예수님의 수제자요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를 수많은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야단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갈2;11) 그것도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니었고 아니 가장 큰 대적이었던 주제에 말입니다.  

바울의 사역 원칙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복음 때문에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다가 처형당했지 않습니까?

본문에 따르면 복음의 내용뿐 아니라 그 전하는 방식마저 그랬음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헬라인에게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대한 것은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해 그랬다고 했습니다. 복음 안으로 초대되지 않는 한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직 순전한 복음을 순전한 방식으로 전했습니다. 단지 그들과 교제하는 부분에서만 상대 입장과 신분을 고려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그는 이전에 유대교에 가장 열심이었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던 자였으므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헬라인, 유대인들은 각기 나름대로 어떻게 단번에 확 바뀔 수 있었는지 무척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전의 동료에 대한 배신감 내지 적의도 드러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모든 선입관과 편견부터 제거하고 복음을 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그들의 사상과 믿음에 비추어 복음을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한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감춰지거나 훼손되는 방식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헬라인도 할례는 구원을 이루는 종교적 예식의 하나라는 상식은 있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끈질기게 그렇게 주장하고 다녔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십자가 은혜만으로 충분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최전선에 선 바울로선 아무리 할례가 구원과 상관없더라도 나서서 권하거나 금할 수는 결코 없었습니다.
  
흔히들 복음의 진리는 고수하되 그 전해지는 방식은 불신자들의 기호와 사고에 맞추어 다양하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너무나 쉽게 말합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또 전도 방식이 시대와 상황과 관계없이 항상 똑 같아야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전해지는 방식이 복음을 가리는 경우가 발생하면, 아니 그런 빌미를 조금이라도 제공하면 절대 그래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역자의 경우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바울 같이 죽을 때까지 일시라도 복음 아닌 것에,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복종해선 안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작금의 상황은 바울 당시의 갈라디아 교회와 하나 달라진 것 없고 어쩌면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도자들이 복음이 가려지는 방식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방식도 반드시 복음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능력으로 죄인들에게 베푸신 은혜에 조금이라도 그분과 상관이 없거나, 완전하지 않거나, 모순 된 것이 개입될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환심을 사려는 어떤 위계, 타협, 수정, 포기도 따라선 절대 안 됩니다.  

만약 어디까지 전도 방식이 변해도 되는지 정 구분하기가 힘들면, 아니 실제로 그렇기에 더더욱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복음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가르침을 받아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렇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 않습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따져도 세상일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킬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최근에는 교회가 아예 잘못된 목적을 이루려고 그 수단마저 정당화하려 하니 도대체 어쩌다 십자가 복음이 이 지경까지 왔습니까?

4/3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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