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18장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ㅡ> 21절에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와
22절 '거짓말하는 영을'에서
일반적으로 알기는 거짓말하는 영은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위의 거짓말하는 영은
하늘에 있는 천사(즉 돕는 영)가 잠시 거짓말하는 영으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날도 거짓말하는 영은 대체로 타락한 천사
즉 악령의 역사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궁금해서 질문을 올립니다.
언제나 목사님의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인간의 죄성으로인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사탄의 활동과 악한 영들의 활동을 허용하셨다라고 생각하구요. 여기에서도 거짓말하는 영을 사용하셨다기 보다 이것도 허용으로 보는 것은 어떤가요?
유유상종하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라고 보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사탄과 악한 영들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방해 활동들 마저도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지혜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재료로 사용하고 계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엇습니다.
두번째는 사울이 비록 왕가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한 번 임한 자는 신약에서 구원받은 자로 봐도 무방하지 않나요?
그는 전장에서 끝까지 책무를 다하다가 전사하였는데 구원에서마저 버림받은 것과 연계가 잘 되지 않습니다. ㅠㅠ
배승형님 최근 들어서 활발하게 은혜로운 의견들을 나눠주셔서 운영자로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방해 활동들 마저도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지혜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재료로 사용하고 계신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엇습니다." - 형제님의 의견과 제가 상기에 단 첫 댓글에서 내용상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습니다만... '동원'(적극적 활용)과 '허용'(소극적 방임)이라는 두 가지 방식 다 하나님은 행할 수 있습니다. 댓글로 간단하게 답변하다 보니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사용'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울의 구원에 관해선 성경문답 사이트의 "이순신 장군은 죽어 지옥 갔는가? 천국 갔는가?"와 "한 번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가룟 유다, 사울 왕, 히6:4-9의 경우)"의 두 글을 천천히 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로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일시적으로 임해 역사했다가 바로 떠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며 사울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신약시대엔 오순절 이후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푼 성도에게 내주하여 떠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샬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산의 중앙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뿐이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와의 눈에 먹음직스럽고, 보암직하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인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였습니다.
그 열매를 먹은 뒤로 모든 인류는 거짓의 영을 따르게 됐습니다. 악의 눈에는 악만 보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거짓을 말하는 영을 보내시지 않아도 우리는 본성적으로 거짓을 듣고, 거짓을 말하며, 거짓을 따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따로 완악하게 하시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은 항상 완악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닫고 귀를 막지 않으셔도 우리의 눈과 귀는 언제나 닫혀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이 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눈과 귀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는 결코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찾지도 않으며 원하지도 않는 패역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갖고 노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의 영과 진리의 영을 교대로 보내 우리를 농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거짓의 종이 되었기에 거짓만을 원하고, 거짓과 하나가 되었기에 거짓을 진리로 믿고 따르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의 그러한 처지조차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구태여 거짓을 말하는 영을 보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거짓을 좋아하고 거짓을 듣기 원하며 진리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모든 선지자와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한 것처럼 진리를 배척하고 핍박하다가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거짓의 영을 보내실까 하는 의문은, 욥에게 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실까 하는 의문과 같은 의문이며, 나아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따위를 동산 중앙에 두어서 아담의 타락을 방조 내지는 조장했을까 하는 의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 열매를 먹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 질문을 통해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판단하는 것이 곧 악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문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가 되는 길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문은 기껏해야 욥이 가졌던 의문과 같은 것입니다. 아니, 욥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의 이유만을 알고자 했지만, 우리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 진리를 갈구하는 자에게 찾아오듯이, 거짓의 영은 거짓을 원하는 자에게 찾아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만큼 낮아진 좌절과 절망의 늪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자에게만 하늘나라와 하늘의 위로가 주어지는 것처럼, 거짓과 하나가 되어 높아질대로 높아진 우리 모두에게 거짓의 영은 진리의 탈을 쓰고 다가와 우리의 탐욕과 하나가 됩니다.
