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아는 법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7,18)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 가는 도중에 일부러 아브라함에게 들려 당신의 하려는 일을 그에게는 숨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운데다 소돔에 살고 있는 그의 조카 롯의 구원을 감안한 배려였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하나님 안에서 그와 같은 신분이 이미 되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계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현현(顯現)하셔서 구체적으로 보고(?)까지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아주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 말하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긴박하고 중요한 일에 한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자가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뜻과 계획을 알려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 중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싶지 않은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잘 알지 못한다는 데, 그것도 아주 믿음이 좋은 신자가 아무리 말씀을 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해도 도무지 감감하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신자에게 계시하시는 내용과 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자가 구하는 그분의 뜻과 그분이 신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내용이 대체적으로 불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신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아주 특별한 경우라야, 그래서 평생에 한두 번 있을까말까 할 만큼 아주 드물게만 그렇게 하십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기도하는 것마다 그런 정보를 받고 싶다는 욕망부터 없애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자기의 어떤 소원이라도 간구하되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르겠다는 순종의 표시가, 특별히 그 실천이 기도입니다. 누구라도 단순히 입술로 하나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골고다 십자가로 이끌 때에 실제로 그 잔을 마시는 것은 별개입니다. 요컨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작업이 기도일 뿐 아니라, 기도하는 과정 중에 순종과 헌신이 실제로 다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은 고뇌와 인내와 겸손과 결단과 헌신이 함께 어우러져 아주 오랜 기간 더디게 진행되기 마련입니다. 기도하자 곧바로 응답되거나 거절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기도한 대로 응답 되는 것에 너무 목을 매달면 순종과 헌신은 점점 거리가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가 기도하면 그 즉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쳐 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신자가 그 뜻에 쉽게 따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조차 십자가에 달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고뇌에 찬 기도를 했습니까?
하나님은 신자가 영적으로 오랜 성숙의 기간을 거쳐서 정말 어디로 이끌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뜻대로만 따르겠다는 항복 선언을 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또 그 순간까지 가는 영적 순례가 기도입니다.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하나님더러 뚝딱 해치우라고 명령하거나, 점쟁이에게 복채 내듯이 미래 일을 미리 알고자하는 것은 결코 기도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무릎 꿇고 정식으로 기도하는 과정 중에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중에 아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아니 거의 다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은 기도 중에 직접 말씀해주리라고만 기대하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그분의 뜻을 모르겠다는 불만 아닌 불만을 하게 됩니다.
일상적인 일 중에 그분의 뜻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되어져 가는 모습 중에 자기가 기도했던 내용들이 어떤 형태로든 적용되어져 가고 있으며 또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삶의 과정 중에 안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의 결과를 사후에 보고서야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앞모습보다는 항상 그분의 등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 기도한 대로는 아니지만 그 기도에 입각하여 먼저 가서 행하시고 우리는 뒤를 따를 뿐입니다. 그분의 모습을 바로 보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장래 청사진을 사전에 미리 입수하겠다는 것은 진짜로 자기 목숨을 완전히 걸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모세가 본 것도 그분의 뒷모습뿐이었지 않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항상 깨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영적 안테나를 오직 그분께로만 향하게 하고 자신의 사고 영역 가운데 성령의 깨우침이 마음껏 작동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는 무릎 꿇고 이미 기도했던 내용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과 연관해서 범사가 되어져 가는 과정을 따져 보아야 합니다. 완전히 결판이 난 이후라도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도 신자는 무릎 꿇는 과정 중에 모든 것을 알려고 하거나, 아니면 기도한 것과 실제 생활은 별개로 떨어져 있으니 아무리 기도해도 그분의 뜻을 모르겠다는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생각 전체가 기도여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하면서도 수시로 기도하고 묵상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생각이 세상 정욕과 죄악과 사단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세밀하게 지키면서 말입니다. 신자의 지정의 안에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그분의 경륜을 굳건히 심어두어 다른 것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할 이유도 사실은 오직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뜻입니다. 신자의 뜻이 아닙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뜻과 다르니까 그분의 뜻을 더더욱 알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정작 신자들은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엄밀히 말해 다르다는 부분은 잘 생각지 못하고 그저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다르다는 의미는 단순히 사과는 배와 다르고, 2는 1과 다르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꼭 숫자 적으로 따지자면 하나와 무한대만큼 다릅니다. 당장 본문에만 해도 아브라함을 통해, 그것도 기껏 이방 족속 가운데 우거하면서 사는 신분에다 백 살이 되어서야 아들 하나 주어 놓고는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꿔 말해 그분의 뜻과 계획은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신자라도 인간의 이해력, 분별력, 심지어 상상력마저 초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 미리 알고자 덤비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분에게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놓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 따르겠다는 것이 바로 그 뜻 아닙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면 겟세마네의 예수님처럼 자신이 죽는 것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또 바로 그것이 기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겠다고 덤비는 까닭은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면 방향을 선회하겠다는 심보는 아닐까요?
역으로 말해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알고자, 그것도 기도 형식 가운데 직접 말씀해 주기를 기다려선 거의 무망(無望)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과 계획을 알고자 하는 일조차 포기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는 당연히 그래야 하고 얼마든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어떤 뜻과 계획이든지 그분께 간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삶을 분리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 가운데 기도를 더 많이 하라는 뜻입니다. 삶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되 항상 되어져 가는 일과 기도한 내용을 연결해서 그분 중심으로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분의 뜻과 계획을 비록 조금씩이긴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게 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까? 기도, 감사, 찬양, 경배가 신자의 호흡이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은 신자가 원하는 응답은 언제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기도한 대로의 혹은 그와 비슷한 응답만 기다려선 결코 그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응답보다 그분 당신을 묵상해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뜻을 어찌 감히 아침에 잠시 기도한 것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또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원하시지 단순히 우리를 편안하고 형통케 해주시려는 뜻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만 구하면서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한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뜻을 진짜 따를 의사와 준비는 안 되어 있는데 그분께서 과연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오히려 그분 뜻을 구체적으로 미리 알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당장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남은 평생에 자기 모든 것을(다시 말하지만 당연히 생명을 포함함) 그분께 거는 것이 확실해져야만 비로소 당신의 구체적인 뜻을 아주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이 아니고선 그분의 뜻을 알았다고 결코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2/25/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