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권능은 엄청이나 폭발적이라 생각해왔다.  성경 곳곳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특히 베드로의 설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돌아서는 장면과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때... 등등을 보며 성령의 권능은 그러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더 크신 권능은 우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바꿔가시는 능력이 가히 폭발적인 권능임을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된다. 어느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 능력,  신자 자신이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거부할 수 없는 그 권능은 정말 크신 권능이며 사랑으로 빚어진 능력임을 배운다.

온 우주보다 더 사랑하여 주시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그 가운데 내가 있음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지, 그 일을 위해 오시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권능,  우리 예수님의 능력의 권능, 그리고 부활하신 놀라운 권능속에 우리가 있게하심이 너무도 놀라운 폭발적인 권능임을...  그것뿐만이 아니고 복음 속에 들어온 자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게 하심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놀라운 권능이심을 고백할 수 밖엔...

오래도록 주변환경에 모든 시선이 머물렀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것은 마귀의 계략이라 배워왔다.  심지어 감기에 걸려도 마귀,  집안에 도둑이 들어도 마귀..마귀의 역사라고 배워왔던 터라 환난앞에선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를 엄청해왔다.  마치 나의 기도의 분량이 부족하여서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멈칫하고 계시다고 느꼈었다.  때문에 기도의 방향은 늘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속히 커지시도록 목청을 높이며 기도함이 최고인 줄로 알았었다.  정말 잘못 배워왔던 것이다.

방향부터 바로 잡아감이 참 시급한 일인 것 같다.  택하신 족속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모든 상황, 환경을 만들어 가시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아니,  전혀 배워보지 못했었다.  때문에 상황과 환경을 어렵게하는 마귀들의 궤계와 싸우는 것이 성도의 할일이라 여기며  교회안에서 봉사하고 모든 시간과 물질 아끼지 아니하고 얼마나 충성하였는지 모른다.  그런 행위속에서도 마귀의 계략은 무너져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마귀는 눈에 보이게 우는사자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였다.  내 심령안에서,  내 안의 작은 우주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의심이 가도록 속살거리는 음성이였다.  내 안의 자그마한 우주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그 귀하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속살거리는 내 안의 음성이였다.  내가 왕인 내 안의 우주에서 그 왕의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나의 음성이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으로 걸어가지 싫어하는 나의 고집이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폭발은 성령님이 오시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지시고 돌아가신 것을 친히 가르쳐 주신 것,  그게 너무도 죄송하고 황송하여서 어쩔 줄 몰라 절절매게되는 그 일,  도무지 나의 죄를 보면 어떻게 이런 죄를 대신 지시고 그리고 대신 돌아가실 수가 있는가?  너무도 놀라와 엎드리게 하시는 이 일이 너무도 큰 폭발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폭발은 내 안에서 속살대는 마귀의 속삭임에 성령님은 끊임없이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그 속삭임에 속지 않도록 도우시는 은혜임을 고백한다.  그래서 얼마나 얼마나 귀한 사랑을 온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폭발적이면 독생자를 보내시어 대신 죽게하셨는지... 그 십자가 사랑은 얼마나 폭발적인지... 그 십자가 대속의 사랑은 얼마나 폭발적인지..

의인

2012.06.13 02:50:19
*.88.101.130

좀 길지만....


C. 존 웨슬리의 회심과 복음주의 부흥운동자들


1. 존 웨슬리의 윤리적 회심 : 2. 존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

3. 존 웨슬리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


 

 

웨슬리의 삶의 전환점은 ‘회심’이다. 그리고 이 회심사건은 영국사에 새국면을 시작하게 한 혁명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웨슬리의 이 회심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의 부흥운동이나 사회개혁에 대해 참된 이해를 할 수 없다. 그런데 학자들 간에는 웨슬리의 회심에 대해 1725년과 1738년의 문제를 놓고 이견을 표출하고 있다. 본 연구자는 대다수 웨슬리 학자들의 견해를 따라 1725년을 웨슬리의 ‘윤리적인 회심’으로, 1738년을 ‘복음적인 회심’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웨슬리의 사회개혁활동에 대한 이해에 양자 모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1. 존 웨슬리의 윤리적 회심


가. 신비주의자들의 영향과 웨슬리의 헌신의 다짐

1725년은 캐논의 말처럼 “웨슬리의 생애에 큰 빛을 준 해”였다. 웨슬리는 그 해에 성직 안수를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1725년에 테일러(J. Taylor)와 켐펜의 토마스(Tomas a Kempis) 그리고 후에 로우(William Law)의 저서들을 읽고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했던 것이다.

웨슬레는 1725년에 성직을 취하기로 결심한 후 도덕적인 결함으로 갈등하며 성결을 애타게 추구하였는데, 이 시기에 일련의 신앙서적들이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독자 완전에 관한 평이한 설명(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1766)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첫 번째로 거론된 책이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The Rule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다. 베이커(Frank Baker)는 테일러에 대해 “17세기의 국교도 중 존 웨슬리의 영적인 아버지로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웨슬리에게 미친 영향의 크기를 가늠케 해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웨슬리는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시간 사용에 관한 규칙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을 위한 의도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었다.