거짓의 영은 하나님의 시험이나 우롱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거짓의 자식이고, 사탄이 우리 모두의 아비라는 증거일 뿐입니다. 아담이 먹을 줄 알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이나, 거짓의 영을 보내신 것, 세상을 사탄이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것은 모두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절대적인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그 분을 알고, 그 분께로 돌이킬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결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집요한 궤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나누고 서로를 객관화하게 합니다. 마치 창조주의 공의와 피조물의 정의가 다른 것인양 여기게 합니다. 피조물의 정의로 창조주의 공의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배척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입니다. 이미 높아진 피조물의 눈과 귀는 결코 열리지 않습니다. 다르게 보고 있고, 엉뚱하게 듣고 있기에 가리웠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우리의 그런 처지가 바로 참 진리를 배척하고 거짓을 진리로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의 영에게 미혹될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안에 있는 자에게 거짓의 영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눈과 귀가 가리워 스스로의 거짓됨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에게는 거짓의 영이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이 깨어있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혈통, 성전제사, 율법과 성경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눈과 귀가 가리워진 유대인들에게 사탄이 너희의 아비라고 예수님께서 막말을 하신 까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는 물론이고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 역시 눈과 귀가 가리운 채 주일성수와 예배, 십일조와 헌금, 봉사와 기도 같은 헛된 신앙생활로 거짓의 영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진리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은 자, 눈과 귀가 가리운 자의 열심은 회심하기 이전의 바울처럼 진리를 박해하는데 앞장서게 할 뿐입니다.
신자가 궁금해하고 추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내가 진리와 하나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진리와 하나가 되고픈 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왜 거짓의 영을 보내셨는지만을 궁금해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호님의 깊은 성찰과 묵상에 존경을 표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의문과 의심에 대해 조금 더 생각 해 봐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님께서 가지는 의문은 성경을 더 알고자, 믿음을 더 깊이하고자 신앙이 자라는 과정에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아주 좋은 자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아직 진리를 모르고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부정적인 리뷰를 해 주신다면 의문을 덮어두고, 질문을 멈추게 되며 결국 자라나는 신앙이 멈출 수 있습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질문자의 의도를 생각하여주셔서 질문자가 좀 더 힘을 얻어 더욱 성경 묵상과 믿음생활에 매진할 수 있도록 답하여 주신다면 더욱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주로 병자, 장애인, 귀신 들린 자들, 그리고 처지가 그들 못지 않은 하층민들이었고, 드물게는 영생에 관해 묻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자들은 낫게 해주시고, 귀머거리, 장님, 앉은뱅이 같은 장애인들은 고쳐주시고, 귀신 들린 자들에게서는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냥 들어주십니다. 율법을 더 열심히 지켜라, 하나님을 잘 믿어라, 기도 열심히 해라, 착하게 살아라 따위의 말씀은 일절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묻는 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해 밤에 몰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는 다짜고짜 거듭나야 한다고 책망하듯 말씀 하시고, 젊은 부자 관원에게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율법사에게도, 가서 당신이 예로 든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 영생에 대한 지식이 있고, 영생을 추구하는 열심이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불친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단 한번도 그들의 열심을 치하하거나 그들의 지식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과정 중에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해보라고 격려하거나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가는 길이 멸망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책망했기 때문에, 또 그들의 결국을 알고 있기에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천년전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먼 변방 갈릴리에서 온 촌놈이, 그것도 선한 것이라고는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출신의 무지랭이가, 감히 모세 이래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온 민족이 지켜온 모든 것을 부정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기득권들만 그랬을까요? 민중은 예수의 편이었을까요?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예수님과 함께 밥도 먹고 대화도 나눈 몇몇은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수만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직후에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난 것을 보면, 그저 소문으로 듣고 혹시 메시아일까 기대했던 대다수의 민중들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천년전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는 커녕 유대의 모든 전통,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까지 부정한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인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렵다고 생각하고 마치 무슨 암호책인양 여깁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히브리어나 희랍어, 또는 영어로 읽어야만 그 뜻이 바르게 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심지어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어렵다고 여겼고,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씀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이후 율법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유대사회는 율법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끝나는 사회였습니다. 율법을 떠난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강조하고, 율법에 관해 가르쳤다면 유대인들도 어렵게 느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왔다는 이가 율법을 지키라는 말 대신 자꾸 다른 말을 하니 헷갈리고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대부분 유대인들과 같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차라리 구약의 제사법이라면 어떻게든 흉내라도 내볼 텐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시늉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대신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모르는 이를 사랑하기로 합니다. 거리에서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고, 독거노인들한테 도시락을 배달하고, 교도소에 위문을 가는 것으로 원수사랑을 대신하고, 길거리에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물티슈와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으로 땅끝까지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조금이나마 지키고, 분에 넘치는 헌금으로 각종 선교사역에 동참함으로써 제자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단순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참으로 지키고자 했다면 장로들의 유전 따위는 필요 없었을 겁니다. 율법 앞에 이미 모두가 죄인으로 드러났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영악한 인간들은 율법을 이용해 스스로 의로워졌습니다. 죄를 깨닫는 대신 죄에서 벗어나버린 겁니다. 하나님은 수없이 선지자를 보내 책망하시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엎드린 자들의 수는 극히 적었습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불가능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26).
