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교회는 온전한가?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1,2)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사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험하려 했던 내용을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되어서 잘 바치는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일차적인 뜻은 그것임에 틀림없지만 오로지 그 측면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에는 항상 상호 교차하는 두 영역이 있는데 너무 한 쪽만 생각해선 많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 둘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측면과 하나님 쪽에서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인간을 변화시켜나가는 측면인데 너무 전자에만 신경을 쓰면 후자는 자연히 등한시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순종하면 결국 그 둘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 아닌가라고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순종이 결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금처럼 자기 생명보다 귀한 외아들을 드리라는 명령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또 인간이 매번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숙된 신자라도, 지금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단지 명령대로 순종할 수는 있어도 그분의 구체적인 뜻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에는 하나님이 당신만의 주권으로 당신이 계획한 바를 일방적으로 이뤄나갈 부분이 반드시 따로 있어야 합니다. 또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신자에겐 매번 하나님의 목적이 숨겨져 있고 약속은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부분에도 그분만의 목적과 의미가 있음을 확신하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분의 손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을 바치라고 명하신 것도 두 영역으로 나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은 바쳤고 하나님은 받았다고 구분해선 안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받았지만 인간은 버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자가 아무리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여 기쁨으로 바친다 하더라도 냉정하게 따지면 하나님 쪽에서 신자더러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케 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케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인간 쪽에 세상의 것으로는 단 하나의 유보(留保, reserve)도 없어야 합니다. 아브라함더러 외아들마저 바치라는 것이야말로 진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뜻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시급하게 버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면 그분으로부터 보상으로 복을 받으리라 기대하는 불신자 시절의 뿌리 깊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미 주어놓은 당신의 것을 다시 받아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브라함도 백 살에 얻은 아들마저 바쳤는데 하나님께 무엇을 더 받으려 기대했겠습니까? 그는 문자 그대로 완전히 다 버렸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여정도, 또 하나님이 신자를 도착시키려는 목적지도 그와 다를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그를 불러내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때에 그를 향한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내용은 그대로 두고 순서만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너는 너 외아들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산으로 가라.”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그에게 믿음이 처음 생기게 할 때나 인생을 정리할 마지막 시점에서나 하나님이 그에게 원한 것은 동일했다는 뜻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다 자식까지 즉 세상의 것 모두 버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오직 당신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게끔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바로 이 한가지였습니다.
그럼 그 지시하는 땅과 산이 어디입니까?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까? 그중에서도 모리아 산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산도 버려야 합니다. 그곳은 영원한 도성 천국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죽음입니다. 허무합니까? 아닙니다. 인간 쪽에선 죽음이지만 하나님 쪽에선 천국입니다. 믿음의 내용과 여정뿐 아니라 그 열매마저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바쳐라가 아니라 버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반면에 불신자의 인생 여정은 이 땅의 것으로 쌓기만 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이 땅의 가나안이요 모리아 산일뿐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인데도 불신자는 죽을 준비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죽음 너머까지는 꿈도 꾸지 않고 인생에 끝이 있다는 생각조차 못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에 비해 신자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당연히 이 땅의 것은 쌓을 필요 없이 몽땅 버려야 합니다. 상식적으로도 죽음을 준비하려면 어차피 모든 것을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죽음을 건너 가야할 곳이 있어 준비 과정으로 버리는 것과 죽음이 완전히 끝이므로 무조건 버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천국 시민에 합당하도록 훈련하고 준비시키려고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신자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랬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의 것을 모두 버린 신자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시고 그를 위하여 도성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버려나가는 것이라면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든 빨리 죽어서 천국에만 가면 최고의 신앙입니까? 이 땅에 천국이 도래하였으니 침노하여 차지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또 하나님 나라를 모든 열방에게 확장시켜야 할 신자의 책임은 무시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에 이삭을 동행시킨, 아니 이삭을 제물로 삼으라고 하신 뜻을 살펴야 합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는 믿음의 시범을 그 아들에게도, 특별히 아들로선 제물로 바쳐졌기에 완전히 실감나고 평생을 두고 절대 잊지 않게끔, 보이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이 이 땅의 것 모두 버리고 천국을 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삭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버려 온전한 순종을 보인 후에 이삭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확장시킬 책임과 소명은 이제 이삭에게 이어진 것입니다. 신앙이 대대로 이어짐으로 천국은 확장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이 땅에 이뤄질 천국의 실제적 모습은 일이나 물건으로가 아니라 사람들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이 대변하는 물질, 권력, 명예가 절대 천국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앙은 이 땅에서부터 천국 시민으로 훈련 받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으로 그곳에 들어가려면 오직 천국에서 소용 있는 것들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크게 유효하더라도 천국에선 쓸모없는 것들은 당연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보혈로 성결케 된 성품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과 주님을 맞대면하여 영원토록 경배할 소망 외에 천국에 필요한 것이 과연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성품과 믿음과 소망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에서의 그분의 나라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연약한 체질이라 이 땅에선 도저히 온전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니까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자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 도전 위로 권면하면서 함께 자라나가는 곳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성도가 속한 가정과 직장이 또 조직체로서의 개별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성도로 이 땅에서의 형통을 주려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제대로 죽을 준비를 시키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자는 이 땅에서부터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본문 식으로 말하자면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마저 버리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천국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자기 전부를 걸더라도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늘에만 있고 돌아갈 이전의 본향은 이미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 하나만은 아무 흔들림 없이 분명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천국 도성을 향해 다는 몰라도 하나씩 버려나가고는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믿음의 여정을 제대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속한 곳이 특별히 교회가 이 땅의 하나님 나라라는, 아니면 최소한 그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확신은 있습니까? 요컨대 교회가 이 땅의 것을 쌓는 법과 버리는 법 중에 어느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2/29/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