웨슬리는 우선적으로 그 저술을 통해 시간 사용에 대해 새로운 규칙들을 세웠다. 그는 자기의 시간 사용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 사용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면밀하게 시간 사용을 계획하여 그의 삶을 통제하였는데, 웨슬리는 이 원칙을 지속적으로 고수하여 메도디스트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그 저술이 웨슬레에게 미친 더 중요한 점은 “의도의 순수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23세가 되던 해인 1725년에 테일러 감독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칙과 훈련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을 읽으면서 크게 감동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의도의 순수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였다. 나는 즉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 곧 나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내가 철저하게 깨달은 바대로, 내 삶의 전부분이 하나님께 제물이 되든지 아니면 악마에게 제물이 되든지 하는 것이지 중간적 입장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테일러 감독이 주장하는 이 의도의 순수성은 웨슬리의 특징적인 교리로 알려지게 된 “기독자 완전”의 교리에 공헌을 했다. 기독자 완전에 대한 웨슬리의 정의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캐논의 설명에 의하면 “웨슬리에게 있어 기독자 완전은 단 한 가지 일, 다시 말해 의도의 순수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욕망의 모든 부패성에서 온전히 벗어나고 자기 자신의 이익 혹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어떤 다른 사람이나 일에 관한 이해 관계에서 온전히 해방된,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이다.”

이처럼 웨슬리는 테일러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에 있어, 웨슬리는 테일러 보다 하나님의 행위의 필요성을 더 강조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가 그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에서 언급한 두 번째 책은 켐펜의 토마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였다. 그는 그 책으로부터 “진정한 종교는 마음에 자리하며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은 물론 우리의 모든 사고에 까지도 확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테일러로부터 삶의 헌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토마스로부터는 마음의 헌신에 대한 깨달음 얻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에 대한 평이한 설명 서문을 통해 토마스가 종교는 형식적인 형태나 의식(ritual) 이상임을 강조한 것이 준 충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내적 종교, 곧 마음의 종교의 본질과 범위가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 강렬한 빛으로 지금 내게 나타났다. 나는 내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 다시 말해 나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토마스는 웨슬리로 하여금 내적 성결을 추구하게 하였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게 하였다. 그러나 웨슬리가 토마스의 견해를 모두 다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웨슬리가 토마스를 위대한 신비주의자의 한 사람으로 존중시 하기는 했지만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죄악시하는 점과 그러한 것들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수도원적인 금욕주의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웨슬리는 이 중세 수도원적인 헌신에 관한 고전을 버리지는 않았다.

웨슬리의 경건 삼두 마차의 세 번째 멤버는 웨슬리와 동시대인인 로우이다. 베이커(Eric W. Baker)는 이 세 사람 중에서 직접적인 접촉을 가진 로우가 웨슬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아마도 이 판단은 정확할 것이다.

웨슬리는 로우의 기독자 완전에 대한 실제적인 논문(A Practical Treatise upon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초청(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을 읽고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할 것을 더 확실하게 결심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 기독자 완전에 관한 평이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 이년 후 나는 로우 씨의 기독자 완전과 진지한 초청을 접하게 되었다. 이 저서들은 나에게 반(semi)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확신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은총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을 통하여 나의 모든 혼과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결단하였다.


이처럼 로우의 이 저서들은 웨슬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결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헌신의 결단은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내.외적인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했다. 웨슬리는 로우의 이러한 기독자 완전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전달했고 읽게 하여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로우의 사상을 따라 생겨난 무리들”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비록 1738년의 경험 후에 웨슬리는 로우가 신앙의인의 길을 보여주지 못한 점에 대해 비난하기는 했지만, 그가 그 길을 따라 그의 완전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로우에게 진 빚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1788년에 그의 설교를 통해 경건과 거룩한 삶에로의 진지한 초청에 대해 “표현의 아름다움이나 사고의 심오성 및 정확성에 있어서 누구도 결코 능가하기 어려운 탁월한 논문”이라고 극찬했다.

실로 위의 세 사람은 웨슬리의 경건의 지도자요 교사들이다. 그들을 통해 웨슬리는 크리스챤의 삶은 헌신, 곧 하나님과 이웃사랑에서의 헌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성격에서 불어 넣은 급진적인 변화이다. 웨슬리는 이들을 통해 신앙에 대해 내외적으로 진지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아우틀러는 이를 “회심”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때에 웨슬리는 헌신적인 사역을 영적인 건강의 결과로 보다는 수단으로 이해했다. 이는 일종의 헌신적인 율법주의였다. 이처럼 1725년의 회심은 의무감과 규율에 따라 살려는 결심에 기반을 둔 윤리적인 것이었다.