그러나 악한 우리는 유대인들과 똑같이 엉뚱한 유전을 만들어 지키며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 새벽기도, 제자훈련, 찬양대활동, 주차봉사 같은 인간적 행위들에 얼마나 자주, 얼마나 열심히 참여하는지, 십일조와 헌금은 얼마나 양심적으로 하는지, 따위로 믿음을 분별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구원을 확신하며, 자신이 천국백성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행위와 조건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신자라는 이들 역시 이천년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유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우리의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으로 바꿔 생각하거나, 우리가 가식과 위선으로 행하는 거짓 사랑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창조주를 향한 참된 회개를 종교의식으로 변질시킨 종교지도자들에게 쌍욕과 저주를 퍼붓고, 성전을 더럽힌 상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좌판을 뒤엎으며, 돌이키지 않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사탄이 너희의 아비라고 일갈하는 것이 그 분의 사랑입니다. 멸망으로 달려가는 모든 피조물을 향한 애끊는 안타까움으로 당신 자신을 내주시는 분이기에, 이것도 옳다, 저것도 옳다고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은 하나입니다. '예'든지, '아니오'든지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믿음의 길에 중도는 없습니다. 진리는 거짓과 섞일 수도, 타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참된 회개를 종교의식으로 변질시킨 종교지도자들에게 쌍욕과 저주를 퍼붓고, 성전을 더럽힌 상인들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좌판을 뒤엎으며, 돌이키지 않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사탄이 너희의 아비라고 일갈하는 것이 그 분의 사랑입니다.
ㅡ> '쌍욕과 저주를 퍼붓고' 는 표현이 좀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
답변이 너무 길고 요지가 뭔지 모르겠네요. 제 질문의 요지는 거짓말 하는 영의 존재(정체)가 무엇인지 인데 대체적으로 천사의 종류가 하늘의 천사와 마귀와 함깨 타락한 천사들(악령들, 귀신들)로 알고 있고 본문에서 거짓말 하는 영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단순한 질문에 너무도 친절하고 길게 설명을 해서 제가 무슨 질문울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결론은 오직 예수님이면 된다 그런 논리라면 이런 사이트에서 질문과 대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한 질문에 솔직히 답변이 너무 복잡합니다.
구원님 성경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파고드는 자세가 정말 좋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신을 믿었고 그래서 세상 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는 사탄마저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따른 허락이 있어야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욥기1장)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악한 세력을 얼마든지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 심판하기 위해서 우상(사탄)을 숭배하는 이방나라로 이스라엘을 침략 정복 도륙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허락하셨는데 거짓말의 영도 당신의 절대적인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눅22:3) 예수님을 밀고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질문하신 주제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여 없애면 자기가 승리할 줄 착각하고 유다를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우매한 군중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십자가 처형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사탄에 미혹되어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지 않습니까? 샬롬!