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사 한 분이 그와 꼭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하기는 퍽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하고 장로는 말했다. “그 의사는 나이도 지긋하고 누가 보아도 현명한 사람이었는데 당신과 똑같은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았지요. 물론 그것은 농담삼아 한 말이었지만 그냥 단순히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서글픈 이야기였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런데 스스로 놀랄 일은 내가 인류 전체를 사랑할수록 인간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공상 속에서는 지극히 열정적으로 인류에 대한 봉사를 꿈꾸어 보기도 하고, 만일 어떤 기회에 갑자기 그럴 필요가 생긴다면 실제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힐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그 어떤 사람과도 단 이틀도 한 방에서 같이 지낼 수가 없다. 이건 실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누구든지 내 옆으로 다가오기만 하면 곧 그 개성이 나의 자존심과 자유를 압박한다. 그래서 곧 그에게 증오를 느끼게 된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가령 그 사람이 식사를 너무 오래 한다든가, 감기에 걸려 연방 코를 훌쩍거린다든가 하는 하찮은 이유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인간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은 더욱 뜨겁게 타오르곤 한다.’ 대강 이런 뜻의 이야기였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경우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지요? 결국 절망 속에 빠지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는 않지요, 당신이 그런 이유로 가슴 아파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다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그만한 보답이 따르게 됩니다. 당신이 그만큼 진지하고 심각하게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이미 많은 일을 행한 셈이지요. 그렇지만 지금 그토록 진지하게 나에게 한 말도, 단지 자신의 성실함을 칭찬받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천적인 사랑에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오직 공상 속에서만 살아 있을 뿐, 당신의 일생은 마치 환영처럼 어른거리다가 없어지고 말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세에 대한 생각도 사라져 버리고 마침내는 아무런 위안도 느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장로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장로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순간, 제가 배은망덕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나는 성실성에 대한 당신의 칭찬을 바랐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저의 허식에 찬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제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셨어요. 나에게 나라는 인간을 설명해 주신 거예요!”
“진정으로 하는 말인가요? 그런 고백을 들었으니 나도 당신이 성실하고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겠소이다. 당장 행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자기가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특히 중요한 것은 거짓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거짓을,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을 범하지 말아야지요. 자기가 지금 거짓을 행하고 있지 않나 매시 매분마다 반성해 보십시오. 또 한 가지 피해야 할 것은 증오입니다. 자기에 대한 것이든 남들에 대한 것이든 일체 미워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추악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자기 내부에 그럴 만한 요소가 잠재해 있기 때문이란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으면 깨끗이 사라지고 마는 법입니다. 두려움 또한 피해야 합니다. 물론 두려움이란 온갖 거짓에서 생겨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지요.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도 자기의 소심한 마음을 결코 탓해서는 안됩니다. 설사 자기가 일시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결코 낙심해서는 안되지요. 아무튼 실천적인 사랑이란 공상 속의 사랑과는 달리 무척이나 냉혹하고 가혹한 것이지요. 공상적인 사랑은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 그 자리에서 만족할 만큼 성과를 거두기를 바라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마치 무대 위의 연극처럼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기 위해서는 마침내 생명까지라도 내던지겠다고 나서게까지 되고 말지요. 그렇지만 실천적인 사랑은 그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묵묵한 노동과 인내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훌륭한 학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미리간에 말해 두지만 실천적인 사랑이란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목표에 이르지도 않고 오히려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지요. 그렇지만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홀연히 그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비로소 우리를 사랑하시고 남몰래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기적적인 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안에서 기다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군요.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카라마조프 형제/도스토예프스키/최경준 옮김 - <홍신문화사> p.79-80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읽고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올렸습니다.
혹시 문제가 된다면 지우겠습니다.
너무 감사한 글, 제 맘에 지금 너무도 필요한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
공상과 실체 사이.. 그 간극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저
환상가, 몽상가에 머무르고 말겠지요. 제가 자주 그렇거든요.
그렇지만 깨닫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실체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건
부끄러움이고 그건 수치스럼이지만, 그렇지만 이제 시작임을 깨닫고
조심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을 수 있음을 배웁니다.
자매님의 글에 힘을 얻습니다. 감사해요. 자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