나. 신성 클럽(Holy Club)을 통한 경건과 선행 훈련


신성 클럽은 웨슬리가 테일러와 로우 등을 만난 이후로 그의 크리스챤적인 행보의 표식이 되었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위한 매개물을 그에게 제공해 주었다. 신성 클럽은 웨슬리에게 그러한 것을 위한 실험실이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신성클럽을 통해 헌신의 삶에 전적으로 몰입했다.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과 함께 낮에는 선행으로 저녁에는 기도와 성경연구로 시간을 활용했는데 오전 4시에 시작하여 저녁 9시에 일과를 마쳤다. 그것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신성 클럽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몰간(William Morgan)의 동생인 리챠드 몰간 (Richard Morgan)이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는 경사지긴 했지만 신성 크럽의 호기심을 끄는 모습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그들 삶의 매 시간, 아니 매 분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의 회심을 위한 책을 구입하기 위해 거의 굶고 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기괴한 모습이 될 정도로 마르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 전체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길에 있어 이러한 내적인 개인의 경건훈련 외에 신성클럽에서 웨슬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은 선행이었다. 웨슬리는 1730년에 신성클럽 회원인 몰간(William Morgan)의 제의를 통해 교도소 방문과 그 도시의 가난하고 병든 자 돕기 등 사람들의 몸과 영혼을 직접 대면해 행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피이트가 “지금까지 거의 배타적으로 자기자신에게만 열중해 있던 웨슬리를 하나님을 위해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도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의미 있는 평가라 하겠다.

이 때부터 자선이 웨슬리의 삶에 현저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신성클럽 회원들과 더불어 옥스포드 교도소와 보카도(Bocardo) 교도소에 매주 3회 이상 봉사를 지속했고 재소자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이를 위해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당시 웨슬리의 옥스포드 일기에는 영혼은 물론 육신에 대한 그의 관심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웨슬리가 영적인 행복에만 집착해 있던 초기의 협소함에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음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미래의 메도디즘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신성크럽의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신성크럽 자체를 메도디즘의 터전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식과 활동은 단지 지역적인 경건의 격려 차원이었을 뿐이고, 그들의 열정과 야심은 한 순간도 더 넓은 벌판을 관찰하지 못했으며 성직자나 대중들에게 호소할 어떠한 사상도 담지하고 있지 못했다. 이 때의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의 첫째되는 충동은 여전히 자기보존적 차원의 질을 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무적인 접근 방식에 있어 웨슬리는 그의 두 윤리적 조력자의 충실한 제자였다. 켐펜의 토마스(Thomas a Kempis) 경우를 보면, “자비 행위에 관하여”라는 장(chapter)에서 박애에 대해 약간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영성에 이르는 명상적인 길에서는 사회적 차원을 찾아 볼 수 없다. 반면에 테일러(Taylor)와 로우(Law)는 사회적인 책임성을 의무적으로 이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사회적인 민감성에 대해서는 칭찬할만하나 그 동기는 굽어 있다. 자기의 구원을 포함해 자선 행위자에 대한 이점들이 중심이 되어 있을 뿐 그러한 행위를 함에 있어 사랑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선행이 회심한 삶의 결실로서가 아니라 상 받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율법주의와 영적인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웨슬리의 옥스포드 신앙은 도의심과 의무라는 이러한 계통을 본 받은 것이었다. 그의 믿음은 여전히 사랑 보다는 의무적인 믿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게다가 테일러나 로우와 마찬가지로 웨슬리는 사회봉사인 구제로 만족해 했을 뿐, 자선을 넘어서고 그러한 자선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요건들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웨슬리와 그의 옥스포드 동료들이 풍자적으로 “개혁 크럽”이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지만 그 말은 영적 개혁에 관한 것이었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개혁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선행에 관해 주목했지만 그러한 행위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다. 복음적인 회심의 징검다리로서의 조지아 선교


신성크럽 활동의 연장이라 할 웨슬리의 조지아에서의 경험은 결과적으로 웨슬리로 하여금 테일러와 로오의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복음에로 향하게 하고, 의무적인 선행에서 사랑이 동기가 되는 선행에로 방향을 전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지아 선교 당시의 웨슬리를 보면 그의 율법주의적인 의식주의와 금욕 그리고 헌신이 그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웨슬리가 오그레토프(Oglethorpe) 장군의 요청을 받아 들여 ‘복음 전파회’(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의 파송을 받아 새로운 식민지인 조지아 선교를 떠나게 된 것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더 높은 단계의 성결을 성취하고 더 의미 있는 선을 이루고자 하는 동기에서 였다.

웨슬리는 이러한 의도에서 1735년 10월 14일에 동생 챨스(Charles Wesley), 잉햄(Benjamin Ingham), 그리고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함께 시몬즈 (Simmonds)라는 배에 승선했다. 벌리아미(C. E. Vulliamy)는 이를 가리켜 “물 위의 신성클럽”이라고 칭했다. 사실 웨슬리는 신성클럽을 최소한 부분적이라도 아메리카에 이식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성클럽 동료들과 함께 선상에서도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병든 자들을 돌보며 승객들을 교화시키는 사역과 개인 경건생활에 힘쓰는 등 아침 4시부터 밤 9-10시까지 매일 매시간 계획에 따라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움직였다. 1736년 2월 6일에 조지아에 당도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조지아에서의 그의 율법주의적인 사역은 그리 전도가 밝지 못했다. 교구민들이나 인디안들에게 그의 의식주의적인 추상적인 견해와 자신의 영혼상태에 대한 문제에 사로잡혀 정통주의적인 관례를 엄격히 준수하고 정통주의적인 열렬한 신앙고백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려는 그의 사역은 별 소득이 없었다. 그는 소수의 사람에게 존경을 받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에게 돌아 오는 것은 실망과 좌절 그리고 깊은 영적 무력감의 쓰라림이었다. 후에 웨슬리는 이 때의 그의 삶에 대해 다음 같이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행위와 의를 신봉하는 용의 주도한 방식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나는 설교를 계속했고, 육신을 지닌 자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러한 의를 쫓았고 신봉했다.… 나는 이처럼 허공을 치고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믿음을 통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이 이르게 된다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날을 그렇게 불 속에서 애를 썼다.… 나는 여전히 “은혜 아래” 있지 않고 “법 아래” 있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조지아 사역은 사바나(Savannah) 행정장관의 조카인 홉키(Sophia Hopkey)와의 사랑의 실패로 종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련의 그 불행은 성찬예식에서 그녀에 대한 추방과 조지아로부터의 웨슬리에 대한 추방을 결과했다. 웨슬리는 명예훼손죄로 고발을 당한 가운데 1737년 12월 22일에 낙담과 당혹감을 안고 그 식민지를 떠나 영국행 배에 오르게 되었다.

비록 이처럼 조지아의 사역이 좌절스러운 것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적인 문제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그는 1725-1726년의 “훌륭한 결심”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인식하고 그 이상의 것을 찾아 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그의 그러한 감정과 생각을 귀국 항해 중의 일기에 나타내 보이고 있다. 1938년1월 24일의 일기에 “나는 인디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아메리카에 갔었다. 그러나 오! 나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라고 했고, 2월 1일의 일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려 아메리카에 간 나 자신은 하나님께로 회심한 일이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나는 진노의 자식이요, 지옥의 후사이다”라고 기술해 놓았다.

참으로 신성클럽의 경건과 박애정신은 구경꾼들에게는 인상적인 것이었으나, 웨슬리는 그것들이 궁극적으로는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더 나쁘고 비생산적인 것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테일러와 로오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한도에 까지 도달했지만 그것은 그에게 궁극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귀향 선상에서 제기했던 그러한 의문들을 해결해 줄 종교적인 체험의 출발선상에 서 있었다. 더 나아가 올더스케이트에서 그가 하나님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사회적인 모든 활동과 의식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 존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


만일 웨슬리가 ‘윤리적 회심’의 상태에만 머문 채 35세 시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면, 그는 능력 있고 규칙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인물이지만 현학적이고 율법적이며 성마르고 애교라고는 거의 없는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 외엔 별로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인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시대 후의 영국 사회 전반적인 풍조를 변화시킨”, 그리고 “영국이 세익스피어 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그러한 인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 분기점은 1738년 5월 24일에 있었던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이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것을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이라고 부른다. 웨슬리 부흥운동의 사회개혁활동에 대한 탐구를 위해 그 배경이 되는 이 올더스게이트의 체험과 그것의 사회적인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가.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과 그 의미

조지아에서 좌절을 안고 영국에 되돌아 온 웨슬리는 당황과 심한 마음의 갈등 속에 있었다. 그는 곧바로 조지아에서 모라비안 선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영국에 머물고 있는 뵐러(Peter Boehler)를 만나 신앙의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3개월 이상 지속된 대화의 핵심은 이신득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웨슬리는 로우의 두 실천적인 논문들을 모델로 하여 2년 동안 행한 설교는 자기 자신과 교구민들에게 아무런 향상도 이루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인해 가중된 좌절과 절망 중에 있었다. 그는 사바나에서의 자신의 설교를 “허공을 치는 것”이었다고 묘사 했다. 이처럼 그의 표현대로 무거운 멍에 아래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웨슬리는 한 거룩한 사람(뵐러)을 통해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에 대해 듣게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에게 그것은 “새로운 복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윤리적 기독교의 스승이었던 로우에게 편지를 통해 왜 자기에게 그러한 발견에로 인도하지 않았는지를 알려 달라고 하면서, “나는 당신이 내게 이것에 대해 강조하지 않는 참된 이유가 당신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지를 편견 없이 깊이 숙고해 보시기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간청합니다”라고 했다. 이후로 18세기 영국의 이 두 거인 간에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틈새가 벌어졌다. 웨슬리는 그 동안 로우와 그의 윤리적 기독교의 제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뵐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스승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에 올더스게이트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 상황에 대해 그의 저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종교 모임에 갔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전 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역사하사 일으키시는 변화를 말할 때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전환점이었다. 웨슬리 학자들 간에 이 올더스게이트의 중요성에 관해 의견이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평가절하하며 심지어는 해로운 것이었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도 있다. 피이트(Maximin Piette)와 얼린(R. Denny Urlin)이 그 대표자들인데, 두 사람 모두 옥스포드에서의 윤리적 각성이 참된 회심이었다고 주장한다. 올더스게이트를 존중히 여기지마는 그것을 여러 회심들 중의 하나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아우틀러와 슈미트가 그 대표자들이다. 리(Umphrey Lee) 같은 사람은 올더스게이트 사건을 “한 종교적인 사람의 종교적 헌신의 더 높은 단계로의 회심”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셀(George Croft Cell)은 웨슬레의 1738년을 중심으로 하는 이중 연대기를 지적함으로써 올더스게이트를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 전환점으로 이해한다.

물론 웨슬리가 후기에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상태에 대해 의견을 수정하여 그 이전에도 종의 믿음은 지니고 있었고 종의 믿음을 지닌 자도 구원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한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이 올더스게이트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올더스게이트는 분명히 웨슬리에게 있어 노력의 새로운 확대가 아니라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웨슬리의 다른 종교적인 위기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유일한 체험이었다. 웨슬리 자신은 올더스게이트가 자신을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에로,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그리고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피력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웨슬리에게 있어 궁극적인 의미를 지닌 전환점이었다는 셀의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겠다.

이 체험 전에 웨슬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모델을 추종하는 자였다. 그는 금식, 성경 읽기, 훈련된 삶 등의 신비적인 감각체험의 수단들을 통해 구원에 도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라는 결론에로 그를 인도했다. 이 전환점이 갖는 중요성은 웨슬리 한 개인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웨슬리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메도디즘을 낳았고, 렉키의 말처럼 영국 사회를 혁신시킨 “신기원적인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 올더스게이트 체험의 사회적 의미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에 이르기까지 모라비안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는 웨슬리를 정적주의적인 모라비안으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올더스게이트는 웨슬리의 사회적인 관심을 더 강화시켰다. 올더스게이트를 통하여 웨슬리는 마치 따스함과 빛이 태양의 서로 불가분적인 부분인 것처럼 선행은 살아 있는 믿음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며 참된 믿음은 거룩한 열매를 맺는다는 점을 루터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케인즈( Earle E. Cairns)는 다음과 같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올더스케잇의 체험은 웨슬리에게 있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것은 웨슬리에게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신득의 교리는 그의 중요한 교리체계가 될 뿐 아니라 그를 사회적 특성의 일들로 인도해간 근본적인 힘이다…. 웨슬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를 의롭게 하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신 분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케 했다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입증되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낳게 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는 구분이 있을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인간에게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올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최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처럼 웨슬리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회봉사가 기독교의 불가결한 부분이라는 점을 확신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회심 후에 기대감을 갖고 찾아간 모라비안들에게 사회윤리적인 부분에서는 실망을 하게 되었고 끝내 그들과 결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신앙지상주의, 정숙주의, 그리고 율법폐기론적인 경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벱(E. Douglas Bebb)은 만일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결별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머물러 있었다면 그 단체는 윤리적으로 무력함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함께 머무르며 전가된 의의 교리와 의의 무용성 교리, 그리고 더 해로운 ‘은총의 수단’에 대한 교리를 공유했었다면, 그의 사회적인 사역의 주된 후원자요 추진력의 하나인 강력한 윤리적인 의식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불의에 대한 강한 반대나 사회의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 의에 대한 탄원과 하나님 면전에서의 소유물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에 대한 부단한 증거를 지니고 성서에 자신을 몰두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 전에도 사회봉사에 열심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 본대로 그는 전에도 교도소를 방문하여 수감자들을 도왔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학교도 준비하여 교육을 지원하고, 병든 자를 보살폈다. 그리고 조지아에서는 흑인노예들과 백인 노예들을 보고 도울 길을 열심히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 전과 후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내용에서는 변한 것이 없다 하겠으나 그 기초와 동기가 근본적으로 뒤바꿔 졌다. 올더스게이트 이전의 그의 사회봉사는 그 자신의 영혼 구원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나왔다. 그러나 올더스게이트 후에는 그는 새로운 사랑의 힘에 의해 동기를 부여 받게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알게 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남에게 주게 되었다. 이러한 동기의 차이점은 웨슬리의 사회적 관심의 질과 내용에 영향을 미쳤다. 거기에는 여전히 의무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바뀌었다. 힌슨은 “사회윤리가 이기적인 터에 기반을 둘 때 에너지는 감소되고 세상변혁의 힘이 결핍된다”고 했다. 올더스게이트를 통해 웨슬리의 사회관심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율법적이지 않고 무욕적이며 이타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거기에서 세상변혁의 힘이 강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올더스게이트 사건이 웨슬리의 삶과 사역에 미친 효력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웨슬리의 영적 개혁운동은 물론 그의 사회 개혁운동의 “전과 후”를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올더스게이트 사건은 분명히 그의 사회 의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력은 사회적인 문제들과 씨름하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통해 커다란 결실들을 보게 했다. 올더스게이트는 때로 웨슬리에게 그의 다양한 종교적 유산들 곧 고교회의 경건, 청교도의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필요에 대한 민감성, 모라비안의 믿음에의 의존성, 그리고 테일러와 로우의 윤리적인 긴박성 들로 인해 상당한 혼동을 일으키게 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수직과 수평의 조화,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세상에 대한 봉사의 균형이었다.


 

3. 존 웨슬리와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사회 개혁활동에는 당시 복음주의 부흥운동자들의 조력과 협력 및 활약이 큰 힘이 되었다. 웨슬리와 이들과의 관계 및 그들의 활동에 대한 간략한 고찰은 웨슬리 부흥운동과 사회개혁 활동 탐구를 위한 전이해로 도움이 될 것이다.

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챨스 웨슬리(Charles Wesley)


18세기의 부흥운동은 그 전조와 선구자들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몇몇 뛰어난 인물들의 회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국을 영적인 깊은 잠에서 일깨우도록 현저한 도구로 사용한 인물은 웨슬리 형제(John and Charles)와 휫필드였다. 물론 풀-콘너(E. J. Pool-Connor )가 “가장 현저하게 사용된 인물은 웨슬리와 휫필드였다”고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만 찰스 웨슬리의 역할 역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존 웨슬리는 조직가와 관리자로, 휫필드는 웅변가적인 예언자로, 그리고 찰스 웨슬리는 찬송가 작가로 18세기 영국의 대부흥운동에 공헌을 하였기에 그들은 어느 누구도 이 역사적인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임에 틀림 없다.

이 삼총사는 모두가 옥스포드의 신성클럽 멤버들이었다. 신성클럽 시절 존 웨슬리와 그보다 11살 아래인 휫필드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선생과 학생의 관계였다. 그러나 회심체험에서는 휫필드가 웨슬리 형제보다 3년 앞섰고(1735년), 야외설교를 통한 부흥운동도 휫필드에게서 출발되었다. 머뭇거리는 웨슬리를 야외설교의 장으로 강력하게 이끈 것도 휫필드였다. 이렇게 시작된 1739년의 야외설교를 통한 전도가 크게 성공하면서 그들은 모두 함께 동역자로 긴밀한 조화를 이루어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부흥운동에서의 존 웨슬리와 휫필드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예를 들어 웨슬리는 훌륭한 조직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에 휫필드에게는 그것이 결여 되어 있었다. 양자 간에는 설교 스타일에서도 대조적이었다. 웨슬리의 설교는 명료하고 간결하며 절제력이 있었고, 감정보다는 이성과 양심에다 복음을 제시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휫필드는 연극적인 재능과 웅변술 그리고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의 소유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청중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8:28)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러한 양자의 대조적인 은사가 부흥운동에 조화를 이루어 선을 이루었다. 풀-콘너는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면을 사도시대의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루터와 칼빈에 빗대 그러한 상이한 성격이 협력을 이루어 사도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의 대부흥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아마도 존 웨슬리와 휫필드 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한 사람은 알미니우스주의(Arminian)이고 한 사람은 칼빈주의자(Calvinist)였다는 점일 것이다. 이 면에서 양자 간에 갈등과 논쟁이 발생했고 끝내 두 진영은 그 문제로 분열케 되었다. 그러나 양자 간에 교리적인 분열의 벽은 넘어서지 못했지만 감정적인 분열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휫필드는 1739년 8월에 웨슬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전히 “존경하며 사랑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고,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가 가는 곳마다 나보다 우선권을 취하도록 허락하셨다”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웨슬리는 휫필드에 대해 “그는 평화와 사랑의 향기만 발하는 사람이다…. 그 앞에는 편협이 자리할 수 없다. 그가 가는 곳마다 편협이 머리를 감춘다”고 했다. 그들 간의 긴장 관계는 1749년에 휫필드가 칼빈주의적 메도디스트 신도회에 대한 공적 지도권을 포기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휫필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설교 능력에 비해 조직력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목회자나 조직가로는 적절치 못하며 자신의 주된 은사가 여행전도에 있음을 깨닫고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메리카를 왕복 순회전도하는 전도자로 나섰고 양들을 웨슬리에게 양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휫필드는 씨앗을 퍼트리는 자였고 웨슬리는 알곡을 모아 저장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이 두 사람의 그러한 대조적인 은사가 부흥운동에 있어 서로를 보완해 결실을 풍부하게 했다고 본다.

웨슬리와 휫필드의 관계는 장례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1770년 9월 30일에 57세의 나이로 휫필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웨슬리는 휫필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장례식 설교를 주관했다. 휫필드는 자신이 런던의 채플에 뭍히고 그 곁에 웨슬리가 함께 안장되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찰스 웨슬리가 존 웨슬리 운동에 미친 도움은 좀 더 직접적이다. 찰스는 존 웨슬리가 가장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로, 비록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의 지휘자는 아니었지만 그 운동 초기에 있어서는 존 웨슬리 못지않게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오벌톤(Overton)은 찰스가 휫필드 보다도 더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한다. 이 평가는 좀 과장된 면이 있다 할지라도 찬송가 작가로만 아니라 설교자로서, 그리고 존 웨슬리와 휫필드 간의 중재자로서의 찰스의 역할과 공헌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엘리떻-빈스를 통해 확인한 바다.

찰스는 존 웨슬리에 비해 강건치 못한 체질을 지니고 있어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조울병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존 웨슬리처럼 폭도들이나 반대자들 앞에서 담대했고 신도회나 야외설교에서 존에 못지 않은 활동력을 보이며 1750년대까지는 부흥운동에 크게 조력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순회설교에 열심을 내지 않다가 1756년에는 형의 권면도 물리치고 순회설교를 아예 중단했는데 아마도 설교자들과의 유쾌하지 못한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 주원인이었던 것 같다.

찰스의 메도디즘에 대한 더 큰 공헌은 찬송가를 통해서 였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우드의 말처럼 그의 찬송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심금을 어루만져 주었다. 랙은 그의 찬송가가 초기 메도디스트들에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 말하길, “초기 메도디스트들은 설교나 웨슬리의 팜프렛들을 통해서 못지 않게 찰스의 찬송가를 통해 가르침과 인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찬송들로부터 그들은 신학과 심지어 문화를 흡수했다는 것이다. 그의 찬송가는 고전적인 교육을 받고 영국 국교에 정통한 성직자가 평범하고 교육이 불충분하거나 문맹인 대중들을 위해 그들에게 맞춰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와 중요성이 더 크다. 이 점에서 그는 왓츠(Isaac Watts)를 닮았다 하겠다.

찰스가 1788년 3월 29일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죽음은 존 웨슬리에게 큰 슬픔이 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존 웨슬리는 그의 50년 간의 사역에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강단에 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당시 존 웨슬리는 사랑받는 인물이 되어 영국 도처에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벌리아미의 말처럼 “누구도 초기에 모든 시련과 위험에 함께 했던 따뜻한 마음을 지닌 동생 찰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


부흥운동 초기에 부흥운동 세력은 크게 두 갈래로 구분되었다. 한 편은 점차 분파(sect)의 입장에로 흘러 가고 있었다면, 다른 쪽은 압제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국교회에 충실한 측이었다. 점차로 분파적 경향이 있는 측에게는 메도디스트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고, 국교 내에 있는 부흥운동파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s)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나 한 특정인을 어느 계열에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다. 발레인(G. R. Balleine)은 교구 체계에 대한 입장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메도디스트들은 세계가 그의 교구라는 입장인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교구가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자들은 순회전도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순회하는 자들도 대부분 그들의 교구 사역을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을 웨슬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복음주의자들의 운동이 직접 메도디스트들에게서 유래된 것은 아니라 해도 메도디스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부흥운동은 국교 내에 회심을 경험한 상당수의 성직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들 중 대다수가 웨슬리와 휫필드와의 접촉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웨슬리와 휫필드가 그 운동의 방법에 대한 주요한 대표자요 공표자(publicist)이며 그들이 그 활동력을 고취시켰고 어느 정도는 하나로 통일 시켰기 때문이다.

이 두 지류들은 활약 무대상 각각의 특징이 있다.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은 초기에 영국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발생했고 복음주의 부흥운동은 후기에 상류층들 가운데 확대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의 역할에도 서로의 특징이 있었다. 앞에서 존 웨슬리와 휫필드의 상이성이 서로 협력하여 더 큰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여기 두 지류의 부흥운동의 경우에도 그러한 견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케언즈(Cairns)는 이 부흥운동들이 19세기 영국의 사회개혁에 공헌한 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웨슬리와 휫필드 아래에서 영국 하류층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부흥운동은 19세기 사회개혁을 위한 병력을 제공했고, 18세기 말경 영국 국교 안에서 일어났던 복음주의적인 부흥운동은 많은 성직자들과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중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으로 19세기 사회개혁의 지도자들에 대한 공헌을 했다.

적합한 평가라 하겠다. 영국의 개혁에 있어 메도디스트 부흥운동은 아래로부터 위로, 복음주의파 부흥운동은 위로부터 아래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 결국은 협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부흥운동에 있어서도 상호 협력적이었지만, 특히 사회개혁 활동에 있어 웨슬레는 복음주의파가 낳은 상류층의 사회개혁자들을 통해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었다. 이 면에 관해서는 IV-V장에서 더 자세히 고찰하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파의 중요한 인물들로는 로메인(William Romaine), 벤(Henry Venn), 그림쇼우(William Grimshaw), 플레쳐(John Fletcher), 뉴톤(John Newton), 밀너( Milner), 그리고 시므온(Charles Simeon)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성직자들 보다 이 시기의 개혁에서 더 영향력이 있었고 웨슬리의 사회개혁 활동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들은 “크라팜 섹트” (Clapham Sect) 멤버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평신도들로 대부분 국교회 사람들이었으나 열렬한 복음주의자였기에 내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막중한 영향력이 있는 인도 총독, 동인도회사 사장, 식민지 책임자, 의회의원, 대은행장, 자선 사업가, 그리고 정치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직업을 거룩한 “소명”으로 간주했고, 자신을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요 전도자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고백한 믿음을 실제로 적용하는 일에 놀라울 정도로 솔선했다. 그들 중에는 국교도, 비국교도, 퀘이커 교도도 있었고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중립파들도 있었으나 복음주의적인 기독교 그리고 “그리스도의 윤리를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국가적, 그리고 초국가적인 일에 적용시키는 열정”이 그들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이들의 그러한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케언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거룩한 마을”은 1738년부터 1834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사회개혁과 종교적인 열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지였다…. 이 경건한 사람들은 사회상황의 개선을 위해 기독교의 윤리를 국가의 일들에 적용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그들의 개혁 사역을 충실히 후원하는 메도디스트…그리고 기타 다른 개신교파 등의 비국교도들과 자신들이 평신도로 있는 국교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복음주의 부흥 운동자들은 웨슬리의 부흥운동 전개와 사회개혁 활동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든든한 성이요 활력소였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를 정리하면, 웨슬리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전후의 영국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발생된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모든 면에 질병으로 만연되어 있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되어야 할 과제들이 편만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존의 영국 국교는 세속화되고 부패되어 그 시대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복음적인 회심은 영국 사회를 새롭게 할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웨슬리의 복음적 회심은 웨슬리의 자기 구원을 위한 이기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사회봉사를 사랑에 중심을 둔 사회적인 관심으로 전환케 했는데, 이로써 웨슬리의 세상변혁의 힘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혼자 만의 힘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휫필드, 찰스 웨슬리, 그리고 ‘크라팜 섹트’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자들의 동역과 후원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추력에 힘을 배가시켰다. 특히 후기의 사회개혁 활동에 있어 ‘크라팜 섹트’ 멤버들은 웨슬리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세력들이었다.

웨슬리가 올더스게이트의 복음적 회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되기는 했지만 웨슬리의 그러한 부흥운동의 힘을 형성케 한 기독교적인 운동들이 그 배후에 있었다. 웨슬리의 가계에 내적 유산으로 내려 오던 청교도적 요소, 그리고 웨슬리를 회심으로 이끄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던 독일, 특히 모라비안 경건주의, 그리고 메도디스트들의 훈련을 위한 조직에 선례를 제공해 준 고교회 전통의 ‘종교 단체’ 조직이 웨슬리 부흥운동의 동인을 이루었다. 당시 이신론적 합리주의가 만들어 놓은 회의주의도 웨슬리 부흥운동의 출현을 필연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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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 팔라우 현지인들의 가슴을 적신 눈물 [1] 홍성림 2012-06-25 702
1448 노방전도 사라의 웃음 2012-06-24 599
1447 '교만보다 더 싫은 것은?' 을 읽고 사라의 웃음 2012-06-24 612
1446 '차라리 하나님의 긍휼을 잊어라'를 읽고 사라의 웃음 2012-06-23 633
1445 6월 29일(금) 한국 번개팅 공지 입니다. [8] mskong 2012-06-22 659
1444 예수는 없다 마지막글 [3] kwangtae park 2012-06-21 575
1443 김승겸님 댓글에 대한 답글 [4] kwangtae park 2012-06-20 681
1442 금식기도에 관해 질문합니다. [1] More than Enough 2012-06-19 511
1441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로 드러나는 일'을 읽고.. 사라의 웃음 2012-06-17 490
1440 십자가로만 향하도록... 사라의 웃음 2012-06-16 524
1439 신자의 신앙적 불안 ('영혼을 깨워라' 를 읽고..) 사라의 웃음 2012-06-15 516
1438 회식자리 사라의 웃음 2012-06-14 583
1437 오랫동안 씨름해 오던 일 [4] 사라의 웃음 2012-06-13 562
1436 예수는 없다 질문10(질문 9의 답변에 대한 답글2 [4] kwangtae park 2012-06-13 547
» '성령의 권능은 폭발적이지 않다' 를 읽고... [1] 사라의 웃음 2012-06-12 655
1434 내 안의 작은 우주 사라의 웃음 2012-06-11 563
1433 용수철 보다도 더 빠른... 사라의 웃음 2012-06-11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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